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갱의 와이프가 다시 합류한 것은 배달음식이 도착하고 반쯤 먹었을 때다. 아이들을 모두 재운 후였다.
“형수님 수고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에이 아니에요. 생긴 게 죄도 아니고, 저는 훨씬 안심되는데요? 이런 분들이 지켜주신다니까”
막내가 반사적으로 이두를 불끈 쥐어짰다.
“감사합니다 형수님! 운동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막내야 목소리 낮춰라, 애들 깰라.”
“죄송합니다. 선배님.”
오갱이 막내의 이두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이런 분들이 아니야 얘네만 그래, 길거리 다녀도 이런 애들 보기 힘들잖아, 경찰서도 그래.”
오갱의 말에 와이프가 해수를 가리켰다.
“어, 나는 이분 봤는데? 길거리에서.”
“그래? 아니, 나 말고 딴 남자를 그렇게 유심히 봤어? 기억에 남을 정도로?”
“아니 뭐 워낙 피지컬이 남다르시니까, 그것보다는 옆에 계신 여자분 때문에 눈이 들어왔지, 모델같이 엄청 예쁘시던데?”
오갱 와이프의 말에 막내는 물론 닭 다리를 뜯던 팀장도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
“여어어자?”
“역시! 그래서 항공과 소개팅을 안 받으셨던 거군요!”
해수는 당황하여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그런 거, 그냥 아는 여자입니다.”
“나쁜 남자 스타일? 아는 여자라기에는 여성분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 그래서 더 눈에 띄었어요.”
“꿀이 뚝뚜욱??”
웬만한 일로는 눈썹도 꿈틀거리지 않는 해수가 난감해하는 모습은 팀원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팀원들이 짓궂은 표정으로 몇 번 맞장구를 치자, 오갱의 와이프가 먼저 끊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팀원이 둘이나 나갔다고 아이 아빠가 걱정 많이 했는데, 이렇게 든든한 분들이 들어오셔서”
팀장이 포도를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오갱이 돌격대장이었는데, 요즘은 몸을 너무 사려요.”
팀장과는 그래도 몇 번 봤는지 서로 편한 분위기다. 오갱 와이프가 팀장을 째려보았다.
“사려야죠, 애가 둘인데, 아 물론 두 분도 몸 항상 잘 챙기세요.”
“네, 형님 잘 지키겠습니다.”
“하하 그런 뜻이 되나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중, 팀원들의 가족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오갱의 가족이 겪었던 일을 꺼내게 되었다.
“예전에는 마음 많이 졸였는데, 요즘은 오히려 더 대담해진 것 같아요. 덤빌 테면 덤벼라, 이런 느낌? 호신용 스프레이도 항상 챙기고.”
툭 나온 그녀의 말에 팀장과 오갱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진다.
해수는 무슨 일이 있었음을 눈치챘지만 먼저 질문을 건네지는 않았다.
그때 팀장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에휴, 그때만 생각하면 진짜 열받지, 감히 형사 가족을...”
막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갱 형님 가족을 누가 건드렸었습니까?”
“아 뭐, 한 2년 됐나?”
“예, 재작년.”
“오갱이 옛날에 잡아넣은 놈 하나가 출소했는데, 아이들 어린이집에서 바깥놀이 할 때 사진 찍어서 제수씨한테 보내고, 동물 피로 죽인다고 써서 편지로 협박하고 그랬었지.”
뿌득
막내가 쥐고 있던 나무젓가락이 부러졌다. 그가 벌떡 일어서며 격분하여 외쳤다.
“형사 가족 건드리는 놈은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선배님!”
“막내야 왜 그래, 진정해 진정, 해수야, 얘 좀 말...”
팀장이 흥분한 막내를 유일하게 힘으로 말릴 수 있는 해수를 쳐다보았다가 할 말을 잃었다.
말없이 미간을 좁히고 있는 해수의 얼굴에서는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니, 사형은 너무 쉽지, 내가 손가락부터 잘근잘근 씹어..”
해수는 죽일 듯이 한 자 한 자 내뱉다가 오갱 와이프와 눈을 마주치고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해수가 고개를 숙이자 그녀가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막내가 조금 흥분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잘 해결됐지, 경찰들 니네처럼 가족 관련되면 게거품 물고 달려들잖아, 그놈 다시 깜빵 들어갔고, 우리는 이사 왔고.”
오갱의 말에 와이프가 덧붙였다.
“그래도 아이 아빠가 계속 형사 일을 하고 있으니까... 항상 조심하고 있어요.”
“그렇지, 내가 퇴근할 때 제일 조심하지, 그래서 무리해서 이 아파트 이사 온 거야.”
