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내성훈련
신해수가 막내를 따라서 일어나며 팀장에게 말했다.
“박지원 신원에 등록된 주소는 본가 같습니다. 아마 부모님이 거기 있을 텐데, 가봐야겠지요?”
“당연히 가봐야지, 오갱아 뭐하냐! 차키 들어!”
“오케이 갑시다!”
꽉 막혀있던 수사가 갑자기 술술 풀리자 본부 내에 활력과 긴장감이 묘하게 섞였다.
해수는 막내와 함께, 그때 알아보았던 박지원의 집으로 향하면서 하루에게 전화를 걸었다.
-띠리리 띠리리
“음….”
씻고 있는지 받지 않는다. 마침 그 장소에 도착하여 해수는 하루에게 문자를 남겨두고 차에서 내렸다.
딩동 딩동
“계십니까?”
쿵쿵 쿵쿵
“박지원씨.”
몇 번을 두드리자 안에서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누구세요. 겨,경찰 부를 거에요.
젊은 여성의 목소리다. 문에 달린 작은 구멍으로 해수와 막내를 보고는 겁에 질린 것이다.
그때 들었던 박지원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해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굴릴 때, 막내가 경찰 공무원증을 들어 구멍에 보여주었다.
“경찰입니다. 근처 강진서 강수대에서 나왔습니다.”
-겨,경찰이요?
치익 찰칵 스으으-
그제야 문을 열어준다. 쇠로 된 문고리는 걸어놓고, 얼굴만 빼꼼 보였다. 박지원은 아니다.
“박지원씨 어디 계시죠?”
“박…지원이요? 그게 누구예요?”
그녀가 되묻자 해수가 뒤돌아서 막내를 보며 의문을 표했다.
“여기 맞습니다. 303호, 정확합니다.”
확신에 찬 막내의 말에 해수가 다시 돌아서서 여자를 보았다.
“혹시 여기 이사 오셨습니까?”
“아…뇨, 제가 1년 전부터 여기 살았는데….”
“음….”
해수는 휴대폰을 여자에게 내밀어 박지원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박지원씨, 모르십니까?”
“네? 네… 모,모르겠는데….”
그녀는 고개를 젓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진을 다시 보았다.
“어?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이 사람이 누군데요?”
해수는 그녀의 집 문에 달린 도어락을 보았다.
경계심이 강한 그녀가 얼굴을 기억할 정도로 자주 보았다는 것은 주변을 맴돌며 지켜보았다는 것이고, 박지원이 이 집에 들어가는 걸 막내가 확인했다고 하니 비밀번호를 누르는 것을 지켜보고 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때 형사들에게 미행당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따돌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가 접착제 살인범일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저요? 아,아름이요.”
“네, 아름씨, 잘 들으십시오. 이 사람은 살인 용의자고, 아름씨의 집에 침입한 적이 있습니다.”
“…에? 사,살인이요?”
범인이 코앞까지 왔던 상황이다. 시민의 불안감이 증폭되더라도 현재 상황을 명확히 알리고 대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비밀번호 바꾸시고, 막내야, 차에서 스마트 워치 하나만.”
“넵 선배님!”
“저희가 신변보호로 이 워치를 드릴 테니까, 무슨 일 있으시면 흔드시고요. 집 주변으로 순찰 강화시키겠습니다. 불안하시면 친구 집이나 본가 댁에 가 계시는 것도 좋습니다. 거처가 바뀌면 저희도 순찰을 바꿔야 하니 말씀 주시고요.”
“에, 어, 아… 그,그러니까 살인범이 내 집에 들어왔었다고…요?”
“네.”
여성의 얼굴에 당황, 공포, 부정,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그녀가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막내가 스마트워치를 가져왔다.
“이거 꼭 차고 다니십시오. 지금 용의자를 추적 중이니까 잡히면 바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네….”
“문단속 잘하시고요. 그리고… 이미 이 장소가 저희에게 노출돼서 용의자도 아름씨를 타깃으로 잡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해수는 그곳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무전을 들었다.
“박지원 없습니다. 전에 확인했던 장소는 다른 여자 집이었습니다. 비밀번호까지 알고 있었던 걸로 봐선, 아마 범행 타깃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미친… 신변 보호 걸게, 주소 보내.
“예, 워치는 건넸습니다. 박지원 위치 나왔습니까?”
-어 근데 외딴곳이야, 일단 가는 길이니까 우리가 거기도 가볼게.
“예, 저는 이 근처 cctv부터 따겠습니다.”
-오케이, 무슨 일 있으면 무전 하고.
해수는 무전을 끊고 막내와 cctv를 수거하며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찝찝하다.
‘지금처럼 용의자로 지목될 확률이 큰데 왜 일부러 접근해서 자신을 노출했을까? 본명 정보까지 주면서… 과시욕? 경찰 능욕을 위해?’
하지만 해수는 고개를 털어 잡생각을 떨쳐냈다.
