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기적을 부르는 사기
6개월 전. 지잡대 컴공과 1학년, 정영수.
그는 찐따 특유의 패시브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대학교를 다닐 때도 항상 구석에 있으면서 혼자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인싸 과대가 그에게 다가왔다.
“정수야, 정수 맞지?”
“영수, 정영수.”
“어 그래 정수야, 아니 우리 오늘 무용과랑 미팅 있는데 지성이가 급하게 빠져서, 자리 좀 채워주라, 응?”
“무, 무용과…?”
사람들 많은 곳에 가면 공황상태가 될 정도로 대인기피증이 심한 영수였지만, 캠퍼스 낭만의 판타지인 무용과와의 미팅은 지병을 초월할 수 있었다.
거기다 무용과 여학생들은 정말 판타지를 200프로 채울 정도로 모두 아름다웠다.
특히 그 특유의 허리와 목이 꼿꼿한 자세에서 뿜어져 나오는 도도함은 외모를 더욱 빛나게 했다.
“여기 안경 쓴 찐, 아니 찐 인싸 친구는 정수! 우리 과 탑! 전액 장학생!”
“영수….”
“와?”
“우와!”
언제나 그렇듯, 외모는 공평하지 않다. 모두 예쁜 무용과 학생들도 그 중에 유독 예쁜 학생이 있었다.
그리고 눈이 똑같은 남자들은 모두 그녀를 지목했다.
다만, 누구와 이어져도 행복할 것 같은 영수만은 아무도 찍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그때, 모든 남자들의 지목을 받은 그녀가 치명적인 미소를 지으며 영수를 지목했다.
“나는 이 과 탑. 영수라고 했지?”
“어, 응…,”
그렇게 정영수는 그렇게 아싸 중에 아싸이면서 모든 남자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그녀와 만나게 되었다.
그녀가 왜 자신같은 아싸를 지목했는지는 사귄 지 6개월이 지난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얼굴도 착하고 마음씨도 착하고 몸매도 착한 여자친구 은미, 그녀로 인해 영수는 흑백같던 자신의 인생이 컬러풀해지기 시작했다.
애교도 많고 섹시하기까지 한 그녀에게 억만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지만, 억만금이 없어서 문제였을 정도다.
“하….”
사랑하는 여자친구의 어머니 수술비는 천만 원, 영수는 자신의 계좌 잔액을 확인해보았다.
-잔액: 3,024,100 원
이미 수술이 아닌 시술로 500만원을 빌려준 적이 있다. 그런데 수술이 잘 되지 않아 병이 더욱 악화되었다고 한다.
여자친구 외에 다른 친구는 만들지도 않았고, 그때 이후로 묘하게 더 따돌림을 당하여 친구도 없다.
친구라고는 학창시절에 같이 사기를 치던 그 일진들이 전부다. 친구로 불릴 놈들도 아니다. 이제는 교도소 들어가서 볼 일도 없다.
“사나이 정영수 인생 왜 이러냐.”
영수가 인생을 한탄하며 걸음을 옮기던 그때, 문자가 울렸다.
지이잉
[신형님: 돈 때문에 수술 날짜 미루는 거 아니다. 얼마나 필요해, 무이자 60개월까지 가능하다.]
“와…이 형님 진짜…!”
영수는 고마움과 굴욕감, 자존심,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눈물이 찔끔 났다.
아까 그렇게 매정하게 끊은 것도 미안했다.
그는 해수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
“하… 형님, 제가 꼭 갚을 게요.”
-알았다. 얼마나 필요해.
“700…만 원이요.”
-천 보냈다. 천천히 갚아.
“감사합니다 형님! 정말 평생 뼈가 닳도록 형님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뼈 삭으면 일 못한다. 멸치 많이 먹어.
“알겠습니다 형님!”
영수는 전화를 끊자마자 여자친구에게 바로 천만 원을 그대로 보냈다.
그러고는 의기양양하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 지금 좀 바…
“자기야, 돈 보냈어.”
-어, 우웅?
여자친구는 계좌를 확인하고는 금세 애교가 200프로 충전된 하이톤으로 말했다.
