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도난 사건
해수가 안서은에게 전화를 걸던 날로부터, 며칠 전.
통유리 너머에 대나무숲이 자리잡은 고급 식당.
쩝 쩝
새하얀 머리의 중년인이 음식을 씹어먹는 소리만이 적막하게 울리는 그곳에, 덩치가 곰처럼 큰 사내가 들어왔다.
“천선생님.”
천선생님이라 불린 중년인은 젓가락을 살짝 들어 말을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반팀장은 퇴사 시켰습니다.”
“음, 그래요.”
천선생은 입안에 있는 음식물을 모두 먹고, 티슈를 입을 닦고는 그제야 덩치 큰 사내, 마실장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해요? 마실장은.”
주어가 없이 묻는 것은 천선생 특유의 화법이다. 주어가 뭔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은 천선생 옆에 오래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마실장은 천선생 옆에서 가장 오랫동안 일을 한 해결사다.
“과소평가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실장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신해수에게 조금 더 신경이 쓰이게 되었다.
반팀장이 독단적으로 암살을 실행했다고 해도, 말 그대로 팀장은 팀장이다.
나이가 있어 젊은 사원들보다 전투력은 조금 떨어질지라도, 수많은 경험으로 인해 전투력을 훨씬 웃도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사원들이 신해수에게 기습을 당해서 잡힌 것과는 상황이 많이 다른 것이다.
특히 회사원들의 주특기인 암습을 했는데 실패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이런 마실장의 생각을 들은 천선생이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실수했네. 그 형사, 잘 타일러봐요.”
천선생의 결론에 마실장은 눈을 크게 부릅떴다.
긍정적으로 눈여겨본다. 이미 훈련된 사원이 아닌 사람을 회에 끌어들일 의향이 있다는 뜻이다.
끌어들이는 방법은…
“예, 알겠습니다.”
* * *
같은 날, 대성그룹 안씨 본가.
1인 소파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인이, 3인 소파에는 여배우처럼 이목구비가 진하고 선한 인상의 여인이 앉아있다.
“아직도 행동에 변함이 없더구나.”
중후한 목소리가 넓은 거실에 울려 퍼진다.
중년인은 안서은의 아버지이자 대성그룹의 회장, 안기원이다.
안서은은 안회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눈도 깜빡이지 않고 대답했다.
“네.”
안회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찻잔을 들어 한 번 들이키고, 다시 내려놓았다.
탁
“이해를 바라지는 않으마.”
그가 턱짓하자 뒤에 있던 사내 둘과 여인 한 명이 안서은에게 다가왔다. 서은은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빠르게 예측하고는 미간을 확 찌푸리며 벌떡 일어섰다.
“지금 뭐하는 거에요?! 회장님, 아니 아빠!”
“얌전히 있어, 그게 네가 사는 길이야.”
그 사이 사내 둘이 다가와 서은의 양편에 섰다. 그리고 여인 한 명이 서은 앞에 마주서서 가볍게 목례를 했다.
“실례하겠습니다.”
탁-
그녀가 서은의 몸에 손을 대려고 하자, 서은이 가까워진 손목을 쳐내고 안회장을 노려보았다.
“정말 이러실 거에요?”
안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서은을 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번처럼 가정부한테 매달려서 나갈 생각은 접어라, 그 여자, 절도로 신고 들어갔다.”
털썩
안서은은 안회장의 말에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대성그룹에서 가정부 한 명 정도 처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없는 일을 만들어내지는 않으니, 분명 작은 일을 큰 일로 키워서 교도소로 보낸 것이다.
힘이 빠진 그녀에게 다시 여인이 다가가 품을 뒤지며, 휴대폰과 시계 등 전자기기를 모두 빼앗았다.
경호원과 비서는 회장이 붙여준 사람들로 새롭게 바뀌었다.
그녀는 꼼짝없이 안씨 본가에 감금되어, 회사 일 관련한 결재까지도 그곳에서 하게 된 것이다.
* * *
강진 경찰서 앞.
신해수가 나오자 기자들이 달라붙었다.
“어어, 나왔다 나왔다.”
“신형사님! 신형사님 인터뷰 한 번만 해주시죠!”
“무진파 검거 당시에 조직원이 반항하지 않아도 둔기로 머리를 때렸다는데 사실입니까?”
“항상 과잉진압으로 말이 많은데도 과잉진압을 고집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형사 월급으로 억대 과잉진압 합의금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투명하게 밝혀주시죠?!”
기자들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서 물어뜯는다. 전과는 달리 금세 적대적인 질문을 퍼붓는 기자들.
해수는 지나가려다가 멈추어 서고, 그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의 기세에 순간 기자들의 입이 모두 다물어졌다.
