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해수 친구라고
오세연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어쩐지 이상하리만치 냉정함을 유지하더니… 믿는 구석이 있었어.’
오세연은 저 영상이 풀렸을 경우의 실득을 따지면서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때,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해.”
“…뭐?”
“오해라는 단어는 마법과도 같아서 원수에게도 면책권을 가져다 줄 수 있지. 오해로 끝내게 해줄게, 너에게 이걸 시킨 사람이 누구야.”
그녀가 회에서 보낸 사람이 맞다면, 어차피 무고죄로 신고해도 집행유예를 받고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녀만큼은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게 되니 연예인을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오세연이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해수가 말을 이었다.
“날 노렸다가 실패한 자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지 않나? 너는 무사할 거라고 생각해? 그들을 믿어?”
“당신보다는….”
오세연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녀의 눈빛에서 대답이 읽혔다.
해수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어느새 꼬고 있던 오세연의 다리는 풀려 있었다.
“오해였다면서 고소 취하하고, 일단 외국으로 피신해 있어. 그들에게는 일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 외국에 가 있으면 굳이 찾아서 제거하려고 수고를 들이지는 않을 거야. 최대한 멀리, 꽁꽁 숨어있어, SNS같은 거 하지 말고.”
순식간에 입장이 바뀌며 해수가 오세연에게 자비를 베푸는 형태가 되었다.
오세연은 해수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고소를 취하하더라도 영상이 풀리지 않는 한 여론과 네티즌은 여전히 해수를 욕할 것이다.
아직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는데, 아무런 이득도 없이 그것을 감수한다는 것은 득과 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당신의 목적이 뭐지?”
“단순해, 나라를 좀먹는 그들을 싸그리 잡아넣는 거.”
“고작… 개인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두고 보면 알겠지.”
오세연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취조실을 나섰다.
그리고 몇 분 뒤, 해수를 취조했던 형사가 들어와 수갑을 풀어주었다.
“당신, 내가 기억할 거야. 대체 무슨 협박을 했길래 저 천사같은 분이 취하했는지 몰라도 …아, 아!”
형사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 전에 해수에게 어깨를 붙잡힌 것이다.
해수는 그의 쇄골을 지그시 누르며 물었다.
“이름이 뭐라고?”
“아으으, 이, 이러면 공무집행 방해로… 아윽! 김상태! 김상태!”
“그래, 김상태 경사, 감히 가장 공정해야 할 경찰이 이따위로 취조를 해? 내가 다시 찾아오기 전에 경찰 배지 떼세요. 나는 빈말 안 합니다.”
김상태 경사는 거의 해수 앞에서 두 무릎까지 꿇은 상태였다. 해수는 그를 옆으로 치우고 취조실을 나섰다.
“해수야!”
“우리 돌격이! 나왔어? 수고했어 수고했어, 비켜 이 새끼들아!”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밖에 강력반에는 시커먼 남자 세 명과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갱과 막내가 후다닥 다가와 해수를 부축했다. 해수는 그들의 손을 부드럽게 거부했다.
“제가 무슨 고문이라도 당했습니까? 멀쩡합니다.”
“아, 그치, 아까 그 새끼 이름 뭐라고? 김썩은동태?”
“아닙니다.”
곽팀장은 해수를 데리고 강력팀 사무실을 나서려다가 멈칫하고는, 뒤돌아서 소리쳤다.
“용주서 강력1팀! 내가 얼굴 한 명 한 명 다 기억했어, 유죄추정도 아니고 유죄확신? 참내 어이가 없어서, 하는 짓이 이미 죄 없는 사람 여럿 깜빵 보냈을 거 같은데, 곧 밝혀냅니다. 두고 봅시다!”
곽팀장은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소리치다가 덩치 삼인방과 멀어지자 재빨리 마무리멘트를 하고 따라붙었다.
경찰서 주차장, 강수대 봉고차에 탑승하려는데 저쪽에서 외제차에 기대고 서 있는 여배우 오세연이 보였다.
그녀는 해수를 보고는 선글라스를 벗고 도도하게 걸어왔다.
또각 또각 또각
강수대 대원들은 차에 타면서 눈으로 그녀에게 쌍욕을 했다.
그녀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해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슥
그러자 둘 사이로 무언가 쑥 끼어들었다. 하루였다.
