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수의 속삭임에 이혜정이 반쯤 홀린 눈으로 휴대폰을 스윽 내밀었다.
해수의 손에 그녀의 휴대폰이 쥐어지기 직전, 그녀가 갑자기 뒤로 쏙 뺐다.
“아니 안 되는데”
“잠깐이면 됩니다.”
“아, 안 돼요!!”
혜정은 돌연 휴대폰을 바닥에 내던지고는 발로 콱콱 야무지게 밟았다.
그녀의 돌발 행동에 형사들이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해수는 차분히 그녀의 다리를 치우고 망가진 휴대폰을 들어 전원을 켜보았다. 액정은 깨졌지만, 전원은 들어왔다.
-그 여자 휴대폰 해킹해서 뒤져봤는데요. 녹음파일은 별거 없던데요? 근데 문자에서 이상한 내용이 있긴 있더라고요.
정영수 말대로 녹음파일은 건질만한 게 없었다. 문자도 영수가 말한 문자는 보이지 않았다. 지운 것이 틀림없다.
“막내야, 이거 디지털 포렌식 맡겨.”
“네 선배님.”
혜정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린다. 포렌식으로 살려낸 문자 내용은 이러했다.
-니 폰으로 연락하지 말라고
다른 폰이 있다는 것이다.
이후 압수영장을 받고 햇님맨션을 뒤져보았지만, 대포폰은 나오지 않았다.
다음으로 오갱이 추적해서 알아낸 혜정이 진짜 집을 찾아가 뒤져보았다. 그곳의 화장실 수조에 비닐로 감싼 휴대폰을 발견했다.
“찾았습니다.”
“아주 매우 의심스러운 휴대폰이구만.”
휴대폰 안에는 녹음파일 몇 개가 고이 저장되어 있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 불리할 때를 대비하여 의뢰인의 약점을 잡아놓는다.
의뢰 당시의 녹음 파일이 가장 대표적이다.
해수는 그 자리에서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니까 그 새끼 확 엮어서 깜빵 보내라고, 요즘 법이 잘 되어있어서 니가 우기기만 하면 걔는 무조건 깜빵이야, 아니면 아예 확실하게 진짜로 하룻밤 자고 나서 신고하든가.
┗하... 내가 무슨 창년가, 그래서 얼마라고요?
-얘기했잖아, 3천
┗얼마라고요?
-돈은 해튼 졸라 밝혀, 5천, 완수금도 5천
┗나는 오빠가 이렇게 돈지랄 할 때 제일 섹시해 보이더라.
-미친년, 닥치고 일이나 깔끔하게 잘 해.
해수는 실소가 흘러나왔다.
적어도 두 세 다리는 건널 줄 알았는데, 이 목소리는 분명히 장강천 본인의 것이다. 그가 직접 이혜정에게 사주한 것이다.
내용을 보니 혜정은 전문가가 아니라 예전에 장강천과 만난 여자 중 한 명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허점도 많고 어설펐던 것이다.
장강천은 재벌 3세지만 머리가 영 멍청한 듯하다. 덕분에 일이 훨씬 쉬워졌다.
*
신해수는 취조실에서 혜정과 단둘이 마주했다.
“이혜정씨, 장강천이 왜 이런 일을 사주했는지 이유는 아십니까?”
“몰라요. 내가 그딴 것도 알아야 하나? 그냥 경찰이 마음에 안 드나보지.”
그녀는 이제 자포자기한 듯 보였다.
“내가 그의 경호원을 패고, 그의 파티를 망쳐서 망신을 줬기 때문입니다.”
해수의 말에 그녀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상체를 가까이했다.
“와... 대단하네요? 혹시 그 파티가 사장 취임 축하 파티?”
“맞습니다.”
“오빠 대박이다. 제 잘난 맛에 사는 놈이 고작 경찰한테 망신을 당했으니... 살인 사주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네.”
“물리적인 힘으로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어마어마한 자신감이시네요?”
“저는 이제 이 녹음 파일을 장강천에게 보낼 겁니다.”
해수의 폭탄발언에 혜정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쳤어요? 살인 나는 꼴 보고 싶어요?”