-여봉봉봉!!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이 돈을 뚝딱 구했어? 여봉 진짜 마법사같애,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 진짜, 쪽쪽쬭 쬽
“허헣, 허허헣 아 별거 아니야, 내 여자가 힘들다는데, 남자가 돼서 그 정도는 해야지, 얼른 수술날짜 잡아.”
-응 알았어, 봉봉 어디야 내가 바로 갈게.
“아이 안 그래도 되는데, 그럼 내가 정문으로 갈게.”
-웅 알게쏘 이뿐 옷 입구 갈겡!
그로부터 한 달 뒤.
일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니고, 해수도 찔림이 있어서 웬만해서는 영수에게 일을 맡기지 않았다.
그러니 한 달만에 천만 원을 갚았을 리도 없다.
다행히 안서은 이사와 연락이 닿아서 대성백화점 보안팀과 연결하여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었다. 노동에 비해서는 큰돈을 받지만, 영수는 언제나 목이 말랐다.
아니, 영수의 여자친구가 언제나 목이 말랐다.
수술비 외에도 아이돌 가수를 한다며 레슨비, 원룸 월세, 식비 등을 영수가 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웅 정말, 나는 맨날 쟈기한테 받기만 해서 미안해, 저기 호프집 알바 구하던데 알바라도 뛸까?”
“어? 안돼안돼안돼 절대 안돼, 우리 쟈기 너무 예뻐서 똥파리 엄청 꼬여, 내가 돈 번다고 했잖아, 걱정 말고 아르바이트 하지 마.”
“안 돼 오빠… 나 사실… 어머니 재수술받아야 해서… 돈 없어서 재수술 못 들어가고 있어, 나는 정말 나쁜 년이야, 흐윽”
“어, 어? 재,재수술? 수술비가 얼만데?”
“700만 원… 아냐 오빠. 나 진짜 오빠한테 미안해서 안 돼, 빌려주지 마, 내가 알아서 해볼게.”
“아….”
해수의 빚을 갚아야하지만, 밑 빠진 독처럼 돈이 나가는 바람에 영수는 그저 걱정만 가득할 뿐이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재수술비까지 필요하니 목이 막혀왔다.
영수는 여자친구의 닭똥같은 눈물을 보고는 결국 자신이 책임진다고 내지르고 나왔다.
‘어쩌지, 어쩌냐… 헛?’
영수는 해수에 대한 죄책감에 휩싸여 걷다보니 어느새 리드 빌딩 앞까지 오게 되었다.
영수는 빌딩 로비에 있는 휴게 공간 의자에 걸터앉아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하….”
그때.
슥
“뭐하냐.”
“우왁!”
그의 시야에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신해수가 들어왔다.
“시, 신형님.”
해수는 형사 특유의 눈초리로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고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걱정 있어?”
“아, 형님 그게….”
영수가 뜸을 들이자 해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돈은 천천히 갚아, 네가 충분히 자리 잡고 안정적으로 되면.”
“네, 네… 형님, 흐… 진짜 감사합니다….”
영수는 전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다크서클이 짙어지고 볼도 홀쭉해졌다. 딱 봐도 근심이 많은 청년으로 보인다.
여자를 만나기 시작한 이후부터 그랬다.
자신과 상대를 점점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연애가 아닌, 부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연애는 빨리 그만두어야 한다.
해수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물었다.
“여자친구는 잘 만나고 있어?”
“네?! 아, 네, 뭐…”
“뭐하는 사람인데.”
“아, 학생이에요. 무용과… 사진 보여드릴까요?”
영수의 얼굴에는 금세 화색이 돌았다. 그는 해수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휴대폰으로 여자친구와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쁘죠?”
“음, 그래, 처음 보네.”
“아 그… 프사나 sns에는 올리는 거 안 좋아해서.”
그러면서 여자친구의 사진을 보는 영수의 표정이 복잡미묘하다. 해수는 그의 눈빛을 읽고 다시 물었다.
“여자친구 어머님은 뵌 적 있어?”
“아, 아뇨.”
“수술비까지 대줬으면 그쪽에서 궁금해서 보자고 할 것 같은데….”
“아하하… 글쎄요. 저도 가기는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여자친구가 돈을 또 빌려달라고 한 적이 있어?”