“뭡니까 또.”
오세연은 하루를 보고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 그 상태로 하루 너머 해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난 이제 바로 비행기 타러 가요.”
“…….”
“저도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직접 만나서 원탁에서 회의를 한다고 했어요. 그것밖에 드릴 말씀이 없네요.”
“원탁, 정말 별로 도움은 안 되는군요.”
“하하, 저, 반은 진심이었어요. 욕심 났었는데….”
이번에는 오세연의 시선이 하루에게 옮겨졌다.
해수는 건조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봉고차에 올라탔다. 하루는 혼자 우두커니 남아 오세연을 열심히 노려보았다.
“엇-”
그때 한 손이 튀어나와 하루의 손목을 잡고 확 당겼다. 그러고는 바로 문이 거칠게 닫혔다.
쿵
굳게 닫힌 봉고차 문을 보며 오세연은 실소를 흘렸다.
* * *
오해였다는 해명 이후.
오세연이 돌연 연예계를 은퇴한다는 편지 한 장만 놔두고 사라진 지 이틀 째.
이전에 복용했던 정신과 약, 그리고 상담 사실이 매니지를 통해 밝혀졌지만 그 이유가 신해수에게 있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해수가 출퇴근길에 오세연의 팬에게 달걀을 맞는 일도 있었지만 그는 초연하게 넘겼다.
빌딩숲이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라운지.
천선생이 작은 소주잔을 들고 통유리 앞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다. 수천만 원짜리 수트에 싸구려 소주잔을 들고 있는 그 모습 자체에 괴리감이 느껴진다.
“여론은 떠들썩한테 별다른 말은 없네요. 어때요?”
천선생의 물음에 그 뒤에 기립해 있던 마실장이 바로 대답했다.
“예, 쉽지 않은 자입니다.”
처음 듣는 평가에 천선생이 고개를 돌려 마실장을 보았다.
“오호… 마실장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더 탐나네요. 그 여배우도 마실장 작품이에요?”
“예.”
“그래요. 천천히 해요. 천천히, 부러지지 않게, 삼고초려하는 마음으로.”
“예, 선생님.”
일반인을 회로 끌어들이는 방법, 그것은, 모든 것을 잃게 만들어 벼랑 끝에서 손을 내미는 것이다.
* * *
길 건너편에 강진서가 보이는 한식 식당.
덩치 큰 사내가 소주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밥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다.
볼도 빨갛고 눈도 반쯤 풀려있어 사람들은 그를 피해서 앉거나, 보자마자 다시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냥 덩치만 있는 게 아니라 밥을 퍼먹을 때 드러나는 팔뚝에 탄탄한 근육과 힘줄까지 보여 사장도 차마 뭐라 하지 못하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때, 그가 깔끔하게 먹어치운 밥그릇을 내려놓고는 메뉴판을 보며 외쳤다.
“치킨, 여기 치킨 한 마리 더 주세요.”
“네? 소,손님 여긴 치킨은 안 파는데요.”
“뭐?!! 치킨을 안 파라? 한국에서 치킨을 안 파는 식당이 어딨어! 아 그러면 후라이드, 후라이드 주세요.”
“죄송하지만 후라이드도….”
“아니 그런 게 어딨어! 지금 나 회사에서 짤렸다고 무시하는 거야? 어? 당신 그런 거지?”
“아,아니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무시 안 했어요.”
“무시했잖아 무시!! 어!”
사내가 손 한번 휘두르지 않고 힘도 쓰지 않았지만 그 몸만으로도 흉기나 마찬가지였다.
종업원이 쩔쩔 매자 뒤에 숨어있던 사장이 차마 앞으로 나서지는 못하고 소리쳤다.
“어,얼른 나가세요! 안 그럼 경찰 부를 겁니다! 저기 바로 앞에 경찰서에요!”
“경찰? 불러! 경찰 불러요! 빨리 불러!”
“지, 진짜 부릅니다!”
“빨리 불러보라고!!”
사내가 윽박지르자 사장은 다급히 휴대폰을 꺼내어 112가 아닌 경찰서에 직접 전화를 걸었고, 사무실에 있던 형사들이 그를 잡으려고 튀어나왔다.
사내는 막무가내 행동과는 달리 형사들이 왔을 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잡혔다.
