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일 수 있으니까 스캔 한 번 떠봐, 전산으로 확인하게.
“네.”
11호는 이번 임무에 부담이 없었다. 임무는 타깃 처리가 아닌 VIP의 경고로 겁을 주는 것이 전부였다.
조장이 명령하여 확인은 하겠지만, 일반인은 어차피 여성에다가 몸매도 가냘픈 것이 위장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도 실수가 없게 스캔에 나섰다.
옷 윗단추에 있는 카메라로 스캔하기 위해 스치듯 지나가기 위해 타깃에게 걸음을 옮겼다.
그때, 가까이 가기도 전에 일반인 여성과 눈이 딱 마주쳤다. 11호의 눈이 살짝 커지고 동공이 흔들린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맞나? 맞아? 맞아, 분명해, 10년이 지났지만, 얼굴도 분위기도 180도 바뀌었지만 알 수 있어, 같은 조에서 유일한 생존자인 나는 알 수 있어, 확실해, 날 알아봤을까? 아니, 쟤는 남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어, 못 알아봤을 거야, 하지만.’
그는 남자화장실로 들어가 대변 칸을 하나하나씩 급히 열어보고 모두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입을 열었다.
“계획 중단, 계획 중단, 지금 제가 누굴-”
그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가 위를 올려다보기도 전에 두 손이 내려와 그의 턱과 머리를 잡았다.
우드득-
11호는 너무 놀란 나머지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
스르륵-
귀신처럼 은밀하게 대변칸 안으로 들어온 하루는 그의 턱밑에 손가락을 대어 맥박을 확인했다.
기절했을 뿐 목숨이 끊기지는 않았다.
그녀는 빠르게 남자의 이어폰을 빼서 귀에 꽂았다.
-왜 갑자기? 뭔데, 누굴 봤는데?
아직 자신을 봤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하루는 송수신기를 밟아 부수고, 그의 몸을 뒤져서 위치추적기로 보일만 한 것들을 모두 꺼내어 화장실 창문을 열고 옆 건물에 던졌다.
남자가 소지하고 있던 칼과 칼집을 챙겨 치마 속 허벅지 안쪽에 둘렀다.
하루는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맞다. 자신과 같은 조였던 유일한 생존자, 하필 이 자가 어떤 임무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었고, 자신을 알아보았다.
하루는 대변칸 문을 닫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급하게 왔으니 서은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이 자를 가만 놔둘 수도 없다.
머리가 복잡하게 엉켰다. 급하고 절대 물러서지 말아야 할 일들이 충돌했다. 우선 차례를 먼저 정한다.
일단 기절했으니 서은에게 먼저 가서 사정이 있다고 말하고 돌아와 후처리를 생각한다.
저벅 저벅
하루가 화장실 문을 열자 문 앞에 검은 그림자와 딱 마주쳤다. 하루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너 뭐야.”
*
신해수는 하루의 생일선물을 구매하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여 백화점에 들렀다.
오늘 12시가 지나면 하루의 생일이다. 처음 하루를 지하세계에서 끌어올렸던 바로 그날이다.
“음?”
우연히 안서은과 하루를 발견했다. 눈에 확 띄어서 안 보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곳에 그녀들이 있었다.
다가가려는데 하루가 누군가를 보고는 급히 따라가는 모습에 의아함을 가졌다. 안서은도 눈치채지 못하게 재빨리 사라졌다.
어떤 남자의 뒤를 쫓아 남자 화장실까지 들어가더니, 혼자서 나왔다.
“너 뭐야.”
하루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두려움이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모습은 생전 처음 본다.
하루는 평생에 처음으로 지키고 싶은 삶이 생겼는데 모두 잃을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러다가 해수를 발견하고는 놀라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가장 들키지 말아야 할 사람이 눈앞에 있다.
“저,저는...”
해수는 떨고 있는 그녀의 두 어깨를 붙잡고, 차가운 눈을 마주했다.
“괜찮아.”
해수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닫혀 있는 변기 칸을 열어보니 조금 전에 들어간 남자가 쓰러져 있다.
기절했을 뿐, 숨은 쉬고 있다.
“죽이지 않았는데, 죽여야 합니다. 안 그러면... 위험합니다. 집주인님도, 저도, 모두가”
하루의 뜻 모를 말에 해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파헤치지는 않았지만, 하루가 실장급 인물들과 엮여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항상 한 켠에 있었다.
해수는 어렴풋이 하루의 말을 해석하여 상황을 판단했다.
“...이 남자가 네가 이런 걸 알아?”
“모릅니다. 얼굴이나 제 손을 보기 전에 제압했습니다.”
“이 남자가 외부와 접촉하면 위험하다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여전히 불안한 눈빛, 해수가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럼 이건 내가 이런 거라고 하자. 내가 이 사람 외부와 만나지 못하게 해줄 테니까, 일단 죽이지는 마, 칼 들고 덤비지도 않았는데 죽일 순 없어.”
“...”
“날 믿어, 그만 떨고.”
하루는 천천히 해수의 눈을 마주하고,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네, 믿습니다.”
그렇게 하루와 함께 기절한 남자를 데리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나오자마자 안서은과 마주쳤다. 얼굴을 보니 하루를 급히 찾았던 듯했다.
“하루씨! 해수씨?”
그녀의 시선이 하루에게 갔다가 해수, 이어서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향했다.
해수가 그를 들쳐업으며 말했다.
“강력범 검거하러 왔습니다. 쇼핑 잘하십시오.”
“네? 아니...”
해수는 재빨리 남자를 데리고 그녀들 앞에서 사라졌다. 해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서은이 정신을 차리고 하루의 손을 잡았다.
