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곽반장의 절망
강진서 강력반.
새롭게 등장한 반장의 얼굴을 보고는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장이 히죽 웃으며 한 손을 들어보였다.
“반갑습니다. 앞으로 강수, 아니 강력반의 총 지휘를 맡게 된 반장! 곽수철입니다. 자, 박수!”
곽반장이 박수를 유도하자, 얼떨떨한 표정의 형사들이 뒤늦게 박수를 쳤다.
“바,박수!!”
“와아아아!!”
“아니 곽팀장님 어떻게 된 거에요?”
“이게 무슨 일이야, 강진서 최고 베테랑 납시었네.”
반가운 마음에 막내 우강철은 일어나 소리를 질러댔다.
“와아아!! 반장님! 반장님! 반장님!!”
“아 뭐야 저 양반, 아 진짜, 본청 간다며!”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되어 다들 환영했다.
결재를 받아야 할 윗선이 추가되었다기보다는 든든한 방패이자 길잡이로 보는 것이다.
강진서에서 있는 동안 항상 최고의 결과를 보여준 베테랑이기에 곽반장을 향한 그들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커피 자판기 앞.
강력4팀 팀원들이 하나 둘씩 모였다. 곽반장도 함께였다.
“뭐야 형, 어떻게 된 거야?”
“어 그, 생안과장은 구라였어. 내가 씨 평생 한 일이 강력범죄자들 조지는 건데 그거나 해야지, 니네도 보고, 좋잖아?”
“아 진짜, 출근 날까지 나한테도 안 알려주고.”
“서프라이즈, 모르냐?”
신해수가 커피 한 잔을 뽑아 곽반장에게 넘기며 말했다.
“반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니네가 알아서 잘 해, 난 내일부터 휴가임.”
반장의 말에 오갱이 발끈했다.
“아니, 무슨 전입 후 첫출근 하자마자 휴가라니!”
“진급휴가 아직 안 썼거든? 아무튼 반장 말 잘 듣고, 오팀장, 수고해.”
반장은 오갱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지나갔다.
‘반장님!’ 하면서 인사를 하는 후배 형사들에게 여유롭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 얄밉게 보였다.
반장.
1선에서 물러나 강력반 전체를 관장하는 자리.
각 팀마다 맡은 사건을 듣고 조언을 해주거나, 지원이 필요하면 적절한 팀을 적소에 넣어준다.
각 팀의 사정을 잘 아는 허브로, 강력반을 훨씬 탄력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드는 역할이다.
투덜거리는 말과는 달리 오갱의 표정은 밝았다.
전처럼 밀접하게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가족처럼 지내던 곽반장과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한다는 게 좋은 오갱이었다.
해수도 그가 있어서 든든했다.
정작 그들의 뜨거운 시선을 뒷통수로 받고 있는 곽반장은, 내일 휴가 생각에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지만.
* * *
다음날.
곽수철의 집.
끼익
“어머 깜짝이야,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아내가 잠에서 깨어나 아침밥을 하러 나왔다가 앞치마까지 두르고 있는 수철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수철은 나무주걱을 들어보이며 히죽 웃었다.
“울 여보 아침밥 해주려고 일찍 일어났찌, 맨날 요리하느라고 고생많아쪄.”
“어,어, 그렇구나, 요리하다가 혓바닥도 잘렸나보네. 아무튼 나 그럼 씻고 올게.”
“웅 언능 왕.”
“그만 해, 진짜 잘라버리기 전에.”
“넵 알겠습니다.”
수철은 아내 아침밥을 챙겨주고, 정장 재킷까지 입혀주며 출근 배웅을 했다.
“여보 돈 많이 벌어와요~”
“원래 많이 벌어, 누가 부른다고 나가지 말고 푹 쉬어, 집에 콕 박혀서.”
“웅 알겠오~”
다음에는 딸을 등교시켰다.
집을 나서는 길에 오만원 권 한 장을 딸의 손에 쥐어주었다.
“우리 딸 화이팅! 이걸로 맛있는 거 사먹고, 친구들한테 아빠 진급했다고 자랑하고!”
“아 됐어, 요즘 그런 거 자랑하면 은따 당하거든? 이 돈으로 집에 있을 때 요리하지 말고 시켜먹어, 아빠 요리 맛 없어.”
그러면서 딸은 돈을 다시 신발장 위에 올려놓았다. 수철은 코를 쓱 훔치고는 돈을 다시 챙겼다.
“우리 딸 다 컸네, 시집가도 되겠… 아니 그건 안 되지. 딸, 남자친구 생기면 데려와, 삼촌들이랑 면접 봐야 하니까.”
수철의 말에 딸이 움찔했다.
“사, 삼촌들? 그때 그 삼촌들? 그냥 평생 솔로로 살게요.”
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갔다.
다음은 아직 초딩인 아들이었다.