이 아파트는 일단 울타리가 소리 차단을 위해 5미터 높이로 되어있어서 넘을 수도 없고, 정문과 후문도 경비가 있었다.
“형사의 가족은... 그렇구나.”
막내는 생각이 조금 깊어진 듯했다. 혼자 사는 사람은 생각도 못 했던 일이다.
*
집으로 가는 길, 대리를 부르고 팀장은 담배를 태웠다.
해수는 생각이 복잡해 보이는 막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예 선배님.”
“아이스크림 먹을래?”
“옙, 좋습니다.”
둘이 편의점에 들어서자, 아르바이트생이 움찔 놀라는 것이 보인다. 해수 혼자서는 이런 일이 가끔 있지만, 막내와 같이 다니면 거의 백 프로다.
막내 우강철은 아이스크림을 계산하는 해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사실 머리가 복잡한 것은 오갱 가족의 일 때문이 아니다. 해수 때문이었다.
해수는 강철이 팀장이나 오갱보다도 더 경외하는 선배다.
그러나 얼마 전에 문고리를 부수는 주거침입과 해킹 관련 일 때문에 마음에 갈등이 생겼다.
과연 법을 어기면서 범인을 잡는 행위가 옳은 일인가? 경찰이 법을 어기고 범법자를 잡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자.”
“예, 잘 먹겠습니다. 선배님.”
해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휴대폰으로 문자 온 것을 확인했다. 안서은이 줬던 새로운 카드로 결제를 해봤더니 결제내역과 잔액 문자가 온 것이다.
그런데 잔액이 이상하다.
“음?”
해수는 손가락으로 하나씩 세어가며 다시 확인해보았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막내가 다가왔다.
“선배님, 왜 그러십니까?”
막내가 해수의 시선을 따라 문자를 확인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잔액이... 이,이십억?! 선배님 이렇게 부자셨습니까?!”
막내가 전에 없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 조금 여유가 있기는 한데...”
“정말 놀랐습니다. 보통 이 정도 여유 있는 분들은 사업하거나 부동산업 하지 않습니까?”
통장에만 쌩으로 20억이 있으면 본래 자산은 얼마일지 상상이 가지 않는 막내였다.
막내의 진심 어린 말에 해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 나쁜 놈은 누가 잡냐?”
“허,허억...”
해수가 당연한 듯이 툭 내뱉은 말이 막내의 심장에 꽂혔다.
막내의 갈등은 끝났다. 부리부리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참 경찰, 내가 찾던 바로 그 참 경찰이시다!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법은 악법이다!’
막내는 두툼한 두 손으로 해수의 손을 감싸 쥐며 소리쳤다.
“선배님! 평생 선배님을 따르겠습니다!”
“왜 이래 갑자기? 저리 가, 징그러.”
막내의 목소리가 아파트 내에 쩌렁쩌렁 울렸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눈치조차 주지 못했다.
*
다음날, 신해수는 출근길에 안서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해수씨는 어르신들과 비슷하네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어르신들이 일어나자마자 오늘 할 일부터 하잖아요. 해수씨도 저한테 할 말 있으면 꼭 아침 일찍 전화하시고, 물론 전 반가워요.
“...그때 주신 카드, 잔액 봤습니다. 저 경찰입니다. 처음부터 받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큰 돈 못 받습니다.”
-문제 안 됩니다. 내 개인자산으로 준 것이기도 하고, 세금신고도 했고, 명목도 있어요. 걱정하신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명목?”
-마케팅비, 해수씨는 대성그룹 마케팅팀 프리랜서 위치입니다. 물론 일 안 하는 명예직이 아니라 누구보다 훌륭하게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공무원은 다른 직업을 가지면 안 되는 조항이 있습니다.”
-업무에 지장 없으면 괜찮은 걸로 확인했습니다. 위에서 허락받아올까요? 오히려 업무와 상부상조를 하니 두 팔 벌려 환영할 텐데.
“안 됩니다.”
해수의 단호한 어조에 안서은이 잠시 조용하더니,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그거 안 받아주면, 서은이... 힘들어요.
‘이 여자가 왜 이러지.’
귀염상에 애교 넘치는 여자의 전유물인 자신을 3인칭으로 칭하는 말투를, 절대 도도와 품위 넘치는 그녀가 사용하니 그 참을 수 없는 어색함에 해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일단... 끊겠습니다.”
-통했나? 이런 스타일이셨나?
*
안서은은 해수와의 전화를 끊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입가에는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장난기가 걸려 있었다.
