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수는 지금 눈앞에 여신이 어떻게 자신의 아이디를 아는지 의문이 들기보다, 그 부끄러운 아이디를 알고 있다는 것에 창피함이 먼저 들었다.
“아...”
그러다가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휴대폰 화면을 발견했다. 같은 게임 화면, 그제야 이 여신이 자신을 보면서 왜 이렇게 인상을 쓰고 있는지 깨달았다.
영수는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저기요, 얼른 도망치세요.”
“뭐? 니가 도망가야겠지요.”
하루는 영수의 멱살을 잡고 편의점 뒤쪽 박스를 쌓아두는 으쓱한 곳으로 끌고 갔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고 턱을 들어 최대한 오만하게 그를 깔아보았다. 예전에 일진녀들을 따라하는 것이다.
“사과해, 나 치고 도망치고, 킹받게 한 거 사과해.”
영수는 안절부절 못하며 주변을 살폈다.
“아니, 네 제가 죄송해요. 근데 지금... 빨리 도망...”
저벅 저벅 저벅
“뭐야, 이 여자였어?”
“이야... 이게 웬 떡이야?”
모자에 마스크를 쓴 덩치 큰 사내 둘이 어슬렁 어슬렁 다가왔다. 그들을 보고 영수가 기겁했다.
척
그중 한 명이 영수의 어깨에 손을 얹히고 말했다.
“우리 영수 무슨 개소리 중이었어? 너 혼자 낼름 하려고 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요! 얼른 아이템 내놓고 가세요!”
“어허, 가긴 어딜 가, 영수야, 여자가 이쁘니까 없던 용기가 막 나?”
“아, 아무리 그래도 여자를 막 때리는 건...”
“에이, 누가 때린대? 예뻐해준다는 거지.”
하루는 가만히 팔짱을 끼고 그들이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사내 한 명은 영수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아래로 꾹꾹 누르고 있고, 또 한 명은 마스크를 턱까지 내리고 하루에게 다가왔다.
“야, 우리가 원래 현피 뜨기로 한 새끼는 반 죽여놓는데, 너는 특별히 선택권을 줄게, 여기서 뒤지게 맞고 아이템 뺏길래? 아니면 저기 저 모텔 가서 화끈한 대화를 나눌래?”
하루는 검지로 입술을 매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이런 짓 하지 마세요. 또 보이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턱스크 사내가 손을 뻗어 그녀의 후드를 붙잡았다.
터덕
동시에 하루가 마주 손을 뻗어 그의 팔과 교차시켜 한 바퀴 휙 돌리더니 겨드랑이를 손바닥으로 툭 밀었다.
“어어?”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하루의 후드를 잡지도 못하고 뒤로 두 걸음 물러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겨드랑이를 매만지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야, 너 뭐 좀 배웠어? 그래서 그따위로 콧대가 높았어?”
촤라락-
사내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공중에 휘둘러 펼쳤다. 경찰들이 들고 다니는 삼단봉이다.
그 모습에 영수를 괴롭히던 사내도 삼단봉을 뽑아 하루에게 다가왔다.
“이 언니 찜질 좀 해줘야겠네, 걱정 마, 이쁜 얼굴은 안 건드릴게!”
말과는 달리 사내는 바로 하루의 머리를 향해 삼단봉을 휘둘렀다.
“아,안 돼!”
영수가 소리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훙-
하루는 왼발만 한 발자국 옮기자 삼단봉이 허공을 갈랐다. 하루 앞으로 헛손질을 한 사내의 옆모습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하루는 휴대폰을 들어 모서리로 사내의 귀 밑을 찍었다.
콱-
“컥!”
“이런 씨!”
한 명이 귀 밑을 붙잡으며 고통을 호소하자, 구경만 하던 다른 사내가 다급히 봉을 휘둘렀다.
훙 훙
하루는 표정하며 어깨, 허리, 발 끝까지 방향이 뻔히 보이는 사내의 공격을 손쉽게 피하고는 무릎 뒤 오금을 발로 찍었다.
팍-
“엇”
사내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기우뚱거리는 사이 하루가 달라붙어 휴대폰을 휘둘렀다.
팍 팍팍 뻑!
훤히 들려있는 한쪽 겨드랑이, 목, 코를 차례대로 찍고 마무리로 무릎으로 그의 턱을 올려쳤다.
“억!”
사내는 단말마를 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때 목 뒤를 잡고 고통을 호소하던 사내가 일어났다.
하루는 그를 확인하지도 않고 발목을 틀고, 허리를 휙 틀면서 반 바퀴 돌아 발등으로 그의 목을 내리찍었다.
