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구나... 오,빠, 돈 많구나?”
안서은의 말에 핑크머리 사내는 걸려들었다는 듯이 씨익 미소를 날리며 말했다.
“그으래! 돈! 돈 좋아하잖아? 이 오빠 돈 많아, 오빠 즐겁게 해주면 돈 쏟아진다?”
서은의 손목이 잡힌 모습에 하루가 살짝 인상을 썼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그리 나쁘지 않기에 가만히 두고 보았다.
서은이 핑크남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얼마나 많은데? 이 클럽 사줄 수 있어?”
“어? 어, 어후 그럼, 우리 아가씨가 통이 크네?”
핑크남은 농담이라 생각하고 바로 허세 섞인 대답을 했다.
그는 정신이 없어 서은이 몸에 두른 명품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운 여배우 같은 여자가 도발적인 눈빛으로 다가오는 것만으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럼 당장 사서 여기 사람들 다 내쫓아, 우리만 있게.”
“어? 하하, 농담이 심하다. 그렇게 단둘이만 있고 싶으면 우리 자리 옮길까?”
핑크남이 은근히 서은의 허리를 감쌌다. 서은은 그 손을 날카롭게 쳐내며 조금 전과는 전혀 달라진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그것도 못하면 꺼져, 얼굴도 성격도 안 되니까 돈부터 들이미는 건가?”
“뭐,뭐?”
서은은 황당해하는 핑크남을 무시하며 하루의 손목을 잡고 돌아섰다.
“하루씨, 우리 자리 옮겨요.”
“이런 씨발년이!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때, 핑크남이 서은의 머리칼을 확 움켜쥐었다.
서은의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다. 그녀는 예상했다는 듯이 바로 돌아서며 핑크남의 따귀를 때렸다.
짜악-!
동시에 하루가 구두굽으로 핑크남의 발등을 찍었다.
콱
“아악!”
그와중에도 머리칼을 잡은 손을 놓지 않자 서은이 발로 그의 다리 사이를 올려 찼다.
퍽!
“끄아악!”
하루도 지지 않고 핑크남의 새끼손가락을 잡아 확 꺾어 올리며 손날로 그의 목 뒤를 내리쳤다.
우득 팍!
“커헉!”
핑크남은 정신없이 이어지는 공격에 한 손은 가운데 다리, 한 손은 발등을 쥔 채로 바닥에 볼썽사납게 고꾸라졌다.
그 모습에 춤을 추던 사람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이 몸은 흔들면서 시선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제야 뒤늦게 입장한 김실장이 서은을 찾는 것이 보였다. 서은은 하루의 손목을 잡아끌며 테이블로 이동했다.
김실장은 서은을 발견했지만 아무런 일이 없는 줄 알고 약간 거리를 두고 지켜보았다.
“남자들은 너무 바빠 보입니다. 끊임없이 여자를 찾아다닙니다.”
“원래 그래요. 여자도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남자 찾는 애들 많아요. 눈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그런 여자 봤습니다. 마치 카멜레온처럼 눈동자를 자유자재로 움직였습니다.”
“풉, 그래서, 마음에 드는 남자는 있었어요?”
서은의 물음에 하루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에이, 있었으면서”
“없습니다.”
“정말요? 다양한 남자들 많이 있던데, 하루씨는 이상형이 어떻게 돼요?”
서은의 질문에 하루는 테이블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음... 어깨가 넓고.”
그 모습이 귀여워 미소 지으며 서은은 어깨를 한껏 올렸다.
“어깨가 넓고!”
“팔뚝이 강철처럼 단단하고”
“팔뚝이 강철처럼 단단하고!”
서은이 하얗고 가느다란 팔뚝을 드러내며 그녀의 말을 따라 했다.
“인상은 조금 무섭고”
“인상은 조금 무섭고...”
하루의 얘기를 듣다 보니 서은은 자신도 모르게 윤곽이 잡히는 것을 느꼈다.
“몸에 흉터도 좀 있고”
“그렇구나... 몸에 흉터가 있구나...”
“네?”
“아,아니에요. 확실히 그런 사람은 여기 보이지는 않...”
