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옥수수 풍년
사아아아-
키 185센티의 덩치 큰 방가코바가 쓰러지고, 길가에는 스산한 바람 소리만이 들려왔다.
하루가 보여준 묘기에 가까운 현란한 타격술은 미인 앞이기에 남자들이 무리하게 마셨던 술을 확 깨게 만들었다.
“어…?”
“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코, 코, 코바 형!”
하루는 그들의 반응을 무시하며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주웠다.
“헐… 기절했어.”
“숨은, 숨은 쉬어?”
하루는 무릎을 펴고 일어나며 나지막히 말했다.
“그걸로 안 죽음, 약해빠져서 잠깐 기절한 거임.”
“어? 어, 어… 이, 입에서 피 나는데”
“경,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방가코바가 기절한 데다가 입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오자 사람들이 심각해졌다. 그러나 경찰을 언급할 때 하루의 눈치를 보며 섣불리 휴대폰을 들지 못했다.
몇 초만에 휙휙 하더니 덩치가 산만 한 방가코바를 기절시킨 사람이다. 겁먹지 않으면 이상한 거다.
“금방 일어나, 깨울까? 비켜.”
“어…?”
하루는 방가코바를 챙기는 사내를 치우고 그의 가슴에 발을 올렸다. 그 모습에 다른 사내들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왜 부럽지.”
“너, 너도? 나도.”
그때, 하루가 한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짜악! 짝!
“방금 한 말 취소.”
“나도….”
* * *
꿈뻑 꿈뻑
하루의 매서운 따귀가 방가코바의 얼굴을 세 번째 후려칠 때, 그가 눈을 떴다.
이곳이 천국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얼굴의 여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무표정에 건조한 눈빛이지만 그 미모가 가려지지는 않는다.
‘시발, 이쁘긴 존나 이쁘네.’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가 멈추지 않고 그에게 손을 뻗었다.
“읏!”
방가코바는 본능적으로 두 손을 파다닥 교차시켜 엑스자를 만들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루는 여전히 건조한 눈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내민 손을 펼쳤다. 그녀의 작은 손 안에는 피 묻은 이빨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니 꺼야, 신고할 거면 해.”
방가코바는 그녀가 내민 자신의 치아를 보았다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지금 저들의 눈빛에는 ‘꼴 좋다.’ 라는 마음이 적나라하게 비쳤다.
방가코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게임 캐릭터는 약하지만 현모, 그러니까 현실 정모에서만큼은 근 1년 가까이 남자들을 덩치와 인상으로 내리찍으며 왕으로 군림했었는데….
자신보다 더 크거나 강해보이는 사람이 아닌, 이 가냘픈 여자에게 이도 부러지고 기절까지 했다는 모멸감에 몸을 떨었다.
휙
그는 자신의 치아를 재빨리 훔치고는 일어나 그들의 반대편으로 성큼성큼 떠났다.
“시팔년, 두고 보자, 시팔 시팔….”
방가코바가 멀어지는 그 시점.
장금은 기도하듯이 두 손을 모으고 멀리서 하루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존나 멋있어….’
딱 보아도 견적이 나오지 않는 어마어마한 피지컬의 남성을 순식간에 제압하는 가녀린 여성, 그 반전매력에 치여 장금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루의 외모는 보호본능을 일으키지만, 이를 뛰어넘는 강인한 여성은 많은 여성들의 로망이다.
방가코바가 이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자, 그제야 남자들이 하루에게 한달음에 다가와 살폈다.
“하루야 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
“아, 저 형은 진짜 이상하다니까.”
하루는 어깨를 잡아오는 그들의 손을 만류하며 새침하게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얼이 빠져있는 장금을 보며 물었다.
“2차는 노래방 맞음?”
“…네? 아 네! 언니! 같이 가요!”
* * *
같은 시각, 방가코바는 아직도 피가 흐르는 입을 틀어막고 휴대폰을 들었다.
“어, 나다. 아직 애들이랑 같이 있냐? 다 데리고 와, 죽이는데 죽여버릴 년 하나 있다.”
그는 전화를 끊고 하루의 무리가 있던 방향을 쳐다보며 이를 갈았다.
“내가 시발… 오늘 저 년 가만 두면 사람이 아니다.”
* * *
노래방으로 가는 길.
남자들 네다섯 명이 하루와 장금을 둘러싸고 쉴 새 없이 말을 내뱉고 있다.
“코바 걔가 신고하면 어떡하냐? 그거 걔가 먼저 치기는 했어도 과잉진압이라… 우리나라 법이 그렇잖아.”