뻑!
정확한 뒤돌려차기에 사내는 일어서다 말고 다시 앞으로 고꾸라졌다.
“헐...”
영수는 그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하루가 다가오자 영수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
퍽-
하루는 서슴없이 손 끝으로 그의 목을 찍고, 허리를 숙이며 켁켁거리는 그의 얼굴을 무릎으로 찍어 쓰러트렸다.
하루는 대짜로 뻗어 골골거리는 영수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
무기를 쓰기는 했지만 싸우자는 도발에 넘어가 싸우러 온 것은 자신이다.
하루는 혼날 걱정에 마음을 졸였지만, 용기 내어 전화를 들었다.
“저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
사건 현장, 신해수는 10분도 되지 않아 그곳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사내 세 명이 줄지어 엎어져 있길래 하루가 드디어 사고를 쳤나 했는데, 두 명의 손에 삼단봉이 쥐어져 있는 것을 보고 하루를 칭찬했다.
“하루야, 상대가 저런 흉기를 너한테 휘두를 때는, 팔을 부러트려서 위험요소를 제거하는 게 중요해.”
“그래도... 됩니까?”
“그래도 돼.”
“알겠습니다!”
하루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런데 어쩌다...”
해수는 목을 부여잡은 채 자신을 힐끔힐끔 보고 있는 정영수와 눈이 마주쳤다.
“넌?”
“아... 혀,형사님, 하하”
해수가 신참 형사 때, 정영수가 중학교 시절에 마주친 적이 있다.
게임 해킹 프로그램를 만들어 피시방에 설치하여 게임을 해킹한 죄로 붙잡혔다가, 계정 주인들과 합의하고 마무리됐던 사건이다.
*
강진서 강력반 사무실.
“얼른 들어가라.”
“아 밀지 마세...”
팍 팍
해수는 정영수 외 두 명을 체포하여 사무실로 밀어넣었다. 그들을 보고 형사들이 물었다.
“뭐야 뭐야, 신형사 갑자기 나가더니 또 뭐 물어왔어.”
“하여튼 이래서 우리가 1팀 실적 따라갈 수가 없다니까?”
팀장이 다가와 반겼다.
“돌격아 우리 돌격아, 이 어린 영혼들은 누구?”
“피해자가 그린 몽타주 좀 주십시오.”
“어 그거 여기”
눈치 빠른 오갱이 해수가 아닌 정영수의 얼굴 옆에 세웠다. 팀장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뭐야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운이 좋았습니다.”
“운? 어, 저 아가씨?”
오갱은 뒤따라 쭈뼛쭈뼛 들어오는 하루를 한 번에 알아보았다. 역시 형사들은 눈썰미가 좋다.
해수는 하루와 동거 건은 말하지 않고, 이번 사건을 설명해주었다. 하루는 정당방위가 인정되어 금세 풀려났다.
“우리 팀은 조서 써야 해서, 이 아가씨 집에 모셔드릴 착한 형사?”
“저,저요!”
“제가 모셔드리겠습니다!”
“저 운전병 출신입니다!”
하루는 자원하는 형사들을 거부하고 홀로 걸어서 경찰서를 나섰다.
사건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았다. 범죄의 중심에 정영수가 있었으나 정영수에게 혐의를 씌우기에는 애매했다.
정영수가 아이템 거래, 현피 꼬시기, 바람잡이, 유인, 구타 외에 모든 것을 했지만 협박에 의한 일이었다.
온 몸에 구타 흔적과 녹음파일도 있었다.
그래서 정영수는 불구속, 일당 두 명은 유치장에 구속된 채 남은 수사가 진행되었다.
정영수 일당이 아이템을 판매한 돈은 대부분 회수할 수 있었다. 나중에 큰 건을 위하여 5억이 모일 때까지 아끼고 있었다고 한다.
“이상한데...”
“뭐가?”
“아닙니다.”
해수가 아는 중학교 때의 정영수는 꽤 영민했다. 폭행을 한 자들이 돈을 쥐고 있지만 쓰지 못한 이유, 의심할 것 없는 강제력의 증거, 모든 것이 착착 맞아떨어지는 것이 찝찝하다.
“저 좀 나갔다 오겠습니다.”
“사건 물어오지 마, 오늘 피곤해.”
해수는 정영수의 집을 찾아갔다. 계단이 많은 동네에 허름한 단층 집이었다.
똑똑
조용하다. 안쪽 창문에 불은 켜져있다. 해수가 가만히 기다리니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정영수의 목소리, 상당히 조심스럽다.
“나다.”