그저 입으로만 바쁘게 소리칠 뿐이었다.
“이거 안 놔! 어?! 나 저기 경찰서에 친구 있어! 어?! 나 신해수 친구야! 해수 친구니까 이거 놔! 나 내보내라고!!”
* * *
“…이렇다고 합니다.”
강수대 본부, 막내는 내선 전화를 받고 해수에게 방금 소식을 전했다.
“돌격아 무시해, 이거 백퍼 그 오세연 그 여우같은 여자 팬이다. 아우 좀 잠잠하다 싶었는데, 또 지랄이네.”
“음… 일단 다녀와보겠습니다.”
해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상대가 덩치가 크고 근육질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강력반에서 내선전화까지 했으니 얼굴이라도 비추는 것이 예의였다.
강력반에 다다르자 벌써부터 큰 소리가 들려왔다.
-해수가 내 친구라니까 친구! 어! 해수가 나랑 어! 사우나도 했고, 밥도 먹고, 다 했어! 어?!
끼익-
문을 열자 구석에서 삿대질을 하며 소리치고 있는 곰 같은 사내를 발견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해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랐다.
그는 바로 안서은의 경호실장이었던 김가드였다.
안서은과 처음 만남 때 칼부림 사내를 막지 못하여 잘린 것을, 해수가 다시 복귀시켜 준 적이 있었다.
만남이 길지는 않았지만, 이런 사람은 아니었다.
뭐라 말을 잇지 못하던 그때, 김가드가 먼저 해수를 알아보고 벌떡 일어나 포옹을 했다.
“어, 어어 내 친구 해수!”
“엇, 신형사님 오셨어요?”
“진짜 친군가?”
해수는 얼떨떨한 얼굴로 가만히 있었고, 김가드는 해수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고 외쳤다.
“친구! 나 좀 내보내줘!”
순간 손에 무언가가 쥐어졌다. 아주 작은 쪽지 하나, 해수는 지금 어떤 상황인지 대강 눈치를 챘다.
그는 김가드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 친구는 맞는데, 무시하고 법대로 처리해주십시오. 이 친구 월급 많습니다.”
“어, 어? 친구야? 신형사님?”
해수는 바로 돌아서서 강력반을 빠져나갔고, 김가드는 얼 빠진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해수가 친구임을 인정하기도 했고, 근육질임에도 힘 한 번 쓰지 않고 소리만 고래고래 지른 것을 감안해서 김가드는 벌금형을 받았다.
해수는 바로 화장실로 가서 김가드에게 받은 쪽지를 펴보았다.
[이사님이 안씨 본가에 감금당했습니다.]
역시, 안서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상태였다.
전화나 문자도 아니고,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으로 알린 것을 보면 감시도 붙고 도청도 당하는 듯했다.
해수는 잠시 고민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안씨 본가면 결국 대성그룹 회장인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가둔 것이다.
집안일은 타인이 끼기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러나, 박 경위의 사망과 회 측의 습격, 여론이 바뀐 타이밍을 생각해보면 그저 집안일로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일로 안서은이 곤경에 처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스윽
해수는 비장한 눈빛으로 대변기에서 일어섰다.
* * *
정영수 프로 화이트해커에게 부탁하여 김가드에 대한 정보를 파악했다.
안서은의 경호실장에서 잘린 그는, 현재 대성 가드에서 의뢰인을 받지 않고 대기 중이었다.
그리고 대성 가드는 하루의 친정집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루야, 네 도움이 필요하다.
대성 가드 경호원들이 아직 출근하지 않은 이른 아침, 그곳에 모자를 깊이 눌러쓴 가녀린 체형의 여성이 나타났다.
그녀는 제집처럼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사물함이 있는 곳으로 가더니, 김가드의 개인사물함에 쪽지 하나를 끼워두었다.
잠시 후, 김가드가 출근을 해서 옷을 갈아입으려고 사물함을 열었다가 그 쪽지를 발견했다.
[하나로]
“음….”
비밀스럽게 전달한 것치고 매우 난해한 내용이다.
김가드는 운동하는 내내 하나로가 무슨 뜻인지 유추하느라고 머리를 싸맸다.
그렇게 퇴근시간이 다가왔고, 여느 때처럼 걸어서 집으로 향하는데 회사 맞은편에 커다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로 PC방]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