사나운 불곰 같은 남자를 놀리는 게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그 옆에 강실장은 생전 처음 보는 안서은의 모습에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
결국 해수는 아이스크림 결제도 취소하고 안서은에게 카드를 다시 돌려주었다.
아무리 합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돈이라고 해도, 앙심을 품고 파헤치면 걸림돌이 된다.
돈이 모자란 것도 아니기에 괜히 부스럼을 만들 필요 없다.
타닥 탁 탁-
해수의 고등학교 동창, 황장수의 대부업 사무실 지하에 위치한 체육관.
신소재 특수방검복을 입고 장갑까지 낀 해수가 고무 단검을 든 황장수와 손을 섞고 있다.
해수는 황장수가 휘두르는 단검의 면을 옆으로 쳐내며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밀었다.
탁 퍽-!
“억”
황장수가 가슴을 움켜쥐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이내 벌러덩 누웠다.
“나 안 해.”
해수는 구석에 놓인 물병을 집어 벌컥벌컥 마시고 장수에게 건넸다.
“체력 떨어져서 그렇다. 담배 끊어.”
“이 생활 하면서 담배마저 끊으면 무슨 낙으로 사냐?”
해수는 물을 마시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 옆에 앉으며 말했다.
“너, 깡패 그만두면 안 되냐?”
황장수는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다가 해수를 힐끔 보고는 손을 들어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말았다.
“너 깔때기 알지? 어디 구멍에 뭘 쳐넣을 때 쓰는 깔때기, 그게 입구는 아주 넓잖냐, 그래서 쑤셔 넣기 편하지.”
해수는 대답 없이 가만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런데 나올 때는? 반대로 존나 좁아, 이 바닥이 그래, 온갖 달콤한 말로 꼬셔서 들어오기는 쉬워, 멋있고, 돈 많이 벌고, 일 쉽고, 주먹 좀 쓰면 인생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근데 몇 년 지나면 씨이...발, 그냥 개 쓰레기 밑바닥 인생이라는 걸 깨닫게 되지.”
장수는 상체를 일으켜 물을 입에 담고 우물거리다가 링 밖으로 퉤 뱉었다.
“그리고,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깊이 들어온 상태야.”
해수는 그가 지금 이 길로 들어선 것을 후회한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그것이 중요하다.
“내가 도와줄게,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 좁은 구멍으로 다시 나오려면 방법은 하나.”
장수는 물병을 뒤집어 바닥에 물을 쏟았다.
“싹 뒤집는 수밖에 없어.”
“그럼 그렇게 하자.”
“미친놈, 말은 참 쉽다. 넌 몰라 인마, 빨리 가, 나 이제 일해야 돼.”
장수는 일어나 링 밖으로 나갔다. 해수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
햇살이 바삭바삭한 오후.
“꺄르르 꺄르르”
“우와악 나 잡아봐라!”
동네 놀이터에서 한가롭게 뛰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인다.
그런데 두 개밖에 없는 그네에 살구색 스웨터에 하얀색 긴 주름치마를 입은 젊은 여성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끼익 끼익-
그녀는 하얀 스니커즈 신발로 톡톡 바닥을 밀며 스크류바를 먹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뛰놀던 초등학교 저학년 남자아이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누나, 나 그네 탈래요.”
“싫어, 내가 먼저 왔어.”
“언제까지 탈 건데요?”
“8분 22초.”
초까지 정확하게 말하자 초등학생은 할 말을 잃고 뒷걸음질을 쳤다.
얼마 뒤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다가왔다.
“누나 예뻐요. 번호 좀 주세요.”
“모르는 사람 번호 노노”
그녀는 스크류바 막대기를 흔들며 헌팅을 거절하고는 그네에서 내렸다.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어.’
하루는 만족해하며 산뜻한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 문 앞에서 멈추었다.
다른 집에는 문틈에 피자집 메뉴판이 꽂혀있는데 자신의 집에는 메뉴판이 떨어져 있다.
집에서 나올 때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루는 미간을 좁히며 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갔다.
지이잉- 철컥
문이 닫히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냐, 우리 집 잘못 찾아왔나?”
“아가씨, 여기 신해수 형사 집 아니오?”
화장실, 현관문에서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 구석에서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이 어슬렁어슬렁 나왔다.
네 명, 그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서슬 퍼런 사시미가 들려 있다.
하루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둘러보며 경계했다.
“형님, 잘못 찾아왔나 봅니다. 어쩝니까?”
“뭘 어째, 얼굴 봤잖니, 열네 조각으로 썰어 드려라.”
콰직-
하루는 스크류바 막대를 반으로 쪼개었다.
< #53. 신해수 형사 집 아니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