“그 쓰레기새끼 예전에 거들먹거리면서 얘기하는 거 들어보니까 빵도 갔다 왔다던데.”
“구라일 수도 있지, 존나 있는 척 했잖아. 아, 아까 하루가 그렇게 했을 때 얼마나 속 시원하던지.”
“하루야, 내 옆집 형의 친동생의 베프의 엄마의 친구의 아들의 맞팔로워가 변호사거든?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 내가 말 잘 해볼게.”
하루는 그들의 호의를 느꼈지만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며 대답했다.
“괜찮음, 내 친구한테 말하면 다 해결됨.”
“응? 그런 사람이 있어? 역시 대단하다. 뭐하는 사람인데?”
“뭐하는 사람? 음….”
하루는 안서은이 뭐하는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저 높은 직책이 있다는 것밖에는.
“여기저기 다님.”
“아하….”
“백순가? 남자면 조심해, 흑심 있어서 그럴 수 있어.”
“하루야, 그런데 아까 그건 어떻게 한 거야? 원래 무술같은 거 배웠어?”
“맞아, 나는 진짜 영화 보는 줄, 손이 안 보이던데?”
그때, 하루를 가만 쳐다보던 장금의 머리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하루의 시크함이 묻어나는 채팅에, 잘생긴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기억해뒀었다.
“생각났다! 언니 경호원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루의 눈썹이 슬쩍 움직였다.
스치듯이 딱 한 번,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람 지킴’이라고 채팅을 했었는데 그것을 경호원으로 딱 알아채고 말하는 장금이 놀라웠다.
하루는 장금에게 엄지를 추켜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즘, 역시 힐러.”
“와… 대박, 경호원이라니.”
“그래서 그렇게 멋있게 딱! 나 진짜 여자 경호원 편견 있었는데 하루때문에 싹 사라졌다.”
“하루야 나도 경호받고 싶은데, 어디에 신청해야 돼?”
그때 마침 저 멀리 노래방 간판이 보였다. 하루는 그것을 검지로 가리켰다.
“청개구리 노래방.”
그녀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하루는 지금까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노래방을 가본 적이 없다. 안서은과도 클럽은 가봤어도 노래방은 가지 않았다.
들어가니 클럽의 룸과 비슷했는데 조금 더 후진 감이 있었다.
사람이 많아서 방을 두 개를 잡아야 했다. 장금이 하루에게 대뜸 팔짱을 끼우며 친한 척을 했다.
“언니, 저랑 같은 방 가요.”
“웅, 힐러는 옳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하루와 장금이 있는 방에 남자들이 몰렸다.
다른 방에는 유부남이거나 적극적으로 다가오지 못하는 남자, 그리고 남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터프한 여자 한 명이 들어갔다.
방은 더 큰 데 작은 곳에 열 명이 넘게 몰리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하루와 장금이 따로 들어갔다면 이런 편향적인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둘이 붙어있으니 작은 방은 경쟁이 심했다.
“그으대 기억이히~ 지난 사랑이히~ 내 안을 파고드는 가쉬이~가 되어-”
덕분에 장금과 하루가 들어간 방에는 남자들이 발라드만 부르며 혀를 베베 꼬았다.
그때, 독행남아는 자신의 차례가 되자 결심한 듯이 주먹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화면을 보지 않고 돌아서서 하루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는 노래가 시작되자 감정 충만한 표정으로 하루에게 손을 뻗었다.
“나의 하루를 가만히, 바라보~ 는~ 너, 눈물 흘린~”
“어머어머어머 저 오빠 왜 저래?! 으앗 징그러”
그 모습에 장금은 기겁했고, 하루는 건조한 눈으로 독행남아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캔음료 하나를 거꾸로 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혀를 뽑아버리겠어.”
“언니 언니, 참아요!”
안 그래도 음침한 지하 노래방이 더욱 음침해질 무렵, 그 분위기를 정화시키기 위한 장금의 차례가 되었다. 비장한 눈빛으로 일어선 그녀가 마이크를 들고 생긋 웃었다.
“그렇게 음흉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지 말아줘~그런 널 바라봐도, 아무 느낌 없는 나의 마음 알아줘.”
옛날 노래여도 끼를 부리기 좋은 노래는 돌고 돈다.
스물한 살인 장금은 삼촌격인 오빠들에게 딱 맞춤인 노래를 선곡하여 한 명 한 명씩 검지로 콕콕 찝으며 불렀다.
