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정모(1)
신해수는 미래시로 강진이 누군가에게 전화하는 것을 보았다. 목소리의 분위기는 보육원에서 아이들에게 따뜻하게 미소 짓던 그녀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싸늘했지만, 그녀가 분명했다.
“박서영 목소리입니다. 오갱 형님은 먼저 가 계십시오. 박서영 데리고 가겠습니다.”
“어 그래라, 참 기분 묘하네, 결국 지들끼리 파멸이라….”
* * *
깜깜한 새벽, 박서영은 자신의 지갑에서 미리 써둔 유서를 꺼내어 자고 있는 남편의 머리맡에 두었다. 그러고는 그를 한참 동안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뚝 뚝 투둑-
“미안해요. 이런 여자 사랑해줘서, 미안해요.”
그녀는 떨어지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신발도 신지 않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센서등이 꺼지고 나서야 다시 움직였다.
사박 사박 사박
그녀의 선택은 엘리베이터가 아닌 비상계단이었다. 맨발에 닿는 계단의 냉기가 뼛속까지 시리게 만든다.
척, 끼이익-
옥상 문을 열고, 난간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벽녘의 하늘은 눈을 감고 있는지 뜨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새까맣다.
“이걸로 조금이나마 풀렸으면 좋겠어.”
그녀는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나지막이 말을 내뱉고는, 난간 위에 한쪽 발을 올렸다.
그때.
타다다닥- 척.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녀의 팔뚝을 붙잡았다. 동시에 하늘이 빙글 돌았다.
후웅- 쾅!
“커헉!”
그녀는 방수페인트가 칠해진 바닥에 강하게 내리 찍혔다. 그 충격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했다. 마치 잠시나마 옥상에서 투신했을 때의 고통을 맛본 듯했다.
꺽꺽거리는 그녀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가 커다란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그의 손을 잡았다.
철컥 철컥.
그녀의 손에 채워지는 쇠고랑, 해수는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박서영씨, 당신을 특수살인교사죄 혐의로 체포합니다.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변명의 기회가 있습니다.”
그녀는 죽은 눈으로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 * *
박서영과 강진은 범행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덕분에 조사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제가 처리할 애들을 조사하고 처리 방식을 얘기해주면, 강진님이 실행했습니다.”
박서영은 15년 전 여학생과 그냥 조금 친했던 정도가 아니었다. 서영이 따돌림을 당할 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주었던 친구였다.
하지만 어쩌다 트집을 잡힌 여학생이 왕따는 물론 폭력의 대상이 되었을 때.
자신에게로 화살이 넘어올까 두려웠던 서영은 앞장서서 그녀를 조롱했다.
그 사건 이후.
서영은 절친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시달렸다. 나름의 속죄를 위해 봉사활동을 했지만 나아지지 않고 짜증과 슬픔이 늘었다. 최근에는 환상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결국 죄책감을 덜기 위해 그들을 심판하기로 결정했고.
첫 타자가 강진이었다.
-…이랬잖아, 죽을 이유는 충분하지? 억울해하지 마, 너는 지옥도 아까우니까.
-얼른 죽여.
강진은 이미 마취가 풀렸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이미 시궁창 인생을 살던 그는 잘됐다 싶어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였고, 이를 본 서영은 그를 바로 죽이지 않고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둘은 특수살인, 특수살인교사죄로 종신형을 받았다.
구광헌은 그날 이후로 충격을 받고 정신병에 걸려서 결국 정신병원에 갇혔다.
팔은 봉합했지만, 그곳과 함께 항문도 일부 잘려 똥오줌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에헤, 에헤헿, 똥, 똥 나온다 똥.”
투둑 툭-
“꺄아악!”
* * *
[15년 전 여학생 집단 폭행, 사망 사건. 가해자들을 향한 분노의 심판, 범인은 가해자였다.]
[피해자와 절친이었던 가해자가 꾸민 피의 복수극]
┗이제와서 그러면 걔가 살아 돌아오냐?
┗그래도 잘했다 근데 너는 안 죽어?
