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역고소
30분 전.
안지성 경위는 시보순경과 함께 순찰을 돌고 있었다.
“꺄악!”
“이 시발, 딱 대, 제대로 대라고!”
“흐으, 아파요.”
그때, 백사장에 젊은 남녀가 모여있는데, 그들 중에 굵은 금목걸이를 한 남자가 여자의 배를 주먹으로 때리고 있었다.
여자는 울먹이면서도 다시 자세를 잡고 배를 내주었다. 비키니를 입고 있어서 배가 새빨간 것이 그대로 보였다.
안 경위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그곳으로 달려갔다.
“거기! 뭐하는 겁니까?! 멈춰요!”
경찰들이 달려왔지만 남자는 힐끗 보았을 뿐 무시하고 다시 주먹으로 여자의 배를 때릴 준비를 했다.
“뭐야 시팔, 자 간다…!”
주먹을 다시 지르기 직전, 안 경위가 달려들어 남자를 밀쳤다.
남자는 꽤 근육질이지만 안 경위에게 밀려 모래바닥에 넘어졌다.
“아? 아! 아 이 씨발 뭐지?”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경찰 앞에서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다니요?”
남자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가 갑자기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여자에게 물었다.
“야, 딸기야, 내가 너 때렸냐?”
“응? 아니, 오빠랑 나랑 장난 친 건데? 아저씨 왜 그래요?”
“…뭐요?”
딸기라 불린 여자는 안색을 싹 바꾸더니 남자에게 가서 팔짱을 끼었다.
달라진 태도에 안 경위가 당황을 금치 못하자, 남자가 냉소를 흘리며 돌연 여자의 팔을 쳐냈다.
“아!”
“어머?”
“아, 아 씨발, 아, 아까 넘어질 때 팔 부러진 것 같은데.”
“뭐? 오빠, 오빠 괜찮아요?!”
“경찰이 사람 팬다 시팔! 경찰이 사람 패!!”
안 경위는 억울했지만 주변에 cctv도 없고, 여자가 이렇게 나오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경찰생활 수십 년 해오면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피해자가 저렇게 나오면 자신이 매우 불리하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시보순경은 남자와 안경위를 번갈아 보며 눈치를 보다가 무전기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안 경위는 그를 향해 작게 고개를 젓고는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하고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남자는 일어나 안 경위에게 다가가 다른 손으로 뺨을 툭툭 건드리며 이죽거렸다.
“아이 이 경찰 할배, 참 웃기네. 사람 죽여놓고 죄송하다고 하면 끝이야? 내가 얼마나 귀한 몸인지 모르지? 할배 몸값은 내 발가락에 낀 때만큼도 안 돼.”
안 경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진상 중에 진상. 그는 이 새파랗게 젊은 놈들한테 잘못 걸렸음을 깨달았다.
남자는 다시 뒤로 물러나 친구들 사이에 거만하게 앉으며 턱짓했다.
“하지만, 사회지도층의 너그러운 이해심으로 기회를 다시 줄게, 사과 한 번 제대로 해봐. 내 마음에 안 들면 합의같은 건 없다. 난 돈이 썩어나는 사람이라 사실 그딴 거 필요 없거든, 알았지? 해봐.”
그의 태도에 시보순경이 결국 욱하여 나섰다.
“아니,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때, 안 경위가 그를 손으로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놈을 보아하니 조금만 수틀려도 흙탕물을 뒤집어씌울 인간이다. 소같은 마누라와 토끼같은 자식을 생각해야했다.
“나서지 마, 소에는 좀 늦는다고 하고….”
안 경위는 착잡한 표정으로 다시금 자세를 잡고 남자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잘 안 들린다. 더 크게!!”
“자,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아 이 할배가 진짜! 경찰이 되어가지고 그따위로 목소리가 모기 같으면 시민들이 안심하겠어?!”
남자가 윽박지르며 모래를 경찰관의 얼굴에 강하게 뿌렸다.
척-
그때, 신해수와 하루가 그 광경을 보게 되었다. 하루가 참지 못하고 앞으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 해수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하루는 반사적으로 해수의 손가락을 잡아 꺾으며 잡힌 손의 손목을 비틀어 빼내었다가 멈칫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것이,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해수의 손가락을 꺾은 것에 놀란 것이다.
해수는 얼얼한 손을 털며 말없이 자신이 앞으로 나섰다.