“들어오시죠, 전처럼 강당으로.”
해수는 피할 생각이 없었다.
기자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인터뷰 시작 전에 그들에게 엄포 아닌 엄포를 놓았다.
“시작 전에 제가 강수대 형사임을 인지해주시기 바랍니다. 허위사실 유포 및 명예훼손은 처벌의 대상입니다.”
“지금 기자를 상대로 협박하시는 겁니까?”
해수는 바로 도발하는 기자에게 고개를 돌려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살기가 담긴 해수의 대답에 기자들은 긴장하여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럼, 시작하시죠.”
그러나, 해수의 무시무시한 기운에도 기자들을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충남 강수대 신경사, 과잉진압 후회하지 않아.]
[강수대 신경사, 과잉진압이라 하는 법이 잘못된 것, 사법계 저격]
[강수대 신형사, 빚쟁이에서 갑작스레 수백 억대 자산가? ‘운이 좋았을 뿐.’]
대성의 바리게이트가 없어진 지금, 경찰청장만의 힘으로는 쏟아지는 기사와 만들어진 흐름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그래도 이번 여론이 실질적으로 경찰 측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경찰 이미지도 실추될 수 있지만, 해수가 연예인이 아닌 만큼 정신적인 타격은 적었다.
해수는 일단 안서은을 찾기보다는 하루의 병문안을 먼저 갔다.
병원에 들어선 그가 주위를 살폈다.
여론이 바뀌고 안서은이 연락을 받지 않지만, 습관처럼 대성병원에 하루가 입원했다.
그럼에도 병원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경찰들에게 깍듯이 친절했고 치료비도 그대로였다.
똑똑
“들어간다.”
1인실로 들어가자 하루가 웬일로 휴대폰이 아니라 책을 보다가 해수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하루는 이마와 눈 위쪽에 거즈를 붙이고 있었다.
현장에서는 피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걱정이 되었지만, 생각보다 상처가 깊지 않았다.
하지만 해수는 여전히 하루가 걱정되었다.
툭
“괜찮아?”
해수는 사온 과일바구니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예, 멀쩡합니다. 내일부터 출근하고 싶습니다.”
하루의 의욕적인 말에 해수는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너 전치 3주야, 3주 꽉 채우고 나와.”
“…싫습니다. 병원 너무 심심합니다. 저 괜찮습니다.”
해수는 하루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계속 생각해두었던 말을 꺼내었다.
“하루야, 여기 말고 다른 데로 가라. 강력계는 너와 어울리지 않아. 그곳이 사실 더 일선일 거야. 그리고 요즘은 여경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너처럼 강한 여경을 필요로 하는 곳이 넘쳐.”
“음….”
하루는 지금 이 꼴을 하고 해수를 옆에서 지켜주려고 경찰이 되었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경찰 일을 하면서 그 단순한 이유 말고도 점차 경찰로써의 사명감도 새싹처럼 자라나고 있는 하루였기에, 해수의 말을 일부 수긍할 수 있었다.
그녀는 미세하게 고개를 숙였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때, 해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구세주 실장]
“예, 구실장님, 오랜만입니다.”
-지금 오랜만이고 자시고 안부인사 나눌 때가 아니에요! 이게 어떻게 된 건지, 갑자기 국세청에서 조사 나오고 난리 났어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구세주 실장은 해수와 상의 하에 투자회사를 차렸고, 지금은 직원이 열명이나 된 참이었다.
“갑자기요?”
-그러니까요! 요즘 분위기가 뭔가 좀 이상하다 싶더니, 특히 신사장님 자산 위주로 막 자꾸 뭐 캐내려고 해요!
“걸릴 거 없으니 괜찮지 않습니까?”
-아이고, 사람 일이 아무리 청렴하게 관리했어도 억지부리면 불법이라고 프레임 씌울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리고 잘 넘어가더라도 국세청 조사 받았던 회사다 소문 나면… 아, 아무튼 지금 상황 알려드리려고 연락 드렸어요. 일단 끊어요!
“…예.”
해수는 전화를 끊고 전화기를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이번 일도 대성과 연관이 있는 듯했다.
아군일 때는 그렇게 든든하더니,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아군이 적군으로 탈바꿈하니 그 누구보다 무섭게 변했다.
해수는 고개를 돌려 하루에게 물었다.
“안서은씨는 온 적 없어?”
“예, 무슨 일 있으십니까?”
해수는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고 하루 옆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하루는 유일하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다.
“안서은씨가….”
한참 해수의 설명을 듣던 하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합니다. 안서은님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나도 그렇게 믿고 싶은데….”