┗와 대박, 나 이 사건 알아, 졸라 개짜증 충격 열불터졌었는데 결국 지들끼리 죽였구나, 졸라 잘됐다
┗졸라밖에 할줄 모르는 당신 졸라 시러
┗근데 두 명은 공범이고 여섯 명 중에 여섯 명 다 당했다며, 경찰 졸라 무능하네?
┗그니까, 끝까지 무능하지 왜 자살한다는 애들은 살려두냐?
┗ㄴㄴㄴ 자살은 너무 깔끔함, 살아서 고통받아야지
┗정의의 사신 박ㅅㅇ 강ㅈ을 풀어줘라! 풀어줘라!
┗한국판 히어로들 탄원서 제출(링크)
┗미친놈들아 아무튼 계획살인인 거고 여섯 명이나 죽인 살인마들이야, 걔네랑 이웃하고 싶냐?
┗여섯 명 아니고 네 명, 둘은 살아있음, 하나는 병신돼서 정신병원에 있다고 함
┗강수대 잘했다! 강수대 화이팅!
딸칵
막내는 엔터를 눌러 댓글을 등록했다. 그때 해수가 겉옷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배님 퇴근하십니까?”
“어 그래, 몸은 괜찮고?”
막내는 해수에게 이두를 쥐어짜 보였다.
“당연히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래, 수고 많았다. 너도 얼른 퇴근해.”
“선배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들어가십시오!”
해수가 가고, 막내는 어두운 본부 안에서 한참을 댓글을 살피다가 여자친구한테 전화가 오고 나서야 퇴근을 했다.
* * *
“안 박히쥬, 약오르쥬? 억울해도 방법이 없쥬?”
띡- 철컥
한참 게임에 열중하고 있던 하루는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에 휴대폰을 소파에 집어 던지고 후다닥 일어나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스으윽-
문이 열리자 하루는 배꼽에 손을 얹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해수님 오셨습니까?”
“어 그래, 잘 지내고 있었어?”
해수는 연쇄살인사건을 맡은 후 사흘 만에 집에 들어온 것이다.
어떤 사건을 맡았는지 알게 된 하루는 허리를 펴자마자 해수에게 훅 달라붙어 몸을 더듬거렸다.
“뭐, 뭐야, 왜 그래?”
“범인이 유도 국가대표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유도는 제압하기 까다로운 무술입니다.”
해수는 은밀한 곳까지 터치하려는 그녀의 두 손을 잡아채어 밀었다.
“국가대표 말고 유망주, 하나도 안 다쳤어, 괜찮아.”
“그럴 거라고 여기기는 했지만, 다행입니다.”
그래도 집에 들어오면 딱딱하게나마 걱정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며칠 동안의 팍팍하고 감정적으로도 힘들었던 나날을 사르르 녹게 해주었다.
“밥 아직 안 먹었지, 해줄게, 기다려.”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쌀도 씻어서 취사 눌렀습니다.”
“잘했네, 반찬은 내가 할게, 앉아.”
“…네, 마늘햄을 넣은 김치찌개 재료가 냉장고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하하, 그래, 김치찌개 해줄게.”
해수는 자신이 소리내어 웃었다는 사실에 살짝 놀랐다. 얼마 만에 이렇게 웃었던가? 아무튼 주장은 확실한 여자다.
해수가 주방으로 가고, 하루는 다시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들었다.
그런데 캐릭터가 싸늘한 바닥에 누워있었다. 그녀의 고운 미간이 확 좁혀졌다.
“…아.”
@하루살이: 아, 킹받네.
@방가코바: ㅋㅋㅋㅋ하루 허접때기 워러뷰한테 디졌네?
@방가코바: 쪽팔려서 같이 못 다니겠다
@하루살이: 집주인님 오셔서 인사하는 사이 죽은거
@방가코바: 집주인님 ㅋㅋ 언제까지 집주인님 집주인님 하며 하인노릇 할 거야, 월세 낼 돈 없어? 형이 꿔줘?