경찰 생활을 오래 한 중년 경위가 양아치들 앞에서 저런 행동을 하고 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하루가 끼어들면 기름을 끼얹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수 있다.
스윽
“선배님, 무슨 일이십니까?”
근무복을 입고 있어도 가려지지 않는 해수의 피지컬에 남녀가 절로 시선이 돌아갔다.
“어, 경찰이 또 왔네?”
금목걸이 남자는 해수를 지나쳐 그 뒤에 하루를 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오 뭐야, 야 딸기야, 저 경찰이 너보다 이쁜 것 같다?”
남자의 말에 딸기가 하루를 힐끔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래, 다 뜯어 고쳤구만.”
“넌 여기도 뜯어 고쳤잖아.”
“아이잉… 오빠!”
안 경위는 해수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별 일 아닙니다… 제가 실수를 해서….”
그때, 남자가 일어나 끼어들었다.
“할배, 후배들 왔으니까 이쯤에서 그만 하자, 아, 그리고 내가 마음같아서는 봐주고 싶은데. 그래도 선량한 시민한테 경찰이 폭력을 행사한 걸 그냥 넘어가기 좀 그렇잖아? 변호사 통해서 고소장 갈 거야, 이만 가봐.”
“죄송합니다. 제발, 한 번만… 선처를…!”
안 경위가 절망스런 표정으로 남자의 팔을 잡자, 그가 날카롭게 뿌리치며 노려보았다.
“꺼지라니까? 꺼지면 다시 생각해볼게.”
“예, 부탁합니다….”
남자의 살벌한 눈빛에 결국 안 경위는 시보순경과 함께 돌아섰다.
힘없이 어깨 축 쳐져서 돌아가는 중년 경찰의 뒷모습을 보며 하루가 이를 갈았다.
“오늘 밤은 저 금목걸이의 목을 접수해야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경찰복은 벗고 아무도 모르게 처리하겠습니다.”
해수는 꼬옥 쥔 하루의 주먹을 손으로 가리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가만히 있어, 가끔 이렇게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기는 법이야, 우리가 일을 키우지는 말자.”
“후,후우….”
하루는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시선을 바다 쪽으로 돌리며 심호흡을 했다.
* * *
며칠 뒤, 안지성 경위 앞으로 고소장이 접수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안 경위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안경위의 파트너이자 시보순경은 그것을 확인하고는 분통을 터트렸다.
“그 미친놈 진짜! 그렇게까지 하고…!”
“그 미친놈이 일성그룹 오너집안이라니, 무려 일성전자 사장의 아들 배인성….”
“이름 봐라, 인성이 인성이… 어휴.”
파출소장도 인상을 쓰며 한숨을 팍팍 내쉴 뿐,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넘어가거나 합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렇게 돈도 넘치고 개차반인 권력집안의 자제는 자신의 우월함을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이나 검찰을 짓누르는 것으로 확인하곤 하니.
흔한 일이었고, 그래서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려 경찰들은 무던히 애를 써야했다.
“정공법밖에 없지, 안녕 형님, 나랑 같이 병원 가서 빕시다. 지도 사람인데 어쩔 거야.”
“하… 그래요. 그래야겠지요. 그런데, 저 혼자 가겠습니다. 그 치욕 소장님한테 나눠줄 생각 없어요. 제 잘못인데.”
“아닙니다. 같이 가야 효과가 더 좋을 거에요. 그런 놈들은 그래요. 무릎이야 백 번이고 더 꿇을 수 있어.”
소장과 안 경위는 과일바구니를 사들고 배인성이 입원한 일성병원으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면회를 거부하세요.”
“아….”
그러나 그를 만나볼 수 없었다.
다음날, 그 다음날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전화는 당연히 받지 않았다.
꼼짝없이 직무해제될 상황이다.
해수는 안 경위를 안쓰럽게 여겨 출근 전인 주간에 하루와 함께 일성병원을 찾아갔다.
“그러니까 제가, 해수님이 간호사들의 관심을 끄는 사이에 VIP실에 몰래 들어가서 만나보면 되는 겁니…읍!”
해수는 그녀의 입술을 검지로 막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 작전 시작.”
“작전 시작.”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둘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해수는 화장실에 가서 미리 챙겨온 소주로 가글을 하고, 미리 챙겨둔 문신 팔토시를 양쪽 팔에 끼웠다.
