171. 폭주족
해수의 눈이 번뜩였다.
로이스킴의 입에서 또 한 번 천티쳐가 나왔다. 그가 대체 누구길래, 칠성회의 주축이 되는 기업들이 그의 눈치를 보는건지.
“천선생에 대해 아는 걸 말해봐.”
허나 로이스킴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도 몰라, 만난 적도 없어. 어디 기업인지, 아니 기업을 맡았는지도 몰라. 근데, 칠성회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건 알아.”
“그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임파서블! 원탁 회의 때만 볼 수 있다는데 우리 회사 뉴 보스도 아직 못 만났어, 천티쳐 비싸.”
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실장도 만나기 이렇게 힘든데, 수장으로 추측되는 천선생은 당연히 만나기 힘들 것이라 예상은 했었다.
로이스킴이 칠성회 회원인데도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생각 이상으로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는 사람인 듯하다.
“뭐,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
한 번이라도 원탁회의가 언제 어디서 하는지 알 수 있다면 그의 얼굴 정도는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중을 기약하며 해수는 그가 준 태블릿을 받았다.
“이 건부터 해결해보지.”
“잘 생각했어 부라더! 내가 자료 다 넘길게, 영장도 프리패스할 수 있게 손을 써둘게.”
해수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밤, 해수는 로이스킴이 알려준 일성식품 고컵라면 건 자료를 넘겨받았다.
로이스킴의 회사 정보원으로 추정되는 증인의 정보, 고컵라면 원자재 해외 구매처 회사, 해당 회사에서 일성식품에 판매한 금액 회계장부까지 있었다.
이건 뭐 조사건 뭐건 그대로 검사에게 갖다 바치기만 하면 될 만큼 상세한 자료였다.
하지만 해수는 계속해서 로이스킴이 의심되어 일을 진행하기가 망설여졌다.
‘왜 능력이 넘치는 로이스킴이 내게 손을 잡자고, 위험을 무릅쓰고 다가왔을까.’
굳이 자신과 손을 잡지 않아도 그의 자리에서 얼마든지 원하는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즉, 그가 거짓으로 칠성회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자신에게 접근한 건 아닐까 의심이 된다.
“흠.”
해수는 황시목이라는 별명을 지닌 검사 연락처를 켜놓은 상태로 망설이다가, 다시 로이스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라더! 시작했어?
“아니, 생각이 바뀌었어, 이 건은 네가 진행해.”
-왓? 아… 이게 그 파트너 신뢰도 테스트 그런 건가? 오케이, 내가 진행할게!
.
.
.
로이스킴은 현재 청장에 대해 파헤칠 때처럼 굉장한 추진력을 보여주었다.
며칠만에 일성식품 사장이 사임을 하고, 매스컴에 나와서 90도로 허리를 숙였던 것.
해수는 뉴스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옆에 로이스킴이 안주용 과자를 주워 먹으며 입을 열었다.
“머리 대신 꼬리가 잘려나갔네, 사장이니까 장기 하나쯤 되려나.”
“한국말 잘 하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제 사장들이 그룹 회장을 크레딧하지 않는다는 게 중요하지.”
하지만 해수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로 회장의 수족들이 칼을 거꾸로 들지는 않을 것이다.
부족하다.
“음.”
“헤이 부라더, 날 좀 더 믿어! 이번에는 회장에게 직접적으로 타격이 가는 정보야, 우리 회장이 요즘 프리티한 인형을 데리고 놀고 있어.”
“인형?”
“아이돌, 인기 있는 아이돌, 사진 보여줄게….”
그 후로도 로이스킴은 일성에 관련된 작은 사건부터 굵직한 사건까지 몇 개 더 알려주었고, 그가 직접 진행하여 일성에 폭탄을 안겨주기도 했다.
연이은 공격에 일성그룹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일성그룹 회장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는 장면까지 보게 되자.
빽도 없고 돈도 없는 신해수를 얻기 위해 일성그룹이라는 큰 기업을 무너트린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해수는 점점 로이스킴을 신뢰하게 되었다.