그때, 시커먼 남자들 무리가 서은의 테이블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저깄다! 저년들이야!”
“이야, 죽이네 진짜”
“아 이 새끼는 지 혼자 재미 볼려고 지랄하다가 쳐 맞았구만.”
“닥쳐 좀, 야, 야이 시발아, 나랑 얘기 좀 할까?”
서은은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술을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여기 클럽은 동물도 출입 가능한가, 어디서 개 짖는 소리가 계속 들리네.”
“허, 허 참 시발 진짜, 귀엽다 귀여워, 어이, 내가 오늘 밤에 니네한테 치료비 좀 받아야겠거든, 돈은 남아도니까 됐고, 육체치료로다가, 끌려 나올래, 따라나올래?”
덩치가 꽤 큰 남자가 네 명, 이 핑크남까지 다섯 명, 서은은 그의 더러운 언행에 미간을 좁히며 김실장을 힐끗거렸다.
멀리 떨어져 있으라니까 정말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게다가 어떤 여자 두 명이 다가와 말을 걸고 있으니 신나서 헤벌쭉 미소를 짓고 있다.
그래도 한달음에 다가올 수 있는 거리이니 소란이 일면 금세 와줄 것이다.
서은은 핸드백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어 그에게 던졌다.
“받고 꺼져.”
공이 몇 개인지 빠르게 확인이 되지 않는다. 일단 백만 단위는 넘어가는 것을 본 사내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나 핑크남은 수표를 쳐다보지도 않고 꾸겨 서은의 얼굴에 던졌다.
“이런 썅!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돼?!”
핑크남이 테이블을 엎으며 바닥에 술병이 떨어져 깨졌고, 유리조각이 튀어 서은의 다리가 베였다.
서은의 핸드백도 떨어져 소지품이 널브러졌다.
“아얏”
그제야 김실장이 이쪽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와 동시에 하루가 서은의 립스틱을 낚아채며 일어나 핑크남의 목과 턱 사이를 찔렀다.
퍽
“컥!”
핑크남은 무슨 독침에 맞은 것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하루는 멈추지 않고 그의 옆구리, 팔꿈치 안쪽을 립스틱으로 찌르고는 귀를 확 잡아당겨 무릎으로 얼굴을 찍었다.
퍼벅 퍽! 쿵-
핑크남은 정신없이 맞다가 뒤로 나자빠졌다.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마치 액션영화에서 합을 맞춘 것 같은 연타에 그 모습을 바로 앞에서 본 사내들은 물론 서은도 입을 쩌억 벌렸다.
그러고는 이내 상황파악을 한 사내들이 의리랍시고 달려들었다.
“이런 시팔!”
“잡아!”
덩치의 팔과 하루의 손이 교묘하게 스쳐가며 립스틱 끝이 그의 겨드랑이를 정확히 찔렀다.
푹
“끅!”
그가 경직된 사이 하루가 머리를 들어 올려 그의 턱을 들이받았다.
쿵!
그러고는 어깨를 잡아오는 덩치의 팔꿈치 안쪽과 쇄골, 귀밑을 차례대로 찍고, 그의 배를 밟고 뛰어올라 공중에서 몸을 돌리며 뒤에서 다가오는 사내의 턱을 발로 정확히 후려쳤다.
쿠궁-!
치마가 짧아 아슬아슬한 모습이 펼쳐졌지만, 덩치는 이미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졌다.
마지막 사내가 무엇을 하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하루와 눈을 마주치고 흠칫 떨었다. 동시에 뒤에서 달려오던 김실장이 그를 덮쳐 팔을 뒤로 확 꺾으며 말했다.
“대,대표님! 괜찮으십니까?!”
서은은 실장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경찰의 일을 돕는 사람으로서 작은 꺼리도 생기면 안 된다.
서은은 경찰을 불러서 상황을 설명했고, 다행히 그곳에서 핑크남이 테이블을 뒤엎을 때부터 동영상으로 찍은 사람이 있어서 진술이 유리해졌다.
핑크남은 중소기업의 망나니 아들이었고, 그를 따라온 덩치들은 폭력 전과가 있는 양아치들이었다.