어찌 됐건 증거는 불충분하지만, 정황상 그가 유력한 용의자임은 분명하다. 지금은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옳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때, 개인전화가 울렸다.
“어, 말해.”
-신형님! 이 사람 추적하다 보니까 이상한 거 발견했습니다! 문자로 보냈어요.
“잠깐만.”
해수는 걸음을 멈추고 정영수가 보낸 사진을 확인했다.
어떤 사이트에서 강수대 형사를 상대로 범죄를 모의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타깃은 하루였다.
“막내야, 시동 걸어.”
“아 옙!”
“영수야 하루 번호 알지. 위치 따고, 이동 중이면….”
-실시간으로 보내겠습니다!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영수가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해수는 바로 전화를 끊고 차에 올라탔다.
“먼저 리드 빌딩으로, 빨리.”
* * *
리드 빌딩 방향으로 가는 버스 안.
툭-
하루가 고개를 꾸벅꾸벅 떨구다가 결국 앞자리에 이마를 박았다. 그런데도 깨지도 않고 그 상태 그대로 있었다.
박지원은 그 모습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하루의 두 팔뚝을 붙잡고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많이 마셨어요.”
한숨과 함께 내뱉어진 혼잣말.
꽤 큰 목소리에 모여들었던 시선이 흩어졌다.
지원은 바로 정차 버튼을 누르고, 하루를 업고 내렸다.
“보기보다 무거우시네.”
그는 낑낑대면서 길을 건너서 택시를 잡았다.
“양지 모텔로 가주세요.”
“네~ 색시가 아주 떡이 됐네, 떡이.”
정신을 못 차리고 흐느적거리는 하루를 보는 택시기사의 눈빛이 음흉하다. 지원의 눈에서 순간 살기가 일었다.
“아저씨, 제 여자친구를 그렇게 쳐다보면 화나지요.”
“…엉? 아아 미안합니다. 너무 예뻐서.”
“네, 액셀이나 밟으세요.”
박지원은 내비게이션 옆에 붙어있는 택시기사의 가족사진을 유심히 보다가 슬쩍 휴대폰으로 찍었다. 그리고 택시에서 내려서 택시 번호판까지 찍고, 하루를 업고 모텔로 들어갔다.
툭-
“후우, 후, 후우.”
지원은 하루를 침대에 눕혀놓고 흥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아 맞아, 일단 인증샷부터.”
그는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쓰고 하루 옆에서 브이를 하면서 셀카를 찍어서 다크웹 사이트에 올렸다.
[나는 한다면 한다. 강수대 여형사 천국행 중-작성자: 제임스본드]
-이래도 내가 망상증이냐? [사진]
┗프렌치키갈: ㅅㅍ 미친ㅋㅋㅋㅋ
┗니마누라내꺼: 하악하악졸라이뻐 멈춰 내가 살게 내가먼저
┗니돈내돈: 그냥 존나 나가요걸 하나 불러서 잘 때 찍은거면서 강수대 여형사 ㅇㅈㄹㅋㅋㅋㅋㅋ
┗니마누라내꺼: 아닌디? 맞는거같음 강수대 유일한 여형사, 영상 나온거랑 얼굴 거의 일치함
┗니돈내돈: 눈감고 있는데 그게 보임? 그리고 영상도 죄다 얼굴 제대로 안 나왔잖아
┗니마누라내꺼: 비슷하다고, 비슷한사람을 얘가 찾아왔겠냐?
┗프렌치키갈: 개쩐다 빨리 처리하고 후기 사진 올려라, 아님 영상이나.
┗제임스본드(작성자): 오키 기둘
┗니마누라내꺼: 아시팔천국보내지 말라고 존나 아깝게진짜
┗제임스본드(작성자): 닥쳐좀
박지원은 실시간으로 댓글이 달리는 그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고 흐뭇해하며 가방에서 준비물들을 꺼내었다.
“자… 이 예쁜 눈부터 먼저….”
그가 강력접착제의 뚜껑을 따서 하루의 눈가로 가져갈 때였다. 그녀의 눈이 번뜩 뜨였다.
그러나 박지원은 당황하지 않았다.
“아, 일찍 일어났네? 가만히 있어요. 금방 끝나요.”
하루는 박지원이 수면제를 이용해서 성폭행하는 단순 성범죄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옷도 벗기지 않고 강력접착제를 꺼내는 것을 보고는 그가 수사중인 사건의 범인임을 깨달았다.
박지원이 한 손으로 하루의 이마를 잡고, 다시 접착제를 눈에 뿌리려고 했다.
타닥-
하루는 그의 손을 밀치고 접착제를 든 손을 쳐냈다. 접착제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저 멀리 날아갔다.
하루가 수면제를 과다복용한 사람 치고 몸놀림이 정상인과 다를 바가 없자, 지원이 뒤로 물러나며 살짝 경계했다.
“뭐야, 왜 이렇게 멀쩡하지? 꼴에 형사라 이건가?”
하루는 건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검지로 그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칼.”
버스 안에서 그녀를 부축하느라 밀착하면서 어깨가 닿았을 때, 안주머니에 칼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던 하루였다.