“하루씨,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던 거에요?”
“화장실이 급해서... 죄송합니다.”
“걱정했어요. 진짜로”
“죄송합니다.”
하루 역시 해수가 그 남자를 데리고 가는 뒷모습에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분명 같은 팀이 근처에 있다. 저 남자, 11호가 같은 조였으니 얼굴을 한 번에 알아본 것일 수도 있지만, 섣불리 움직였다가 다른 자들도 자신을 알아보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들과 다른 세상에 살면, 그들과 마주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너무 안일한 착각이었다.
그들이 동료를 구하기 위해 경찰인 해수에게 덤벼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안서은님.”
“네, 하루씨.”
“제가 몸이 좋지 않습니다.”
이 주 간 같이 먹고 자기까지 하면서 급격히 가까워진 서은은 하루의 성격상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서은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고 동그랗게 뜨며 놀람을 금치 못했다.
“정말요? 어디 가요? 배가? 일단 우리 병원부터 가요.”
“아니요. 집에 가서 쉬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 그래요. 제가 약이라도 사줄게요. 일단 가요. 얼른 가요.”
“네, 감사합니다.”
*
지하주차장,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이 은밀히 대기하고 있다. 그들은 신해수가 회사 차에 남자를 태우는 모습을 보고 혼란이 왔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저 사람은 누구지?
-11호 따냅니까?
선글라스를 쓰고 원피스를 입은 중년 여인이 빨간색 경차에서 내려 해수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무전이 울렸다.
-멈춰, 그 형사다. VIP가 말했던 신형사, 지금 경찰 건드리면 복잡해져, 물러나.
-예썰.
*
해수는 남자를 데리고 혹시 모를 미행을 뿌리치기 위해 몇 바퀴 빙빙 돌다가 리드 빌딩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왔다.
남자가 뭐하는 놈인지, 하루와 어떤 관계인지 알아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아무런 죄목도 없기에 풀어줄 수도, 경찰서에 가둘 수도 없다.
하루가 그렇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 실장급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수는 지하주차장 끄트머리에 폐쇄된 청소도구함 안에 남자를 집어넣었다. 문도 철로 된 방화문이고 튼튼한 자물쇠도 달린 곳이다.
남자가 깨어나 눈을 뜨고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지?”
“내가 누군지는 안 묻네?”
“넌 누구지?”
“넌 누군데.”
그의 눈동자가 해수의 신발과 옷차림, 얼굴로 차례대로 움직였다.
“경찰이군,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신형사? 그렇군, 선량한 시민을 이렇게 묶어두고 뭐하는 짓이지?”
보통 놈은 아니라는 걸 입증하듯이, 작은 것들만으로 순식간에 많은 것들을 추리해냈다.
“고민 중이야.”
“뭐?”
“널 죽일지, 말지.”
“하하”
두 손과 발이 묶여있으면서 웃음에는 여유와 비아냥이 담겨있다. 실장급 실력을 지녔다면 그럴 수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니네 팀은 철수했다. 내가 경찰인 걸 알아본 거지.”
그제야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다.
“너는 그 정도 가치인 거지, 언제든지 버려질 소모품.”
그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천천히 생각해, 시간은 많으니까.”
해수가 오히려 먼저 그에게 재갈 물리려고 하자,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현직 경찰이 죄목도 없는 일반인을 습격한 것으로도 모자라 감금을 시킨다고? 내가 풀려나면 감당할 수 있겠어?”
해수는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넌 공론화 못해, 기껏해야 니네 팀에 쪼르르 달려가서 보고하는 게 전부겠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해수는 다시 그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일어나 나갔다.
쾅 철컥 철컥
철문이 닫히자 안이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까만 어둠이 가득 찼다. 자물쇠 잠그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읍, 읍...”
스르르 쿵-
해수는 형사 차량으로 철문을 틀어막기까지 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
삑- 철컥
리드빌딩 10층 펜트하우스, 들어오니 싸늘한 공기만 맴돈다. 호다닥 달려와서 배꼽 인사를 건네는 하루가 보이지 않는다.
해수는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안서은: 하루씨 배가 아프다고 해서 아까 헤어졌어요. 하루씨 잘 챙겨줘요.]
문자가 도착한 시간을 보면 지금 도착한 지 꽤 시간이 지났어야 하는데 없다. 전화도 받지 않는다. 아니, 휴대폰을 집에 놓고 갔다.
화장실에서 마주쳤을 때 하얗게 질린 얼굴이 떠오른다.
전에 강도들을 처리하고 가출했을 때도 떠올랐다. 그때처럼 쪽지를 남기지도 않았다.
하루는 신기루처럼 왔고,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만 같은 존재다.
해수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다시 집을 나섰다.
9층에 아이들의 집에도 없고, 1층에 편의점에도 없다.
“대체 어딜 간 거...”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오던 해수의 걸음이 멈추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긴 벤치에 앉아있는 가녀린 옆모습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니 왼손에는 어디서 난 건지 제대로 된 단검까지 쥐고 있다. 마치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비장함과 불안감, 억울함과 슬픔이 담겨 있었다.
해수를 보자 그녀가 단검을 살짝 뒤로 숨겼다.
해수는 활동복 점퍼를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며 말했다.
“밤엔 춥다.”
하루의 어깨가 살짝 떨린다. 그녀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해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말하겠습니다. 저의 과거를.”
그러고는 조그마한 입을 오물조물거리며 망설이다가 간신히 다시 열었다.
“듣고, 저를, 버리셔도 됩니다.”
< #86. 하루의 과거 (하루 삽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