해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무고죄로 신고하지 않는 것도, 녹음파일이 장강천에게 가지 않는 것도 모두 혜정씨 선택에 달렸습니다.”
“협박이 쎄네요. 내가 뭐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매우 쉽습니다. 지금부터 장강천에 대해 아는 것들을 천천히 푸시면 됩니다.”
“그 변태새... 장강천은...”
혜정은 장강천을 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고, 이런 일을 사주할 만큼 친밀했었다.
“,,,그렇게 강제 수술시키고 버린 여자애도 내가 아는 애만 두 명, 아주 쓰레기에요.”
“그렇군요.”
그런 쓰레기에게 돈 받고 쓰레기 짓을 한 본인의 상황은 인지하지 못한 듯하다.
전과 6범 7범 되는 전과자의 공통점은 자신이 하는 일이 범죄라는 사실을 모른다.
혜정은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장강천을 제대로 보내버릴 만 한 건은 없었다. 나머지는 의심되어 수사를 해야하는 것뿐이다.
그가 연예인이라면 모를까, 만나던 여자가 임신하면 수술시키고 버리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이번 건도 살인청부도 아니고 성폭행 누명 사주는 끽해봐야 집행유예일 것이다.
“오늘은 일단 돌아가시죠, 휴대폰 고치시고, 며칠 안으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혜정은 수사에 협조적이기에 불구속 수사를 했다. 무고죄는 아직 기소하지 않았다. 안심을 줘서 정보를 최대한 뽑아먹기 위해서다.
“...정말 장강천한테 그거 안 보낼 거죠?”
“혜정씨가 협조만 잘한다면, 보낼 이유가 없습니다.”
혜정은 못 미더운 듯이 해수를 째려보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녀를 보내자 오갱이 다가와 물었다.
“뭐 좀 나왔어?”
“시시한 것밖에 없습니다. 좀 더 두고 봐야죠.”
“아쉽네... 아주그냥 저 년놈들 쌍으로 깜빵에 20년 처넣어야 하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해수도 아쉬움에 혀를 찼다.
***
“시팔... 갑자기 휴대폰은 본다고 지랄해서, 아우 내 쌩돈”
이혜정이 구시렁구시렁 거리며 골목길을 걷고 있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방금 고친 휴대폰을 꺼내어 액정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잠깐, 이거 기스 아니야? 이 새끼들 양아치처럼 생겼더니... 아닌가.”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휴대폰을 핸드백에 넣으려는 순간.
탁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치고 지나갔고, 손아귀에서 휴대폰이 빠져나가 공중제비를 돌았다.
타닥 탁탁 콰직!
휴대폰 모서리가 바닥에 찍혀 몇 바퀴 돌다가 액정 부분이 아래로 가게 떨어졌다. 그 떨어진 부분에는 하필 조그마한 돌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혜정은 충격에 입을 쩍 벌리고 순간 정지되어 있었다. 그녀가 두 무릎을 꿇고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방금 고친 액정이 다시 완전히 깨졌다.
손이 덜덜 떨린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옮겨져 방금 자신의 팔을 친 사람에게 향했다.
여리여리한 다리, 볼록한 골반, 쏙 들어간 허리, 여자다.
혜정은 이를 악물고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
“거기 멈춰, 이 썅년아!”
혜정의 외침에 여자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얼굴로 어디서 빠지지 않는 자신인데 위축될 정도로 예쁘다. 마침 잘됐다. 자신보다 예쁘니 분노가 더 끓어오른다.
혜정은 자신의 휴대폰을 들어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눈깔은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야? 이거 어떡할 거야?”
여자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혜정을 보았다가 휴대폰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뒤돌아섰다.
“이런 미친년이! 어딜 튀어!”
혜정은 살기 어린 눈을 하고 달려가 여자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여자가 뒤돌아섰고, 혜정은 분노를 가득 담아 그녀의 따귀를 갈겼다.
짜악-!
한 번 더 갈기려는 찰나.
턱-
여자에게 혜정의 손목이 잡혔다. 여자는 서늘한 눈으로 혜정을 내려다보며 그보다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정당방위다.”
“뭐?”
짜악!