해수의 질문이 점점 사적인 질문에서 취조 형식으로 좁혀졌다.
기민한 영수가 그것을 못알아챌 리가 없다. 그는 해수의 의도를 깨닫고 발끈했다.
“형님, 형님이 돈 빌려주신 건 정말 고마운데, 우리 은미 그런 애 아니거든요. 저 이만 가볼게요.”
“그래,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하고.”
영수는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리드 빌딩 출입문으로 나오면서부터 후회했다.
‘난 정말 개새끼야, 저렇게 도와준 형한테… 하, 씨.’
재수술비를 해수에게 또 빌릴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원래 돈을 갚지 못해서 미안했을 뿐.
영수는 그 길로 제3금융에서 대출을 받아 현금으로 뽑아서 직접 여자친구에게 주었다.
“여봉봉!! 아니 이건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왜 또… 아 진짜, 여봉 나 정말 사랑하는구나?”
“당연하지… 이걸로 빨리 재수술 들어가고, 우리 쟈기가 웃는 모습 많이 봤으면 좋겠어.”
“울 여봉은 말도 왜 이렇게 이쁘게 해? 움뇸뇸!”
천사보다 사랑스러운 여자친구의 뽀뽀세례에 영수는 지금까지의 근심과 걱정이 모두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그저 바보같이 허허 웃다가 문득 해수와의 만남이 떠올랐다.
“자기야, 어머님은 어디 병원에 입원해 계신 거야?”
“…웅? 웅… 저기, 대성 병원, 왜?”
“그렇구나, 어머님한테 내 얘기 한 적 있어?”
“어? 아 수술비 대줬는데 당연하지! 얼마나 고마워하셨는데, 여봉은 정말 최고야!”
“내가 한 번 찾아뵐 수….”
“아! 아….”
“왜, 왜 그래?”
“머리가 좀 아파서, 아까부터 좀 아퐁.”
“아 정말? 어쩌지? 내가 약 사올게.”
“아니, 아니야, 얼른 들어가서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여봉 정말 고마워.”
“어, 그, 그래, 몸 관리 잘 하고, 너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웅 여봉 살웅훼!”
영수는 머리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 들어가는 여자친구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 번도 뒤돌아서지 않았다.
* * *
또각 또각 또각
은미가 사는 원룸 건물 계단, 그녀는 계단을 오르며 창문가로 영수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휴대폰을 들었다.
“어, 나야, 시발 이 호구새끼가 아픈 엄마 보여달라는데? 존나 쫄았다. 어, 돈은 받긴 받았어, 아니 씨 얘가 퍼주는 돈이 얼만데 그만둬, 대성 병원이나 한 바퀴 돌아봐.”
* * *
탁 탁
정영수의 방, 컴퓨터 앞.
그는 대성병원 홈페이지에 들어간 채로 가만히 모니터를 응시했다.
“후음….”
그가 키보드에 손을 올리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지이잉-
-은미자깅: 여봉봉! 오늘 같이 병원 갈까? 울엄마 소개시켜줄게.
문자를 본 영수의 눈이 확 커졌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출복을 챙겼다.
* * *
대성병원 입원실.
은미는 미리 자신을 돕는 친구와 알아보고 식물인간 상태인 중년여인을 찾아놓은 후였다.
“인사해, 엄마야… 엄마, 내 남자친구…”
영수는 죽은 듯이 누워있는 여자친구의 어머니를 보고는 왠지 마음이 숙연해졌다.
옆의 여자친구도 눈가가 촉촉해져 있다.
“아, 어, 안녕하세요. 정영수라고 합니다….”
“사실… 오랫동안 못 깨어나셨어, 말 못해서 미안해, 이번 수술만 하면 괜찮아지겠지… 흑”
“어,어 그랬구나, 괜찮아, 괜찮을 거야.”
“흐읍, 이,이제 그만… 나가자….”
“그래, 그… 어?”
그때, 영수의 눈에 여자친구 어머니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우, 움직이셨는데?”
“…어?”
여자친구가 기겁하며 중년여인을 보았다. 손이 덜덜 떨리더니, 이내 눈이 번쩍 뜨였다.
“허억!”
중년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수의 여자친구 은미를 바라보며 입을 천천히 열었다.
“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