@하루살이: 닥쳐
@방가코바: 저새끼는 한참 어린것이 맨날 반말 찍찍하네, 너 그러다 진짜 뒤지게 맞는다
@하루살이: 뒤지게?
@장금: 오빠들 웨구랭? 싸우디마 장그미 마음아포
@태아군: 장금아 밥 먹었어? 뭐먹었어
@훼오레c: 장금이 안녕
@olimhs35: 장금이 반가워
@독행남아: 장금이 왜 이제 와써? 남자친구랑 데이트해써?
@장금: 무슨 남친? 아 나도 남친 이씀 조케따
@독행남아: 오빠 있잖아
@태아군: 장금아 넌 이 게임 섭종할 때까지 남친 생기면 안 된다 그거 우리 길드 배신이야
@방가코바: 뒤지게? 뒤지게? 시발 진짜 어린노무새끼가 말하는 싸가지 봐라 야, 니는 실제로 만나면 내 눈도 못 마주쳐 이 하루살이새끼야
@장금: 아이 왜구레 싸우지 마용
하루는 채팅창을 보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게임상이라지만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전에 다른 게임 현피도 직접 갔던 하루다.
@하루살이: 죽일까
@장금: 하루오빠도 참아 장금이 무서웡ㅜㅜ
@태아군: 그래 둘 다 참아 장금이 있는데 왜 그래요?
@태아군: 하루도, 방가형 원래 말이 좀 거친 거 알잖아 니가 이해해
@독행남아: 장금아 [링크] 이거 퀘 깼어? 오빠랑 같이 깨러 갈가?
@방가코바: 태아군 시발롬아 내가 뭐가 좀 거칠어? 나 존나 스윗남이거든? 알잖아
@태아군: 알죠 형 상남자 수윗남
@coso: 여기서 싸우지 말고 만나서 싸워, 이번주 토욜날 안 그래도 정모잖아
@장금: 아맞다 뭐먹을지 기대된다 아
@왕십리70: 신비주의 하루가 퍽이나 오겠다. 목소리 들려주기 싫다고 디콩도 안 하는데
@방가코바: 나한테 맞아 뒤질까봐 안 오겠지
@장금: 하루오빠 안와요? 아 왔으면 좋겠는데 장금이 하루오빵 보고싶은데, 왠지 잘생겼을 거 같아
@독행남아: 하루가? 그래? 나는… 음, 그냥 공부 잘하게 생겼을 거 같은데
하루는 검지로 입술을 매만지다가 요리를 하고 있는 해수의 넓은 등판을 힐끔 보고는 채팅을 쳤다.
@하루살이: 정모 감. 방가코바 마우스피스 끼고 와라
@태아군: 헐
@왕십리70: 대박
“밥 먹자.”
“네!”
해수의 말 한마디에 쌍심지를 켜고 채팅을 하던 하루가 휴대폰을 던지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루가 의자에 앉자 해수가 타이밍에 맞게 냄비뚜껑을 열었다.
마늘햄을 넣은 김치찌개가 먹음직한 자태를 드러낸다.
“와아….”
하루의 진심어린 감탄, 그녀는 손을 휘적거리며 냄새를 먼저 맡았다.
“후움… 해수님은 요리를 왜 이렇게 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말투다. 그녀의 말대로 해수 주변인들은 해수가 요리를, 그것도 의외로 잘하는 것을 보고 놀라곤 한다.
위협적인 근육으로 조그만 양파나 당근을 써는 것은 상상도 되지 않고, 바쁜 형사는 요리에 정성을 들일 만한 시간이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냥, 감대로 하는 거야.”
하루는 따로 뜨기도 전에 수저로 국물을 가득 떠서 후루룹 마셨다. 그러고는 눈을 반짝이며 엄지를 추켜올렸다.
“하… 진짜, 시, 정말 맛있습니다.”
하루의 가식이 한 푼도 섞여있지 않은 감탄도 해수의 요리실력 향상에 일조하고 있다.
그렇게 감동스러운 식사가 끝날 때쯤, 하루가 볼록 나온 배를 어루만지다가 은근슬쩍 말을 꺼냈다.
“저 토요일날 외출합니다.”