“부라더, 내일 파티 잊지 않았지? 이번 파티 특성상 칠성회 회원들이 꽤 올 거야.”
“거기 같이 가면 네가 위험해지지 않나?
“괜찮아, 나 겁내지 않아. 거기서 전쟁 선포하는 거지. 잘 지켜봐, 이번 파티에서 나와 부라더가 함께 있는 걸 보고 반응이 오는 사람이, 바로 칠성회야.”
로이스킴의 말에 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조차도 칠성회 회원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런 식으로라도 알아내려는 것이다.
적을 알아야 공격에 대비할 수 있고, 역습을 할 수도 있다.
어차피 그가 해수와 손을 잡은 걸 칠성회가 알아채는 것은 시간문제, 아직 모를 때 터트려서 빈틈을 파고들어야 한다.
* * *
5성급 호텔 꼭대기층에 위치한 연회장.
젊고 아름다운 남녀가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수트와 드레스를 입고 파티를 즐기고 있다.
해수와 로이스킴도 그곳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하지만 해수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의 생각과는 달리 둘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도 어떠한 반응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해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로이스킴에게 누군지 묻는 이들도 많았다.
그래도 돈이 줄줄 새는 최상위층들의 파티가 신기하긴 하여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파티장을 둘러보던 그때, 익숙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신해수…씨?”
옥구슬이 굴러가는 목소리, 해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피부와 상반되는 칠흑같이 검은 드레스에 검은색 하이힐, 머리칼은 곱게 틀어올려 반듯한 이마가 훤히 보인다.
짙은 이목구비가 언제 보아도 인상깊은 여배우를 연상케 하는 그녀, 안서은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의문과 놀람, 미안함 등 수많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에 반해 해수의 눈빛은 건조하기 그지없다.
“서로 모르는 게 좋겠습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더욱.”
“아….”
서은의 큰 눈동자가 반짝인다. 금방이라도 망울이 맺힐 것만 같다.
해수의 말이 백 번 맞지만, 그의 빠르고 차가운 대처가 서운했다.
그때, 로이스킴이 다가와 해수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을 걸었다.
“와우, 이 액설런트한 레이디는 누구?”
로이스킴은 안서은의 존재만 알지 본 것은 처음이었고, 서은은 미리 칠성회로 추측되는 사람들을 추려내는 과정에서 로이스킴을 알고 있었다.
둘이 꽤 친밀해보이는 듯한 느낌에 서은의 눈빛이 조금 차가워졌다.
“새로운 파트너인가요?”
“예, 당신보다 솔직한 파트너입니다.”
“그건….”
그때, 마침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었고, 초청 공연이 시작되어 해수는 자연스레 서은과 떨어졌다.
로이스킴은 멀리서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는 안서은을 힐끔거리며 해수에게 말했다.
“부라더, 아름다운 레이디는 칭찬 받아 마땅해. 너무했어, 레이디 슬퍼보여.”
“칭찬은 네가 해.”
얼굴을 찌푸린 해수가 어깨에 걸쳐진 그의 손을 치울 때.
한 검은 무리가 다가왔다.
이를 본 해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놈들이구나.”
일성전자 사장 배신주였다. 그는 경호원을 네 명이나 달고 있었고, 전에 보았던 기운이 날카로운 자, 석씨는 먼 곳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배사장님.”
배사장은 해수를 노려보다가 로이스킴에게 시선을 돌리며 이죽거렸다.
“이제 알겠네, 로이스킴 저 양키 놈과 손잡고 우릴 치는 거였어.”
로이스킴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왓? 내가 안 했어, 화내지 마, 그러게 클린하게 살았어야지.”
“반쪽짜리 새끼가 건방지게… 로이스, 감당할 수 있겠어?”
“니네 집에 떨어진 불부터 끄는 거 어때? 그것도 감당 못 하는 거 같은데?”
그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석씨가 끼어들었다.
“말 조심하시죠.”
로이스킴도 석씨가 회사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지, 그를 보자 기겁하며 두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며 뒷걸음질을 쳤다.
“워워, 알겠으니까 가까이 오지 마.”
