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뒤틀린 순정
왕과장에게서 따로 만나자는 문자가 왔다. 하루는 바로 강수대에 내용을 알렸다.
“그거 개수작이다, 씹어.”
신해수도 오갱의 말에 동의했다.
“출근하면 얘기하자고 해.”
“네 알겠습니다.”
[왕변태 에게 답장: 싫어]
[왕변태: ···]
출근시간, 하루가 원룸 앞에서 기다리자 낯익은 봉고차가 다가왔다.
드르륵-
이번에는 문을 열기도 전에 저절로 열렸다. 안에는 왕과장이 있었다.
“어서 와, 미소씨. 오늘은 내가 데리러 왔지, 타요.”
하루는 그 안에 왕과장 말고도 깡식이가 있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가 올라탔다.
왕과장은 착잡한 눈을 하고 있다가 하루의 일상복을 보고는 다시 반짝였다.
얇은 하얀색 후드티에 검은 레깅스, 스니커즈를 신었는데 꼭 동네 여대생 느낌이었다.
“와··· 미소씨 이렇게 입은 거 보니까 또 다르네, 역시 팔색조···.”
“뭐.”
“엉? 아, 안 만나주길래 보러 왔지.”
-뭐야 이 새끼
-갑자기 유통놈이 붙어? 수상한디?
-따라붙겠습니다.
-어 그래, 그래라.
하루는 두 손을 교차시켜 엑스자를 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개수작 금지.”
“어? 아, 아하하··· 개수작 아니고··· 미소씨 도와주려고 하는 거야, 돈 많이 벌고 싶지 않아?”
그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하루는 천천히 손을 내리고 물었다.
“돈?”
“그래 돈, 이건 아무한테나 제안하는 거 아닌데, 미소씨니까 내가 알려주는 거야···.”
그때, 맞은편에 앉은 깡식이 긴 막대기를 꺼내며 말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러고는 그것으로 하루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치직
거의 몸에 닿을랑말랑 가깝게 하자 왕과장이 그를 밀었다.
“적당히 해라.”
하지만 왕과장은 이제 상관이 아니기에, 깡식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막대기를 치웠다.
“미안, 불쾌했지? 내가 제안하는 게 뭐냐면··· 여기서 짜잘짜잘하게 손님 한두명 잡는 것 말고, 판매처를 새로 구하는 일인데 우리가 알아서 다 하고 옆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거야.”
“가만히?”
“응,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얼굴이 훨씬 큰 설득력을 발휘하거든.”
“음···.”
하루는 그의 말에 수긍했다. 그런데 이쯤이면 시끌시끌해야 할 강수대 대원들의 무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직감적으로, 하루는 아까 깡식이 휘두른 전자막대기가 수신기를 먹통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카메라겸 위치추적기인 단추도 먹통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이들은 자신이 경찰이라는 것을 알고 납치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 말 그대로 총판 병풍 역할을 위한 걸까?
‘이들을 지금 제압하면··· 아무것도 건지지 못해.’
하루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루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깡식이 주머니에서 검은색 천을 꺼내었다.
“가는 길은 기밀입니다. 양해 바랍니다.”
그러고는 검은색 천을 하루의 얼굴에 씌우고, 두 손까지 케이블타이로 묶었다.
하루는 눈도 가려지고 손도 묶이는데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왕과장은 옆에 조신하게 앉아있는 하루를 보며 차팀장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바로 납치해서 기절시키면 되지, 굳이 그렇게?
-네··· 여경을 위장잠입시킨 만큼, 대응이 빠를 겁니다. 그들의 수사에 혼선을 줘야 합니다.
-그래, 아마 그 새끼들은 알고도 속을 수밖에 없을 거야. 그것들도 큰 건을 잡으려고 이런 가녀린 여경을 위장잠입까지 시킨 거니까, 쟤네는 물 수밖에 없어.
-예.
하루를 바라보는 왕과장의 눈빛은 매우 복잡미묘했다.
* * *
같은 시각, 강수대 이동식 본부.
-치직
“아!”
“뭐야?”
헤드셋을 끼고 있던 오갱이 확 인상을 찌푸렸다.
“느낌이 쎄한데? 모니터 확인해봐.”
오갱이 말하기도 전에 먼저 막내가 공유 화면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화면도 보이지 않습니다. GPS도 끊겼습니다.”
곽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전을 들었다.
“이 새끼들 눈치 깠네. 돌격아, 잘 따라붙어, 눈치 깠다. 함정이야.”
-예, 지원 오면 바로 덮치지 말고 조용히 따라붙게 해주십시오.
“어, 어? 왜?”
-저들이 하루가 경찰이라는 걸 알았다면 이렇게 납치하는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이 사실일 지도 모릅니다. 일단 따라가서 상황을 지켜보죠, 이대로 중간에 덮치면 하루의 위장잠입은 수포로 돌아가는 거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만··· 하순경이 너무 위험하지 않아?”
-괜찮을 겁니다.
“어··· 그래.”