“하, 하하, 그래요. 사후 접착 마무리는 별로 싫어하는데… 어쩔 수 없네.”
슥
그가 품에서 칼을 꺼내자, 하루도 침대 옆에 서랍장 위에 놓여있는 나무젓가락을 집어 두 개를 떼고 반으로 부러트렸다.
툭 우직-
그러고는 한 손에는 부러진 나무젓가락 세 개를, 한 손에는 한 개를 쥐었다.
“아… 그걸로 칼에 맞서려고? 무시도 정도가 있지, 날 너무 무시하네. 나름 칼 좀 써봤는데!”
얼굴을 찌푸린 그가 소리치며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하루는 제자리에서 상체만 살짝 뒤로 물리며, 나무젓가락 하나를 마주 휘둘렀다.
콱-
“악!”
나무젓가락이 칼을 든 지원의 손목에 정확하게 박혔다. 때문에 칼은 하루에게 닿지 못하고 그대로 멈추어 섰다.
지원이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하루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나는, 칼 든 상대가 더 좋습니다.”
그 치명적인 미소를 마주하자 지원은 등골에 소름이 쫘르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타닥- 휙
하루가 나무젓가락이 박힌 그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정강이를 발로 찼다. 그는 반 바퀴 휙 돌며 바닥에 무력하게 엎어졌다.
우드득-
“아아악!!”
하루는 그의 손가락을 부러트려 칼을 놓치게 하고.
푹!
“끄윽!”
반대편 손바닥에 나무젓가락을 하나 박고.
콰곽!!
“끄으아아악!!! 아파 아파아!!!”
남은 두 젓가락을 그의 양쪽 눈에 가차 없이 찔러넣었다.
하루는 그의 몸 위로 올라가 두 무릎으로 두 팔을 짓누르고, 체중으로 가슴을 압박하며 한쪽 팔로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조용히 하세요. 시끄러우면 이거 하나 빼서 경동맥에 찔러줄 겁니다.”
“으,으흐으….”
지원은 두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신음이 새어나가지 않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나 입을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으면 입에서도 피가 새어나왔다.
하루는 만족하며 그 자세 그대로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강수대에 전화를 걸었다.
“하루입니다. 여기 양지모텔 402호…”
콰광쾅!!
그때, 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멧돼지처럼 큰 덩치의 사내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한 사람이 하루에게 다급히 달려와 두 어깨를 움켜쥐었다.
“하루! 괜찮아?!”
하루는 전화를 끊고 그를 바라보며 미세하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 * *
대성병원, 1인실.
박지원의 부상이 심각하여 병실에서 취조가 이루어졌다.
그의 왼쪽 눈은 실명이고, 오른쪽 눈 역시 실명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물론 수술같은 것은 당연히 진행하지 않았다.
아쉽지만, 그가 접착제를 꺼내어 하루에게 뿌리려던 것만으로는 이전 살인사건과 동일범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죄를 씌운다면야 살인미수 및 성폭행 미수로 살인죄에 준하는 형을 받게 할 수는 있지만, 이전 사건이 깔끔하게 끝낼 수는 없다.그의 자백이나 명확한 증거가 필요하다.
그래서 곽팀장과 오갱이 병실에 들어가 박지원을 취조하는 동안, 해수와 하루는 병실 복도 벤치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었다.
“…버스에서 피로회복제를 건넬 때부터 의심했다고? 그런데 그건 왜 마셨어, 아니, 마시고 어떻게 멀쩡했지?”
하루는 해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허공을 몇 초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20종의 수면제와 42종의 독에 내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말하는 하루의 눈빛이 공허하다. 해수는 그녀의 분위기를 보고 어떻게 내성이 생겼는지 바로 예상할 수 있었다.
해수가 침묵하고 있자, 오히려 하루가 먼저 더 자세히 알려주었다.
“한 달에 반 알씩 추가했습니다. 열 알이 되었을 때, 300일간 먹었습니다.”
“…그게 사람이 할 짓…인가.”
“모진 훈련도 잘 겪었지만, 수면제 및 독 훈련 때 낙오되는 동기가 많았습니다.”
낙오는 죽음을 의미한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씁쓸한 과거.
하지만 하루는 그 절망적인 시절을 외면하고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의지하는 누군가에게 힘들었다고 내뱉고 싶었다.
머뭇거리던 그녀는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독은 그때만 힘들었는데, 수면제는 훈련이 끝난 후에도 잠을 이루지 못해서 지옥 같았습니다.”
“…지금은?”
해수의 물음에 하루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손으로 그것을 닦아내고 해수와 눈을 마주하고 입술을 열었다.
“좋습니다. 해수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불면증이 사라졌습니다.”
해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드르륵-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오갱이 소리쳤다.
“젠장, 저 새끼가 잡아놓은 사람 한 명이 있대! 연락도 안 되고 사흘째 출근도 안 했다는 거 보니까 진짜 같다. 빨리 찾아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