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수는 놀람을 애써 감추며 그에게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성주 국회의원은 인자했던 눈빛은 어디 가고 사람을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해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타게.”
“예,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차 안에서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차가 경찰학교에 들어서자 오성주가 외딴 벤치를 가리켰다.
“저기에 세워주게.”
“예, 의원님.”
해수와 오성주는 그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주변 50미터 내에 아무도 보이지 않고, 비서까지 저 멀리 보냈다.
오성주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이가 찰 만큼 차다보면, 다시 애 같아져.”
“의원님은 아직 젊으십니다.”
실제로 오성주 의원은 60대 초반이지만 50대 초반처럼 보였다. 눈동자가 반짝이고 얼굴에 혈기가 있었다.
그는 허허 웃음을 흘리고는 다시 진지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가끔, 정말 가끔 이 세상의 법칙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믿지 않고 과학적으로 파헤치기보다는, 기적을 믿는 편이 되지.”
“...네.”
“다시 묻지, 자네는 뭔가?”
해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곰곰이 고민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리셋도 얻고 싶다고 얻은 능력도 아니고, 누가 준 지도 모른다. 언제 사라질지 쓰면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 아무것도 모른다.
해수는 그의 질문을 자신에게도 던져보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충남 강력범죄수사대 신해수 경사입니다.”
오성주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가, 해수의 진지한 눈빛에 그도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래, 그게 자네 대답이구만, 알았네.”
“감사합니다.”
“내가 그 응급실에서 딸을 기다리며...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알고 있나?”
해수는 그의 태도에 당황했다. 이 사람은 이미 꿈이 아니라 지나갔던 현실로 그것을 대하고 있다.
그의 장단에 맞춰주면 리셋을 인정하는 꼴이다. 해수는 적당히 노망난 노인을 대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급실...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지독한 후회, 인생이 이렇게 허망한 건데, 언제 떠나갈지 모르는 건데, 왜 마음껏 사랑해주지 못했는지, 왜 미래의 권력과 돈을 위해 소중한 것들을 미뤄뒀는지... 나는 앞으로, 자네가 준 기회로 새로운 삶을 살아볼 걸세.”
“...”
“하지만 있던 일을 없다고 치부할 수는 없는 것,그것도 두 사람의 생명이 달린 일인데, 내 남은 생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자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네.”
상당히 부담스럽다. 해수는 손사래를 쳤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따님과 후희 없는 소중한 시간 만드십시오.”
“그건 항상 할 거고, 아무튼,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게.”
“네, 말씀만으로도 감사...”
“...라고 하면 자네 성격상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을 것 같고, 잘 지켜보고 있겠네, 이 늙은이가 도움을 주면 얼마나 주겠냐마는, 알아만 주게, 나 오성주, 은혜를 허투루 갚는 사람 아니야.”
해수는 말없이 고개를 몇 번이나 숙였다.
오성주가 일어나 먼저 걸음을 옮기려다가 멈칫하더니 뒤돌아섰다.
“아 참, 미혼?”
“예.”
“내 딸 만나볼 생각이 있나?”
“아, 그건...”
해수가 당황하여 대답을 고르고 있을 때, 오성주가 단호한 어투로 말을 끊었다.
“생각하지 말게, 자네 얼굴이 여자 맘고생 시킬 상이야, 내가 생명의 은인에게 뭔들 안 아깝냐마는, 딸은 내 목숨보다 귀해.”
“걱정 마십시오.”
“그래, 몸 잘 챙기고, 그리고...”
“예.”
오성주는 몸을 아예 돌려 해수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두 손으로 마주 잡았다.
“고맙네, 참으로.”
“...”
오성주는 멍한 눈으로 가만히 서 있는 해수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오성주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비서가 차를 몰고 와서 그를 태웠다.
차를 돌릴 때, 그는 창문 너머 해수를 보며 비서에게 말했다.
“저 얼굴을 잘 기억해둬, 자네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하고, 알았어?”
“예, 의원님.”