“아들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잘 지내지? 누가 괴롭히면 말 하고.”
“갖고싶은 거? 있긴 한데….”
아들이 손을 베베 꼬으며 망설이자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뭔데? 말만 해, 아빠가 기분 좋아서 뭐든 다 들어줄게!”
“…수갑.”
“어?”
“수갑, 아빠가 직접 쓰던….”
“어,어… 아, 아들이 또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근데 그건….”
“안 되지?”
“아니, 음, 아빠가 하루 가져오기만 할게, 가지고 어디 나가면 안 돼, 그래도 괜찮아?”
“어, 어 그냥 만져보기만 할게! 앗싸! 아빠 고마워!”
아들은 그저 하루만 진짜 수갑을 보고 만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신이 나서, 몇 년간 끊었던 볼뽀뽀를 해주고 집을 나섰다.
“허헛 참, 그게 뭐 별거라고….”
곽수철은 아들이 나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이 천천히 자연스럽게 닫히자, 그의 눈빛이 180도 변했다.
“자, 이제… 시작해볼까.”
그는 바로 냄비에 물을 데워서 라면을 끓였다. 그리고 김치에 미리 꺼내놓았던 찬밥까지 챙겨서 한 방으로 이동했다.
“흐,흐,흐….”
이 시간만을 기다려왔다.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하루종일 순수하게 게임만 할 수 있는 시간.
모니터 앞에서 라면을 먹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수철은 발가락으로 전원버튼을 누르면서 작지만 소중한 해방감을 느꼈다.
타닥
그가 더블 클릭으로 한 아이콘을 클릭하자, 전체화면이 까맣게 변하더니 검으로 비석에 글씨를 새기는 듯한 기법으로 문자가 쓰였다.
[엑시트 온라인]
수철은 화면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오늘은 풀이다. 의자에 본드를 붙여야지.”
그렇게 라면을 먹으면서 사냥도 하고, 밥도 말아먹고, 탄산음료로 마무리까지 하여 건강에 해로운 3종셋트를 채우고 배를 두어 번 두드렸다.
[경계]
(하루살이-미접속)
“음… 또 없네.”
요즘은 수철을 괴롭혔던 하루살이가 잘 보이지 않는다. 사냥은 편해졌는데 이상하게 섭섭했다.
시원섭섭하다는 말이 딱이었다.
그가 보이지 않으니 복수를 위해 강해질 의욕도 줄어드는 악영향이 있었다.
“이건 나에게 주는 선물….”
하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게임은 재미있었다.
수철은 진급 기념으로 11만원짜리 풀패키지를 과감하게 구매했다.
-짠 짜란 짜잔!!
“오… 뭐야?”
패키지에 딸려오는 박스 중에 신경쓰지 않던 가챠골드박스를 개봉했는데, 5프로 확률로 뜨는 100만 골드가 떴다.
소소한 행복에 기뻐하며 장비랜덤박스를 개봉했다. 물론 이건 더 확률이 극악이기에 기대감을 버린 지 오래였다.
-띠링 띠리링!
그런데, 이번에는 보라색 유니크 무기가 화면을 꽉 채웠다. 1프로도 채 되지 않을 만큼 낮은 확률인데.
“이야, 오늘 무슨 날이야? 나 생일이야? 아, 게임에서도 내 진급을 축하해주는구나, 유후후.”
수철은 휘파람을 불며 사냥터로 갔다. 그때, 수철의 앞에 확률로만 젠이 되는 희귀한 보스가 눈앞에 딱 떨어졌다.
“와씨!! 이건 또 뭐야!”
그는 기분 좋게 약하지만 템은 잘 주는 보스를 사냥하고 아이템을 획득했다.
“와, 주문서도 많이 주고, 오! 이건 내가 필요했던…!”
그동안 거의 하루 30분도 못하던 게임에 이렇게 현질 좀 했다고 술술 잘 풀리는 것을 보고 수철은 마음이 매우 풍족해졌다.
보스를 통해 기존에 있던 아이템 상위호환 벨트를 획득하여 바로 갈아끼우니 모니터 속 캐릭터가 더욱 더 반짝거리는 듯 했다.
“야 씨, 오늘은 진짜 뭐가 되도 될 날인가보다. 짱인데? 아 잠깐.”
우연히 확인한 인벤토리에 검과 주문서가 예쁘게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수철은 문득 신의 계시임을 깨달았다.
“이건, 질러야 돼, 지르라고 이렇게 해 준 거야, 안 지르면 이건 캐릭터에 대한 모욕이지! 가자, 가자! 가즈아!!”
최악의 상황으로 가도, 어차피 오늘 랜덤박스에서 나온 무기를 대체품으로 사용하면 된다. 공격력이 조금 떨어지지만 지를 용기를 주기에는 충분했다.
“어억!”
-띠링 띠리링!
“와씨!!! 우아아악!!!”