혜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목은 자신보다 더 가느다란데 무슨 번개가 머리 위로 내리친 것처럼 충격적이었다.
“니가”
쩍!
“감히”
쩍!
“누굴 건드려?”
쩌억-!
네 번째 따귀에 혜정이 흰자를 보이며 바닥에 쓰러졌다. 입안이 다 터져서 피와 침이 섞여 흘러나왔다.
“사,사,살려...”
여자는 그녀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하고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 살려주는 걸 감사해라.”
짝 짝 짝 쩌억!!
혜정은 자신의 입 안에 치아가 뽑혀나가는 것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
삑-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주방에서 부추 부침개를 하던 해수가 주걱을 든 채로 마중 나왔다. 그 모습이 마치 무기를 든 것만 같다.
“어디 갔다가 오는...”
턱
해수는 하루를 보는 순간 정지화면처럼 얼어붙었다. 들고 있던 주걱은 바닥에 떨어트렸다.
“다녀왔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하루의 뺨이 빨갛게 부어있다.
처음에 하루를 구출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심지어 사시미칼을 든 조선족 네 명과 상대할 때도 작은 생채기도 나지 않았던 하루다.
그런 그녀가 뺨이 딱 봐도 누군가에게 맞은 손바닥 자국이 있자 해수는 그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기분이 매우 이상하다. 자신의 배에 칼이 박혀도 별 느낌이 없었는데, 그녀의 뺨에 손바닥 자국 하나로 심장을 바늘로 찌른 듯이 아파져 왔다.
해수는 자신을 지나쳐 욕실로 가려는 하루의 손목을 잡아챘다.
“누구야.”
해수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살기마저 느껴진다.
하루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괜,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누구야, 내가 찢어줄 테니까.”
가까이에서 해수의 분노가 적나라하게 느껴지는데, 하루는 그것이 왠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서 빤히 분노한 해수를 바라보았다.
하루의 시선을 마주한 해수는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부정적인 것이 아니기에 조금은 분노가 수그러들며 고개를 돌렸다.
“말하고 싶을 때 말해.”
“...네”
욕실에 들어선 하루는 해수가 잡았던 손목을 바라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
오토바이를 타고 퇴근하는 길, 리드 빌딩 지하 주차장에 들어설 때였다.
부아아앙-!
뒤따라오던 봉고차가 돌연 풀 액셀을 밟으며 해수에게 달려들었다. 해수는 다급히 액셀을 당겨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옆에 주차되어 있던 봉고차가 튀어나오며 앞길을 막았다.
끼이익- 쾅!
해수는 뒤에 있는 봉고차를 피하고자 오토바이에서 뛰어내렸다. 동시에 봉고차가 오토바이를 강하게 들이받았다.
드르르륵-
해수가 바닥에 몇 바퀴 굴렀다가 주차된 차를 잡고 일어날 때, 봉고차 두 대의 문이 열리며 마스크를 쓰고 손에 회칼과 장도리를 든 사내들이 우르르 내렸다. 그 수가 적어도 열 명은 되었다.
“쥐새끼 같은 새끼가, 잘도 피하네.”
“차는 피했는데, 칼도 피할 수 있을까?”
사내들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해수를 포위했다.
해수는 방금 떨어질 때 찌릿했던 왼손 손목을 부여잡았다. 아직 완치되지 않은 탓이다.
“저거 왼손 다쳤나 봅니다.”
“그렇네, 왼쪽으로 들어가면 되겠다. 얘들아! 생포 이딴 거 없다. 마음껏 쑤셔!”
“이야아!!”
“죽어!!”
해수는 왼쪽으로 들어오는 가장 가까운 사내를 향해 왼 주먹을 휘둘렀다. 해수의 주먹과 칼등 부분이 교묘하게 스쳤다.
뻐억-!
해수의 주먹이 사내의 얼굴에 정통으로 꽂혔다. 달려오던 속도까지 더해져 사내는 공중에 반쯤 떠올랐다가 쓰러졌다.
해수는 왼손을 털며 사내들에게 히죽 미소를 지었다.
“훼이크다 이 새끼들아, 존나게 반갑다.”
< #69. 훼이크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