비서는 리셋 당시 사망 상태였기에 기억은 못 하지만, 말 한 번 제대로 섞지 않은 해수에게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의원의 말을 듣고 나니 은인에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쾅-
중강당 문이 거칠게 열렸다. 해수가 나가고 나서 일반 교관이 훈련을 설렁설렁 시키고 있다가 뜨끔했다. 교관은 물론 교육생들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다른 교육생들과 같은 표정을 하는 오미연이 보인다.
리셋 후에는 교육생들에게 오성주와 부녀지간이라는 것도 들키지 않았고, 오성주도 다치지 않았으니 그저 평범한 교육생일 뿐이다.
해수는 그녀에게 시선을 떼고 교육생들을 날카롭게 둘러보며 외쳤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교육을 변경합니다! 모두 신발 신고 중앙운동장 철봉까지 뛰어갑니다! 선착순 열 명!!”
“어억”
“예스!!”
예스는 예 알겠습니다의 준말로, 의경들이 교육받을 때 쓰다가 경찰교육생들도 함께 쓰게 되었다.
교육생들은 해수의 등장 때부터 긴장하고 각오하고 있었다. 그들은 곧바로 튀어 나가며 신발을 헐레벌떡 신고 중앙 운동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해수도 물론 마지막 사람이 나가는 것까지 확인하고는 운동장을 향해 달렸다.
*
폭풍같은 2주가 지나고, 중강당에서 321기 경찰 교육생들 앞에서 해수의 퇴임식이 간단하게 치러졌다.
“매일 현장에만 있다가 이곳에 와서 여러분을 보고 마음이 든든해졌습니다. 대한민국의 장래가 밝다는 것을 여러분을 보고 느꼈습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열심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해수의 말에 가장 앞에 서 있는 대표 교육생 김웅민이 발굽으로 바닥을 찍으며 선창했다.
쿵!
“예 알겠습니다!”
그러자 강당 천장이 뚫릴 정도로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예 알겠습니다!!”
해수는 까맣게 타고 독기 가득한 그들의 눈빛을 보고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후, 해수가 특별교관으로 다녀갔던 321기는 특수부대 기수라고 불리며 전국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
삑- 철컥
“음”
신해수는 이 주 만에 집에 들어서자마자 신음을 삼켰다. 그의 앞에 두 여자가 얼어붙어 있다.
“어.”
“앗.”
안서은과 하루가 분홍색과 하얀색 바탕의 땡땡이 파자마를 입고 소파에 누워있다가 눈이 마주친 것이다.
두 여자의 머리에는 각각 고양이와 여우 모양의 머리띠까지 쓰고 이마를 훤히 까고 있었다.
해수는 슬그머니 일어나는 안서은과 과자를 입에 가져가던 중에 얼어붙어 있는 하루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고 있었군.”
“어, 이, 이건 빨리 치울게요.”
“괜찮습니다. 오신 김에 저녁 드시고 가시죠.”
“아, 어...”
안서은이 하루와 해수를 보며 망설였다. 그러자 하루가 서은의 소매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십시오. 집주인님 이 주 만에 복귀한 기념, 요리 잘하십니다.”
“그,그럴까요?”
*
하루와 서은은 전보다 꽤 친밀해져 있었다. 이 주 동안 열 번 가까이 만나고, 최근 며칠은 서은이 해수의 집에서 잠까지 잤다고 한다.
“...그래서 그 클럽에서 큰일 날 뻔 했는데, 하루씨가 탁탁탁!”
“...백화점에서 안서은님이 ‘여기부터 여기까지’라고 하셨습니다.”
해수는 식탁에서 하루와 서은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종알종알 들으며 식사 시간을 보냈다.
그날 밤, 하루는 바로 잠을 청하러 자기 방에 들어가지 않고 거실에서 어슬렁거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이다.
“왜”
해수의 물음에 그제야 하루가 후다닥 다가왔다. 향수인지 화장품인지 처음 맡아보는 산뜻한 향이 훅 느껴진다.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내일 훈련 때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 주 동안 기다리느라 힘들었습니다.”
“뭔데?”
하루는 바로 과도를 들고 와서는 해수에게 느리게 찌르는 시늉을 했다.
“만약 상대가 이렇게 덤빌 때, 죽이지 않고 제압하려면...”
“잠깐.”
해수는 다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어 과도 대신 리모컨을 쥐여주었다.
“다시.”