“어, 그래, 그게 왜.”
이젠 어엿한 직업도 갖고 있는 하루다.
언제 어디로 외출하든 요즘은 거의 보고를 하지 않는다.
“게임 정모입니다. 저녁 모임.”
“…게임.”
해수는 게임이라는 말에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현피는 아니지?”
하루는 뜨끔했지만 시선을 내리고 고개를 저었다.
“정모입니다. 맛있는 거 먹는.”
“그래, 맛있는 거 잘 먹고, 끝나면 전화해. 데리러 갈 테니까.”
이제 승차감도 좋은 차가 있기 때문에 장거리도 문제 없다.
저녁모임이라고 했는데도,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데 일단 데리러 간다는 해수의 말에 하루는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네.”
* * *
맥주도 팔고 식사도 파는 호프집 겸 식당, 한쪽에 테이블 세 개를 이어놓고 남녀가 왁자지껄 떠들고 있다.
명품 핸드백에 짧은 스커트를 입고 늘씬한 각선미를 뽐내는 여자가 그곳으로 다가간다.
“오빠들 안뇽?”
“장금이다! 장금이 왔어? 일루와 일루와, 오빠 옆으로 와.”
“와… 장금이 더 이뻐졌는데.”
그녀의 등장에 남자들이 세 명이나 일어나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아 뭐래, 밖에선 닉네임 부르지 말라니까”
“왜 뭐가 어때서, 나는 태아라고 부르면서, 응애”
“아, 존나웃겨.”
“장금이 치마 너무 짧은 거 아니야? 여기 남자들 다 눈 돌아간다.”
“언니, 보라고 입은 거잖아, 봐 봐, 마음껏 봐.”
“이야, 역시 이쁘면 마음씨도 이뻐.”
“근데 하루오빠는 왔어? 온다고 했잖아.”
장금의 말에 한 험악한 인상에 모자를 깊게 눌러쓴 사내가 중얼거렸다.
“그 새끼가 오겠냐? 그냥 지른 말이지, 오면 나한테 뒤질 텐데, 지금쯤 존나 쫄아 있을 거다.”
“코바 오빠도 참, 그만 좀 해요. 같은 길드원들끼리.”
“싸가지가 없잖아 싸가지가, 지가 뭔데 신비주의니 뭐니, 존나 어린 게 상도덕이 없어.”
“근데 코바는 내가 형인데 나한테 바로 말 깠잖아.”
“아 형! 그건 그거고, 왜, 그래서 싫어? 시발 싫으면 그때 바로 말하지, 갑자기 쪼잔하게 왜 이제 와서 말해?”
“아니, 그게 아니라, 미안하다.”
“뭐야, 분위기 왜 그래, 짠짠 짠~”
장금이 잔을 들어올리며 분위기를 전환시켰고, 다시 평범한 게임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 후드티에 레깅스를 입은 여자가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예쁜여자 레이더인 독행남아는 자연스레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
그녀가 깊게 눌러썼던 후드를 벗자 독행남아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그는 옆에 앉은 왕십리70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아 왜.”
독행남아는 시선을 고정한 채 턱짓을 하자 왕십리도 시선을 따라갔다. 그러고는 후드티녀의 얼굴을 보고 입을 벌렸다.
“와씨, 존나 이뻐.”
시끌시끌한 와중에도 그의 진심이 가득 담긴 감탄을 들은 남자 몇 명은 자연스레 후드티녀를 발견하고 눈을 뗄 줄을 몰랐다.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느낀 장금이 눈쌀을 찌푸렸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뭔 일인데?”
하지만 평소 장금바라기였던 독행남아까지도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후드티녀에게 시선을 계속 고정시켰다.
“어, 가까워진다. 온다. 어? 여기로 오는데?
“진짜? 진짜네? 누구지?”
이윽고 후드티녀가 그들의 테이블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던 남녀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후드티녀는 그들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 앞으로 다가가 멈추어 섰다.
“야.”
사내, 방가코바는 선택받은 느낌에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나 하루다 이 새끼야, 어금니 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