작게나마 서은의 다리에도 상처가 생겼기 때문에 서로 합의를 했지만, 상대는 전과자이기에 처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게 뭔 개 같은 법이야! 야! 니네 서장 나오라 그래!!”
핑크남이 억울해하며 게거품을 물고 있을 때, 그의 옆에 있는 변호사의 전화가 울렸다.
“...예, 예 사장님, 도련님 여기 있습니다. 예 바꿔 드리겠습니다.”
“아빠! 지금 나 진짜 겁나 억울... 어? 네? 아...”
핑크남이 금세 온순해진 표정으로 안서은을 힐끔힐끔 보았다. 그러고는 전화를 끊고 고개를 푹 숙였다.
“죄,죄송합니다. 안서은... 대표님, 앞으로는 눈앞에서 보이지 않겠습니다...”
안서은은 다리를 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돈자랑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네, 네... 죄송합니다.”
핑크남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
경찰서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 김실장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서은은 눈을 반짝이며 하루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하루가 평범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살벌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하루씨 완전 멋있었어요. 탁탁! 무슨 액션영화 보는 줄 알았어요!”
“립스틱은... 죄송합니다. 새로 사드리겠습니다.”
서은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어차피 거의 다 써서, 이참에 새로 사야죠, 하루씨 것도 같이 살게요. 이거 색깔 마음에 들어요?”
하루는 고개를 돌려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 내일도 만날까요?”
하루는 다시 서은을 바라보았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서은이 매우 높은 위치고, 매우 바쁘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이렇게 시간을 내주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를 배려하여 거절하고 싶지는 않다.
“네.”
***
[젊은 경찰관이여! 조국은 그대를 믿노라!]
경찰 시험에 합격하여 교육을 받으러 온 경찰 교육생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문구가 중앙경찰학교의 입구에 크게 배치되어 있다.
중앙강당, 교육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대기하고 있다.
이번 기수의 대표 교육생인 김웅민은 깔끔한 얼굴에 훤칠한 키, 적당한 근육과 친절한 말투로 남녀 모두에게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의 옆에 앉아있는 산뜻한 단발의 여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들었어? 이번에 그 신형사님 오신대, 회칼 든 조폭들 네 명을 혼자, 아니 이번에 또 여덟 명을 맨손으로 상대한 그 신형사님!”
웅민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기대하며 찬양하는 이 어여쁜 동기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래 기사가 자극적으로 만들려고 부풀려지는 거야, 솔직히 기본적인 상식 조금만 있어도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걸 알 거야, 격투기 선수 챔피언이라고 해도 회칼 든 조폭 여덟 명은 혼자 상대 못 하지.”
“그런가? 하긴 기자들이 좀 과장을 하긴 하지.”
“의도야 어찌됐건 그래도 경찰이 믿음직스러운 이미지가 되는 건 긍정적으로 생각해.”
“맞아 맞아, 요즘 견찰이 아니라 경찰로 불리는 거 절반은 신형사님 지분이 있다고 봐, 내가 경찰들 이미지 좋게 만드는 기사들 쭉 모았었는데...”
그때, 기존 교관이 강당 문을 열고는 문을 잡아주어 누군가를 에스코트했다. 곧이어 기동복을 입은 남자가 강당 안으로 들어섰다.
신해수 관련된 기사나 동영상은 전부 멀리서 찍히거나 움직이는 사진이기 때문에 제대로 그를 본 것은 교육생들 모두 처음이었다.
은근히 해수를 질투하던 김웅민은 그가 강당에 들어서자마자 눈을 떼지 못했다.
저벅 저벅 저벅
기동복을 슬림핏으로 만드는 근육, 냉철함이 느껴지는 날카로운 눈빛, 강인한 턱, 그가 걸음을 옮겨 가까워질 때마다 교육생들은 숨이 턱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척
이윽고 해수가 그들 앞에 섰다. 해수는 교육생들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2주간 특별교관을 맡은 충남 강력범죄수사대 신해수 경사입니다.”
< #73. 립스틱 교육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