그러고는 바로 입원실 중앙 카운터에 앉아있는 간호사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미 해수의 눈은 반쯤 풀려있었기에 그를 발견한 간호사는 겁에 질려 몸을 뒤로 물렸다.
쿵.
“채연아, 채연이니?”
“네,네?”
“아니네, 채연이, 채연이 어디 있는 지 알아요? 나 채연이 남자친군데, 아니, 전 남자친군데….”
“채,채연 선생님 어,없어요.”
“없어요? 왜 없어, 딱 한 번만 만나게 해줘요. 내가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딸꾹.”
너무 난리를 치면 경비들이 금세 올라오고 일이 커진다. 해수는 적당한 선을 지키며 간호사들이 딴 곳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연기했다.
“은미샘… 얼른, 얼른 채연 샘한테 연락해봐요.”
“네? 아, 네,네.”
‘…채연이라는 사람이 정말 있어?’
근무자 목록에서 이름을 대충 쓱 훑어보고 그 중에 없는 여자 이름을 부른 것인데, 하필 다른 과에 있는 듯했다.
흔한 이름을 택한 것이 문제다. 진짜가 올라오면 난감해진다. 특이한 성, 특이한 성으로…!
“채연샘… 여기 샘 전 남자친구라는 사람이 왔는데….”
한 간호사가 통화를 하자, 해수가 얼굴을 가져다대며 소리쳤다.
“채연아! 명채연! 보고 싶다! 얼른 일루와!”
“어맛! 지,진정하세요. 진정, 명채연쌤, 들었지? 얼른 좀 와서 데리고 가요.”
‘정답이야? 명씨였어?’
해수가 속으로 당황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올라왔고, 명채연이라는 이름표를 단 간호사가 등장했다.
해수는 고개를 홱 돌리며 얼굴을 가렸다.
“명채연쌤… 이 사람 좀….”
“아, 네, 그….”
그때, VIP실에서 하루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해수의 눈앞에 명채연이라는 간호사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피부가 인상적이다.
“저기, 누…구?”
“읍,읍, 우웁!”
“꺄읏!”
“헛, 어,얼른 비닐통부! 비닐!”
해수는 난리를 치는 간호사들을 뒤로 하고,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고 배를 꿀렁꿀렁거리며 비상계단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특별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병원 밖에서 만난 해수와 하루.
“뭐 좀 건졌어?”
“없습니다.”
“역시….”
“이름표만 그 사람이고, 전혀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얼굴과 이름을 알아왔습니다.”
“아마 상관없는 사람일거야, 일성병원 이거… 의사도 병원도 환자도 대놓고 짜고 치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식 수사가 아니면 의사 만나기도 힘들고, 설득이나 협박도 못해, 안 경위님부터 만나봐야지.”
* * *
보성 광장 파출소.
출근을 하자 어제보다 훨씬 야윈 얼굴의 안지성 경위와 마주했다.
해수는 그를 휴게실로 데리고 와서 상황을 전달했다.
“…팔은 멀쩡했습니다. 고소장에는 오른팔 골절이라고 나와있는데, 오른팔로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해수는 자신의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배인성이 두 손으로 야구 배트를 열심히 휘두르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찍혀 있다.
“역고소만 하시면, 저희가 사건을 맡고 제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안경위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저 포기하고 있었는데, 감사합니다.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진행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 * *
며칠 후, 역고소를 당한 배인성이 변호사와 비서를 줄줄 이끌고 파출소에 나타났다.
파출소 접견실에서 소장과 안경위, 해수, 그리고 배인성과 그 무리가 마주 앉았다.
“하, 미쳤네 이것들이, 내가 누군 줄 알고… 역고소? 무고죄?”
소장은 그 특유의 부리부리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죄를 뒤집어씌우고 현직 경찰을 모욕한 행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안 넘어가면 어쩔 건데? 고작 경찰 따위가 뭘 할 수 있다고? 어디 한 번 마음대로 날뛰어 봐! 내 털끝하나 건드릴 수 있나, 니네 사람 잘못 건드렸어!”
쾅!
배인성은 테이블을 박차고 파출소를 나갔다. 그러고는 소에서 나오자마자 비서에게 소리쳤다.
“저 늙은이랑 그 옆에 인상 더러운 새끼 신상 싹 다 긁어와, 가족에 팔촌에 친구까지! 이 존만한 서민 새끼들이 감히 누굴 건드려?”
“예, 본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