수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하늘 높이 들며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검이 업그레이드되었다. 고질병인 수전증때문에 손이 미끄러져서 두 번 클릭했는데, 두 번 다 부서지지 않고 강화되었다.
수철은 하루살이에게 당했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검까지 +2 업그레이드 되었고, 벨트도 바꿨다.
하루만에, 몇단계를 단번에 뛰어넘으며 강해졌다.
“하루살이 없나, 하루살이 덤벼라 덤벼.”
그는 기쁨을 만끽하며 상위 사냥터로 옮겼다. 그런데, 그곳에서 어떤 유저를 발견했다.
대충 입고 있는 아이템을 훑어보니 삐까뻔쩍했지만, 정보를 보니 레벨은 수철보다 꽤 낮았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기분 좋은 김에 조언을 해주었다.
[각대장: 이 게임은 현질보다 컨트롤이 중요하다. 언제까지나 현질로 감당할 수는 없으니, 여긴 너에게 버겁다. 낮은 사냥터로 가라, 엑린이]
수철은 틀딱꼰대유저처럼 한 마디를 남기고, 나름대로 멋있는 조언이었다고 생각하며 뒤돌아섰다.
그때.
[서으니당: …각대장?]
[각대장: 날 아쇼?]
“아 진짜 이늠의 유명세, 어디서 좀 들어봤나보-”
푹 찍-
[캐릭터가 사망하였습니다.]
[+9절망의검(유니크) 을 떨어트렸습니다.]
[경험치 7.33%가 소실되었습니다.]
[레벨이 하락하였습니다.]
“…어?”
순식간에 일어난 일, 수철은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며 멍청하게 가만히 있었다.
각대장 캐릭터의 시체 위에는 그가 방금 전에 강화시켰던 검이 번쩍이고 있었고, 서으니당이라는 허접한 아이디의 캐릭터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가의 아이템이건만, 그는 빨리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한 마디 내뱉었다.
[서으니당: 하루살이가 님 보이면 죽이라고 했어요.]
[각대장: …]
그때.
꾸물 꾸물 꾸물
저 멀리서 몸이 액체로만 이루어진 몬스터가 천천히 기어오기 시작했다.
사냥터마다 낮은 확률로 나타나는 슬랄임.
저것이 아이템을 삼키고 20초가 지나면 영영 찾을 수 없다.
수철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타자를 쳤다.
[각대장: 저기요 님아 나 죽인 건 원망 안 할 테니까 템 좀 주웠다가 나 주면 안 되요?]
[각대장: 제발요 저기 슬라임 오잖아요 슬라임이 주우면 안 되는데]
[각대장: 저기요? 나갔어요? 야야!! 주워 주워 내가 살 테니까 주우라고!]
[각대장: 온다, 온다!! 제, 제발! 제바알!]
꿀꺽 끄득 까드득
결국 슬라임이 와서 각대장의 무기를 삼켜버렸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서으니당 캐릭터는 텔레포트를 타버렸다.
“으아아아!!!”
수철은 극도의 분노에 컴퓨터 전원을 꺼버리고 문 밖으로 나갔다.
철컥-
때마침 하교하는 딸 곽은정과 마주쳤다.
은정은 아빠의 어쩐지 촉촉해진 눈을 보고는 물었다.
“아빠 울었어?”
딸의 물음에 수철은 다급히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어,어? 아니 아니야, 아빠가 왜 울어.”
“아빠 슬픈 영화 좀 보지 마, 아빠같은 갱년기에 슬픈 거 찾아보는 거 아니래. 힐링물 찾아봐.”
“어 그래, 우리 딸, 고마워….”
“아 진짜 신경 쓰이게, 암튼 내일 학교 안 가니까 영화나 한 편 같이 보든가.”
“어?”
딸은 부끄러운 듯이 바로 방으로 들어갔고, 수철은 그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하루살이 개ㅅㄲ….’
* * *
몇 분 전, 대성E&M 대표 사무실.
타닥 탁탁탁-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고, 안서은은 요즘 쉬는 시간이면 항상 엑시트 모바일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밤마다 하루와 게임상에서 만나 1:1트레이닝까지 받았다.
꽤 오래된 게임이지만, 그녀의 자본력은 뉴비와 고인물의 간극을 채우기 충분하다 못해 넘쳐흘렀다.
요즘 직업 찾는다고 하루가 바빠서 조금은 지루하게 게임을 하고 있던 때에, 척살령을 받았던 각대장이라는 캐릭터를 발견했다.
“각대장, 각대장… 설마 곽대장님은 아니겠지?”
[각대장: 이 게임은 현질보다 컨트롤이 중요하다. 언제까지나 현질로 감당할 수는 없으니, 여긴 너에게 버겁다. 낮은 사냥터로 가라, 엑린이]
“역시 아니구나, 공격.”
푹 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