전쟁의 징조는 대화가 들리지 않아도 기운으로 알 수 있다. 파티장에 있는 사람들은 두 무리의 심상치 않은 기운에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 중에는 눈빛이 오묘한 무리도 몇몇 있었다.
로이스가 팔꿈치로 해수를 툭 쳤다.
“이만 갈까? 이 파티에서 우리를 반기지 않는 것 같아, 내가 더 신나는 곳으로 데려다줄게.”
“그래, 나가자.”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진 못했지만, 여기 있어봤자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은 생각에 해수 또한 동의했고.
둘은 바로 연회장에서 몸을 돌렸다.
안서은은 멀어지는 해수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호텔 엘리베이터, 해수는 이 막무가내 교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 이제 더 위험할 거야, 너도 경호원을 데리고 다녀.”
“부라더가 있잖아.”
“내가 너랑 매일 붙어있을 순 없어. 네 몸은 네가 지켜, 돈 많잖아.”
“부라더, 사실 나 싸움 잘 해, MMA를 2년이나 배웠다고!”
딩동- 지하 1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스르르릉-
로이스킴의 외침과 동시에 문이 열리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 다섯 명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로이스킴은 방금 자신감 넘치는 외침은 온데간데 없고, 해수의 팔뚝을 잡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오 갓뎀, 벌써 위험한 거 같아!”
스윽
해수는 로이스킴을 뒤로 보내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그들을 훑어보았다. 모두 처음 보는 얼굴, 손에 흉기를 든 이들은 없었다.
해수를 보고는 사내들이 움찔하더니 뒷걸음질을 치며 길을 터주었다.
해수는 당당하게 그들이 만든 길을 걸었고, 로이스킴은 해수의 등에 딱 붙어 옷자락을 잡고 게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둘이 멀어지자 사내들은 그제야 엘리베이터를 탔다. 뒤늦게 로이스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휘유, 나 때리는 줄 알았네.”
“싸움 잘 한다며.”
“부라더, MMA는 일대일 기술이야, 다수를 상대할 수 없다고.”
“그래 그래, 맞는 말이야.”
* * *
이곳에 올 때 로이스킴이 데리러 왔기에, 해수는 자연스럽게 그의 스포츠카 조수석에 탔다.
차를 타고 뻥 뚫린 외곽도로를 달리는 길.
“난 집으로.”
“왓? 안 돼! 오늘처럼 나이스한 스타일로 집에 가면 죄야 죄! 그러니까….”
부아아앙- 부아아앙-!
그때, 시끄러운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사이드미러를 보니 오토바이 몇 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요즘 보기 드문 폭주족인가 싶었는데, 다들 한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다.
그 정체를 확인한 해수가 눈을 부릅떴다.
“…쇠파이프?”
콰장창!!
해수가 말을 하자마자 오토바이 한 대가 빠르게 다가와 사이드미러를 박살냈다. 반대편의 운전석 쪽 사이드미러도 마찬가지다.
쫄보 로이스킴은 그 덩치를 확 쭈그리며 소리쳤다.
“오 마이 갓!”
주위를 둘러보던 해수는 침음을 삼켰다.
시야가 제한되어 오토바이가 몇 대인지조차 제대로 파악이 안 된다.
그들은 서로 현란하게 자리를 바꿔가며 쇠파이프로 로이스킴의 차를 마구잡이로 두드렸다.
쾅 쾅 쾅!!
“오우 노!! 홀리 쉣!!”
해수는 안전벨트를 풀며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속도 유지해.”
지잉 턱 턱-
창문이 쇠파이프에 찍혀 열리지 않는다. 해수는 한껏 쭈그리고 있는 로이스킴을 힐끗 보았다.
“돈 줄게.”
“왓?”
로이스킴이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물을 때, 해수가 팔꿈치로 차 창문을 찍었다.
콰장창!
“오우 노!”
창문이 깨지기가 무섭게 쇠파이프 하나가 들어왔다.