그 모습에 심장을 저격당한 남자들은 벌떡 일어나 탬버린을 흔들며 흥을 주체하지 못했다.
“오 예~”
“느낌이!!!”
“오 예-”
“오도로오옥!!”
“해피 투게더-”
“내 맘을 흔들어!!!”
“아윽 내 맘 흔들려!”
후렴구 떼창은 흡사 위문공연을 온 듯했다. 그렇게 장금이 성공리에 공연을 끝마칠 때쯤, 하루는 노래방기계에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저 정말 데리러 오실 겁니까?]
[집주인님: 이미 막차도 끊겼다. 어디야]
[청개구리 노래방입니다. 노래방 기계 시간은 37분 남았습니다.]
[집주인님: 서비스 줄 거야, 지금 출발한다. 49분 걸린다.]
[네, 기다리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오던 장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니,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응? 내가?”
“네, 처음으로 웃고 있던데요?”
장금의 말에 하루는 휴대폰을 들어 비치는 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미소가 사그라들고 있지만 아직 조금 남아있다.
“음, 집주인님이 데리러 온다고 했음.”
“아 정말요? 언니 집이 어디에요?”
“강진시 용수동 리드빌딩.”
“용수동? 저도 그쪽 방향인데, 데려다주시면 안 돼요? 언니랑 같이 가고 싶어요.”
“집주인님한테 물어보겠음.”
“네! 고마워요 언니!”
장금이 하루를 와락 껴안았다. 하루는 답답하여 빠르게 그녀를 떼어내려 했지만, 게임상에서 대답을 안 해서 삐졌다는 말이 떠올라 밀어내지 않았다. 서은도 문자 답장을 빼먹거나 힘들다고 할 때마다 이렇게 안겨있으면 풀리곤 했다.
둘이 껴안고 있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보고 있던 남자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물었다.
“하루야 강진시 살아? 나도 그 근처 평택 사는데, 괜히 집주인님 고생시키지 말고 내가 데려다줄게. 어차피 가는 길이야.”
“어차피 가는 길? 야, 여기서 강진시랑 평택은 정반대인데? 내가 데려다줄게.”
“넌 술 쳐마셨잖아, 감히 하루를 위험하게 만들려고?”
“대리 부를 거거든, 대리는 폼이냐?”
그때, 하루에게 노래로 대쉬했다가 상처만 남은 독행남아가 은근슬쩍 장금의 옆으로 왔다.
“장금아 오빠가 데려다줄까? 차에 방향제 새로 설치했어.”
“아… 하루언니 답장 오면요.”
“어, 그래….”
* * *
49분 후.
청개구리 노래방 근처 주차장에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멈추어 섰다. 그곳에서 새까만 옷을 위아래로 입고 강철같은 근육을 지닌 남자가 내려섰다.
신해수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다가 청개구리 노래방을 단번에 찾고, 하루에게 문자했다.
[도착, 다 끝나고 천천히 올라와.]
해수는 노래방 계단으로 내려가지 않고 벽에 기대어 하루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까만 벽에 까만 옷을 입으니 얼굴과 팔뚝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일으켰다.
부아아아앙!
그때, 한 하얀색 싸구려 승용차가 개조하여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다가와 노래방 앞에서 멈추어 섰다.
차 문 네 개가 거의 동시에 열리며 시꺼먼 사내들이 우르르 내려섰다.
“…시팔 존나 재밌겠네.”
“그러니까 조져도 얼굴은 냅두라고.”
“다른 새끼들도 조지면 안 돼?”
“아, 병신아 그러면 일 커지니까 그 년만 데리고 나온다니까.”
“아아 오케이.”
그들은 트렁크에서 각목이나 쇠파이프를 꺼내어 하나씩 들었다.
방가코바와 그의 친구들이다. 방가코바의 눈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하루 그년을 내가 오늘 하루살이로 만든다.”
복수에 눈이 먼 그의 눈에는 해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를 지나쳐 노래방으로 들어서려는 그때.
스윽
해수가 그들의 길을 막았다.
그제야 해수를 발견한 방가코바가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
“뭐야 이건?”
아직 남아있는 알코올에 복수심과 무기, 친구들까지 있는 그에게는 지금 무서울 것이 없었다.
어두운 밤이라 상대방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도 한몫했다.
해수는 권태로운 눈으로 그들을 한 번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왼쪽 구석에 각자 들고 있는 무기를 내려놓고 뒤돌아서 집으로 해산하면 아무 일도 없던 일로 해주겠다. 기회는 한 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