해수의 대답에 팀장은 무전을 내리고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이거, 왜 이렇게 침착해? 내 마누라가 저리 되면 나 눈 돌아갔을 거 같은데.”
“침착한 척 하는 거겠지, 형님 마누라 얘기할 시간에 지원 요청해, 막내야!”
“네!”
막내는 바로 앞쪽으로 넘어가서 운전대를 잡고 시동을 켰다.
그 사이 오갱은 무전을 들어 주파수를 돌렸다.
“여기 강하나, 관제센터 집중지원 바랍니다.”
* * *
부아아앙-
해수는 미간을 좁히며 액셀을 당겼다.
아직 하루를 태운 봉고차가 보이지 않아 초조한 마음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언제나 걱정이 되는 건 매한가지다.
* * *
‘왼쪽, 기찻소리, 터널 두 번, 서쪽···.’
하루는 아예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하며 가는 방향을 외웠다.
그러다 문득 본부를 나설 때가 떠올랐다. 해수가 하루에게 손수 신발을 신겨주었었다.
-여기, 이 밑창 에어가 있는 부분에 조건발동 GPS기가 있어, 깔창 아래에는 들키거나 감지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에어 부분을 째고 넣었다. 네 몸무게로는 걸을 때 안 눌릴 테니까 발동시켜야 할 때는 조금 더 쎄게 눌러.
깡식이가 전자기기를 먹통으로 만들 때, 저 철로 된 막대기가 신발 가까이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러면 신발 밑창에 설치된 GPS기기는 아직 살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이상행동을 하면 의심할 수 있으니, 하루는 도착해서 차에서 내릴 때 GPS를 작동시키기로 결심했다.
* * *
-아씨 이 새끼들 제대로 작정했어, 똑같은 차가 두 대야, 지금 관제센터에서 차량 번호로 추적하기는 무리고 두 대 다 일단 보고 있대, 실시간 보고 받는 중이다.
‘젠장.’
그들이 맨 처음 가는 방향에서 틀었을지, 그대로 쭉 갔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놓쳤을 수도 있다.
해수는 갓길로 오토바이를 대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들이 어디로 하루를 데려갔을지 추측해보았다.
‘인신매매라면··· 밀항, 경찰인 걸 알았다면··· 그래도 밀항인가, 아니야, 장소가 특정돼, 머리를 쓰는 놈들이라면···.’
훨씬 범위가 넓어진다. 아니, 특정할 수 없다. 하루가 직접 위기에서 벗어나 연락을 취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을 순 없다.
그때.
띡 띠딕-
해수의 귓가로 이질감이 느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개인휴대폰에 등록된 하루의 밑창에 달아놓은 GPS 기기 알림이다.
해수는 바로 휴대폰을 꺼내어 확인했다.
“위치 떴습니다.”
-어디!
“경기도 용성입니다. 위치 주소 보냈습니다. 바뀌면 다시 무전하겠습니다.”
-이런 씨, 용성? 알았다!!
해수도 바로 방향을 확 틀며 액셀을 당겼다.
* * *
드르륵
“내리세요.”
도착했는데도, 하루의 머리에 씌운 검은 천은 벗겨주지 않았다.
왕과장으로 추측되는 자가 조심스럽게 손목을 잡고 하루를 에스코트했다.
퀴퀴한 냄새, 어두운 공간, 소리는 울리고, 바람은 불지 않는다. 커다란 실내, 창고같은 곳이다.
왕과장의 이끌림에 의해 의자에 앉혀지고, 곧 기분나쁜 진한 향수 냄새가 가까워졌다.
스윽
검은 천이 걷히고,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수백 평은 될 법한 공장, 지금도 운영 중인지 기계 소리가 시끄럽다.
한쪽에는 5톤 화물 트럭 네 대가 세워져 있고, 조직원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최소 서른 명은 넘어보였다.
삼삼오오 모여서 식사를 하거나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하루 앞에는 하얀 바탕에 검은 줄이 그어진 스트라이프 정장을 입은 중년인이 서 있었다.
그는 하루를 3초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들어올렸다.
“이런 얼굴이 경찰이라니, 죽이네.”
모두 알고 있던 것이다. 속으로 흠칫했지만 하루의 눈동자, 눈썹, 어느 것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경찰?”
중년인, 차팀장은 하루의 반응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잠입을 자주 하나? 제법이야. 그런데 연기같은거 할 필요 없어, 우린 찔러보는 게 아니라 이미 다 알고 있거든. 강진경찰서 강수대 대원 하루 순경님.”
하루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자, 인정으로 받아들인 차팀장이 하루의 머리에 손을 얹히고 빙글빙글 돌면서 말을 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너같이 예쁘장한 동료가 사라졌으니까 경찰들이 난리가 났겠지, 눈에 불을 켜고 찾을 거야. 아마 여기도 금방 찾아올 수 있어. 그런데···.”
그는 하루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몸을 숙여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의 짙은 향기에 하루는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때 되면 넌 저 푸른 바다에 둥둥 떠다니고 있을 거야.”