해수는 두 팔을 안듯이 활짝 펴서 그것을 맨몸으로 맞이하여 안듯이 쇠파이프를 잡고, 바로 확 잡아당겼다.
“우와악!”
콰광 쾅!!
갑작스런 힘에 쇠파이프를 들고 있던 라이더는 그것을 놓을 타이밍도 잡지 못하고 끌려나가다가 중심을 못 잡고 굴러 떨어졌다.
사람이 없는 오토바이는 뒤따라오는 오토바이 두 대를 엮으며 전복되었고, 떨어진 사람도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운이 좋아도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할 것이다.
해수는 빼앗은 쇠파이프를 말아쥐고, 허리에 안전벨트를 감고 몸을 바깥으로 쑥 내밀었다. 보닛 쪽에서 앞유리창을 깨고 있는 폭주족이 보인다.
눈이 마주친 순간, 해수는 쇠파이프를 강하게 휘둘러 뒷바퀴를 때렸다.
웨에엥! 콰장창!!
오토바이가 전복되는 것을 몸을 틀어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것으로 뒤따라 오던 또 다른 오토바이 한 대가 같이 전복되었다.
해수는 반대편에 운전석 창문을 두드리는 폭주족을 보며 말했다.
“로이스킴, 나 믿지.”
“왜,왜 갑자기”
“천장 열어.”
“오우 노!”
로이스킴은 입과는 달리 손은 천장을 오픈하고 있었다. 또 오토바이가 전복될 까봐 약간 떨어져서 달리던 오토바이 몇 대가 이때다 싶어 바짝 쫓아온다.
해수는 쇠파이프를 야구방망이처럼 쥐고, 하체를 벌려 차에 단단히 고정한 채 소리쳤다.
“브레이크!”
“우악!!”
로이스킴은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살짝 밟았고, 순간적으로 속도가 확 떨어지며 해수의 몸이 앞으로 튀어나갈 뻔 했지만 탄탄한 하체로 버텨냈다.
동시에 무섭게 가까워지는 폭주족의 헬멧을 향해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까앙!!
쇠파이프가 휘어지며 그 끔찍한 스윙을 정통으로 맞은 폭주족은 그대로 공중에서 한 바퀴 돌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주인 잃은 오토바이만 앞으로 쭉 나가다가 다른 오토바이와 충돌하였고, 사람이 튀어나가 로이스킴의 앞유리창에 부딪혔다가 떨어져나갔다.
콰광쾅!!
“와우!! 쏘 크뤠이지!!”
해수는 그 사이 튕겨져 나오는 쇠파이프를 낚아채어 로이스킴의 스포츠카를 마치 군마처럼 탄 채로 폭주족들을 처단했다.
그렇게 열 명이 넘는 동료가 생사가 모르게 나가 떨어지자, 그제야 남은 폭주족들은 추적을 포기하고 오토바이를 돌렸다.
“차 돌려.”
“오우 부라더! 이제 괜찮아, 어차피 쟤네 일성이 보낸 거잖아? 일성 배사장을 잡아야지, 쟤네보다 지금은 파티가 중요하다고! 와우!“
어쩐지 신난 듯한 로이스킴의 얼굴에, 해수는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잔챙이들은 잡아봤자 영양가가 없긴 하니 이후의 대책을 논의하는 것도 꽤 합리적인 생각이다.
그들은 다 부서진 스포츠카를 끌고 클럽으로 향했다.
달달 달달
문짝도 하나 떨어지고, 앞유리며 옆유리가 다 깨지고 여기저기 찍혀있는 차가 달달거리며 다가오자 웨이터가 당황해했다.
“헤이 프렌드! 눈이 왜 이렇게 커졌어? 내 카가 그렇게 나이스해?”
웨이터는 로이스킴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말을 더듬으며 손을 들어보였다.
“아,아, 오,오케이.”
“오케이 오케이, 프랜드, 오늘도 플렉스하게 놀아보자고.”
로이스킴은 두 명의 웨이터와 어깨동무를 하면서, 둘의 베스트포켓에 수표를 꽂아주었고.
아직 사나운 기세를 뿜어내고 있던 해수 또한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