해수는 시계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튼 몸 잘 챙겨, 난 다시 돌아간다.”
“알겠습니다. 몸 조심하십시오. 연락 잘 받으십시오!”
“…어? 어, 그래.”
* * *
부르릉-
대성병원에서 대성E&M 건물까지는 30분이 넘지 않는다. 오토바이 시동을 켜고 막 액셀을 당기려는 순간, 문자가 울렸다.
문자에 떠 있는 이름을 보고 해수는 재빨리 휴대폰 잠금장치를 풀고 확인했다.
[안서은 이사: 해외출장 중입니다. 이곳 일이 바빠서 연락은 잘 못합니다. 양해 바랍니다.]
“흐음….”
안서은과 문자를 주고받은 적이 없기에 그녀의 스타일이 원래 이런지 알 수는 없다.
해수가 그녀의 문자를 보며 여러가지 생각에 잠겨있을 때, 휴대폰 화면에 새로운 알림이 떴다.
띠링-
깨톡 단체방 알림이다.
[턱짱장 구름: @신형사님 괜찮으십니까? 요즘 기사들 봤습니다. 나쁜 놈들이 많습니다. 다 무시하십시오.]
[턱짱간부쫑: 무시하십시오! 저희가 다 뽀개놓겠습니다!]
[턱짱간부읭: 형님 사랑합니다!]
해수는 그들의 소소하고 과격한 응원에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깨톡을 보냈다.
[신턱신: 주말에 봅시다.]
매주 주말 아침마다 철봉이 있는 놀이터에서 턱짱 동아리활동을 한다. 해수는 웬만하면 그곳에 참여하여 같이 턱걸이를 했다.
* * *
며칠 뒤, 강수대와 해수를 향한 여론은 좋지 않은 그대로 천천히 잦아들었고, 해수는 평범한 주말을 보내는 중이었다.
핸드폰 매장에서 하루의 깨진 휴대폰을 새로 사고, 오토바이에 타서 시동을 막 켰을 때였다.
“동네 사람들! 여기 도둑 있어요 도둑!!”
해수는 바로 헬멧을 벗고 외침이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키가 크고 모델같은 체형의 남자와 뚱뚱하고 팔에 문신이 있는 남자가 대치하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저 도둑, 저는 이 놋북 주인이…”
“아니 씨발 도둑이 지 도둑이라고 하는 거 봤어? 이거 안 놔?!”
문신남이 손을 번쩍 들어 모델남에게 휘두르려고 했다. 그때.
턱
그의 아기처럼 통통한 손목이 강철같은 근육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손에 붙잡혔다.
“뭐, 뭐야?”
해수는 문신남을 보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지나가는 경찰, 이거 휘두르면 님도 처벌이야. 내려놓고 얘기 자세히 들어봅시다.”
“경찰? 경찰이 무슨…!”
이렇게 조폭같아? 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문신남은 지금까지 봐왔던 어깨에 힘 좀 주는 형님들보다 훨씬 흉악스러운 형사의 등장에 절로 눈에 힘을 풀게 되었다.
“오우, 감솨합니다. 폴리스, 저 억울해요.”
모델남은 얼굴도 체형만큼이나 훈훈하고 말투는 느끼했다.
사건은 이러했다. 모델남이 카페에 있는데 옆자리 여성이 갑자기 노트북을 테이블에 그대로 놔두고 나간 것이다.
그래서 갖다주려고 그것을 챙겨서 다급히 나왔는데, 문신남이 그를 도둑놈이라며 잡은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노트북 여성은 잠시 식사를 하러 나가는 동안 노트북으로 자리를 맡아놓은 것이었다.
엄밀히 법적으로 따지면 모델남이 처벌받을 수 있지만, 노트북 주인 여성은 카페 내부 CCTV를 확인하고 모델남의 처벌을 원치 않아 헤프닝으로 지나갔다.
“오우, 폴리스, 정말 고마워요. 로이스 프리즌 브레이크 찍을 뻔 했어.”
로이스킴이라고 소개한 남성은 외국에서 오래 살다가 이번에 한국에 왔다고 한다.
해수는 이 순진한 남성에게 한국의 치안을 담담한 말투로 설명해주었다.
“한국은 치안과 국민의식이 매우 좋습니다. 휴대폰이나 지갑, 노트북 이런 걸 자리에 놔둬도 몇 시간 동안 가져가지 않습니다. 아마 거의 모든 곳에 CCTV와 블랙박스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로이스킴은 엄지를 추켜들었다.
“그렇군요. 대단해요! 멋진 친구는 이름이 뭔가요?”
“저는 신해….”
해수는 로이스킴과 함께 걷다가 멈칫했다. 여기 있던 오토바이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