“예, 이렇게 덤비면 어떻게 제압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입니까?”
“이게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구나.”
“예.”
해수는 2주간 교육생들을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하루에게 이해하기 쉽게 제압술을 가르쳐주었다.
하루는 확실히 몸 쓰는 것, 기억력까지 일반인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교육생들을 일주일 가르친 것을 하루는 하루 만에 끝낼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가 2주간 궁금해하던 것을 새벽이 될 때까지 성심성의껏 가르쳐주었고, 마침내 둘은 땀범벅이 된 채 서로 바라보았다.
“이제 없나?”
“예, 일단은, 기억나면 또 물어보겠습니다.”
하루의 표정이 한층 시원해 보인다.
“하루는 몸 쓰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그렇습니다. 그때는 정말 싫었는데, 지금은 좋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적성을 찾았구나.”
하루는 방금 배웠던 제압술을 재연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 그래서 다음에 도전해볼 직업도 정했습니다.”
“직업?”
“예, 경호원입니다. 안서은님이 대성 가드 경호원을 지원해보라고 했습니다. 서류는 통과시켜준다고, ‘면접은 알아서 잘 하시겠죠.’라고 했습니다.”
“경호원...”
하루의 충격발언에 해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다음날, 신해수는 이 주 만에 강진서 강수대로 출근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현장에 찌든 강수대보다는 경찰학교 생활이 훨씬 편했기에, 해수는 먹을 것을 사 들고 들어갔다.
쾅!
해수는 문을 거칠게 열고 경례를 하며 외쳤다.
“신고합니-”
“어 해수 왔냐?! 아우 반갑다 야!”
해수는 복귀 신고를 마치지도 못하고 오갱에 의해 말이 끊겼다.
오갱은 겉옷을 반쯤 걸친 채 입에는 빵을 물고 있고, 손에는 차 키와 무전기가 들려 있었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이거 받으십시오!”
그 뒤로 근육몬 막내가 인사를 90도로 박더니 해수에게 진압봉과 방검복을 건넸다.
이어서 팀장이 화장실에서 다급히 나와 바지를 추스르며 해수를 힐끔 보았다.
“어 그래! 돌격이 타이밍 죽이네! 어떤 미친 조폭인지 양아치인지 찌끄레기 새끼들이 시내 한복판에서 칼부림하고 있댄다. 빨리 가자!”
해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돌아왔다. 신고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밥도 제때 못 먹고, 똥도 제때 못 싸는 현장으로.
해수는 막내가 내민 방검복을 옆으로 치우며 어깨를 크게 돌렸다.
“이건 필요 없어, 가자.”
“예 알겠습니다!!”
해수의 뒤를 따르는 막내의 표정이 어쩐지 상기되어 있었다.
*
“우아악!!”
“끄악!”
“죽어 이 개새끼야!!”
“사,사,살려줘!!”
용수동 번화가, 바닥이 주황색 우레탄으로 되어있는 차 없는 거리의 정중앙, 노래방과 술집이 즐비해 있는 유흥가에 난리가 났다.
덩치도 크고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 수십 명이 서로 칼과 망치, 쇠파이프 등 흉기를 들고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있다.
일반인들은 무서워서 그 근처로 가지도 못하고, 그곳에 있는 가게 주인이나 종업원은 문을 걸어잠그고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때, 배가 귀엽게 볼록 나온 중년인이 헐레벌떡 달려오며 소리쳤다.
“야이 새끼들아 다 멈춰!!!”
그의 외침은 사자후처럼 크고 기세가 매서워 몇 명이 멈칫했다.
중년인에게 가까운 사내가 쇠파이프로 그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저씬 뭐야?”
“나? 나 아트박... 돌격대 대장이다 이 새끼야, 돌격대!!!”
중년인, 팀장의 외침에도 주변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사내가 피식 실소를 흘리며 쇠파이프를 들어올렸을 때.
“돌격!!!”
그의 외침과 동시에 어디에서 튀어나오는 건지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형사 세 명이 양손에 진압봉을 들고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해수가 가장 먼저 입을 쩌억 벌리며 포효했다.
“아아아악!!”
“우으아아악!”
“아악!!”
< #76. 복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