누가 듣더라도 소름 끼치는 말이지만, 하루의 눈은 건조하기 그지 없었다.
그 반응에 차팀장은 재미없다는 듯이 일어나 휙 돌아섰다.
“애가 반응이 없네, 반응이. 데려가.”
“예, 팀장님.”
차팀장의 말에 깡식이 그녀를 끌고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화물 트럭으로 데리고 갔다.
트럭 짐칸 문 양쪽에 덩치 큰 사내 둘이 서 있다. 그 중 한 명이 짐칸 문의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어주었다.
화악-
그러자 풍겨오는 지독한 악취, 오물냄새다. 안에는 거의 헐벗고 있는 젊은 여자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절반은 눈이 풀린 채 침을 질질 흘리고 있고, 절반은 그나마 허리를 벽에 기대고 있는데 눈빛에는 절망이 가득하다.
하루는 그녀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주변 잡음이 점점 먹먹해지더니 아예 사라진다. 손발이 굳어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주 아주 깊은 곳, 끝없는 어둠 저편에 꼭꼭 숨겨두고 없는 것처럼 살았는데, 불과 몇 년 전에 짐승처럼 살아오던 자신의 모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들어가.”
깡식이 그녀의 등을 밀자, 그제야 무겁게 한 발을 내딛는다.
뚝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눈에서 차가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녀는 트럭에 가까워질수록, 아니, 트럭 안에 있는 그녀들과 가까워질수록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헉, 허억!”
“뭐야, 왜 이래?”
하루가 트럭 짐칸 문을 붙잡고 허리를 숙인 채 숨을 헐떡이자,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차팀장이 손뼉을 치며 다가왔다.
“그래, 그거야. 이제야 좀 보기 좋아졌네, 강한 척 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어. 저기 들어가면 다 개돼지가 되는 거야.”
“빨리 들어가!”
깡식이 하루를 거칠게 밀쳤다. 그때, 보다못한 왕과장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미소, 미소씨!! 내가 구해줄게!”
저 병신은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하루는 멍한 눈으로 왕과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왕과장이 자신에게 빠질만 한 행동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지금 상황에서 목숨을 내던질 만큼 빠져있었다.
사실, 이미 버려질 목숨이라는 걸 아는 왕과장은 희박한 목숨보다는 사랑을 택했을 뿐이다.
그가 하루와 깡식이 있는 트럭으로 덤벼들었다. 그러나 금세 트럭을 지키던 사내 두 명에게 막혔다.
하지만 판매 실적만으로 과장이 된 게 아닌 만큼 왕과장은 한 명을 몸통박치기로 밀치고, 다른 한 명의 팔을 잡아 뒤돌며 업어쳤다.
퉁 쿠궁!
“미소씨!!”
방해꾼을 없앤 사랑꾼은 가쁜 숨을 헐떡이는 하루만을 보며 달려왔고.
푹-!
그 모습을 같잖게 보던 깡식은 품에서 회칼을 꺼내어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커,커헉!”
“하, 이 미친 새끼가 진짜··· 마지막까지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왕과장에게 당한 사내 둘이 금세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그의 양 팔을 붙잡았다.
깡식은 왕과장의 옆구리에 박힌 칼을 뽑고, 차팀장을 보며 허락을 구했다.
차팀장은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난 듯이 이곳을 보고 있는 조직원들을 한 번 둘러보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 본보기를 보여줘서 기강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그때.
저벅 저벅 저벅
하루가 비틀비틀 걸어와 왕과장과 깡식 사이로 들어왔다.
깡식은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헛웃음을 흘렸다.
“허, 뭐야, 그새 정이라도 들었어? 니년도 죽여줄까?”
깡식이 칼을 들어 하루에게 겨누었다. 그러자 하루가 오히려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와 피 묻은 칼 끝에 자신의 목을 대었다.
“뭐, 뭐야 이 미친년이 죽으려고 환장-”
이런 특상품은 얼굴이 생명이고 가격이다. 깡식이 기겁하며 뒷걸음치는 순간.
타닥-
하루가 묶인 손을 들어 그의 칼날 위에 내리쳤다. 가느다란 손목 사이 케이블타이가 마술처럼 잘려나가고, 하루는 자유로워진 손으로 머리에 꽂았던 비녀를 뽑았다.
사라락-
머리가 풀리며 긴 머리칼이 흐트러진다. 왕과장은 옆구리에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그 모습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푹- 푹
하루가 비녀를 깡식의 경동맥에 정확히 꽂고, 그 뒤에 왕과장을 잡고 있는 사내 둘의 목젖에 구멍을 만들었다.
투둑 툭- 치이이익-
세 명이 거의 동시에 쓰러지며 피분수를 내뿜는 것은 불과 5초도 지나지 않았다.
그 뒤로 뇌정지가 온 사람들의 적막.
차팀장은 멍하니 있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저 년 죽여!!”
주변에 흩어져 있던 사내 서른 명이, 각자 흉기를 들고 하루에게 덤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