끼릭, 철컥
낡은 철문이 열리며 영수가 얼굴을 비췄다. 그는 올 게 왔다는 표정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들어오세요.”
집으로 들어가니 휴대폰 네 대에 컴퓨터에도 그 게임이 켜져 있었다.
해수가 그것들을 유심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때 봤을 때는 누구한테 당하고 살 애가 아니었는데.”
영수는 무심하게 귤을 내오며 대답했다.
“집까지 알아서 엄마 죽인다고 협박하는데 어쩔 수 없죠 뭐.”
“그래서, 복수에 성공한 기분이 어때.”
영수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잡혀온 둘을 취조한 결과, 이 범죄를 추진은 했지만 지금처럼 치밀하게 계획을 세울만 한 머리가 없었다. 오히려 들으면 들을 수록 영수의 계획에 은근슬쩍 끌려갔다는 느낌이 있었다.
훔친 돈을 그들이 가졌기에 범죄의 주도자라고 자기자신들이 생각하고 있을 뿐.
“...”
영수가 입을 떼지 못하고 가만히 해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내 포기한 듯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두 손을 내밀었다.
“잡으러 오셨나요?”
“아니, 증거가 없어.”
“당연하죠, 그럼 왜 오신 겁니까?”
해수는 잠시 침묵했다.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 왔지만, 막상 확인하니 마음이 어지러웠다.
영수는 그만의 방법으로 불의에 맞섰고, 어찌됐건 나쁜 짓을 주도한 것은 그들이다. 영수가 끌려다니다가 후에 복수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건 왜 지금도 붙들고 있나?”
영수는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대답했다.
“돈 벌어야죠.”
“차라리 그 실력으로 화이트해커를 준비하는 건 어때?”
“전과자를 누가 써줍니까? 신경쓰지 마십쇼, 게임이나 하면서 조용히 살겠습니다. 어차피 게임만 해도 먹고 살 돈은 법니다.”
영수는 귤을 까서 해수 앞에 놔두고 말을 돌렸다.
“그 여신하고는 어떤 사이입니까? 집주인님이라고 부르던데, 아, 그 분도 경찰이구나 ,어쩐지 실력이...”
해수는 귤을 그의 입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말고”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수의 어머니다. 그녀는 해수를 보고 놀란 눈을 했다.
“어머, 형사님이 여기까진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영수 또 일 쳤냐?”
“아뇨, 근방에 왔다가 잠깐 들렀습니다.”
“아 그래요? 왜 일어나 있어요? 밥 먹고 가세요.”
영수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밥을 차려줄 것처럼 밥상을 폈다.
“괜찮습니다. 어디 다녀오십니까?”
“아... 저기, 식당에.”
말하면서 영수의 눈치를 본다.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을 만지던 영수가 고개를 번쩍 들고 눈에 불을 켰다.
“아니 왜 또 식당을 가! 내가 돈 번다니까?”
“아들은 학교나 좀 제대로 다녀, 돈은 엄마가 알아서 벌 테니까.”
“엄만 당뇨 치료나 제대로 받으라고 좀!”
당뇨 얘기에 해수가 그녀의 발을 보았다. 들어올 때 걸음걸이가 조금 어색해서였다.
양말을 신었는데도 고름이 고인 것이 보인다.
“어머니, 실례지만 발 좀 보시죠.”
“예? 아니, 발은 왜...”
그녀가 영수의 눈치를 보며 양말 벗기를 꺼려했다. 그러자 영수가 재빨리 어머니의 양말을 벗겼다.
확인해보니 엄지와 검지 발톱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당뇨 합병증이다. 조금만 방치해두어도 절단을 해야하는 무서운 합병증이다.
“어...”
영수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어머니의 발이 이 모양이 되도록 알지 못했나보다. 듣기로는 범죄에 가담하고 외박을 밥 먹듯이 했다고 한다.
“이건 바로 치료 받으셔야 합니다. 절단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예? 아휴 웬 절단이래, 형사님 말도 무섭게 하시네.”
해수의 말에 영수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내,내가 그러니까 치료... 받으라고... 했잖아.”
영수의 눈이 촉촉해졌다. 남 앞이라고 눈물은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밖으로 나돌아다니느라고 어머니 발도 보지 못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해수는 결국 영수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식사를 하고 나서야 집을 나섰다.
배웅을 나온 영수가 해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저요. 저... 자백, 자백하려고 했는데, 진짜 자백하려고 했는데... 돈 벌어야겠어요. 저 감빵 가면, 울 엄마 어떡해요...”
그가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해수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영수야, 내가, 치료 받게 해드릴게, 가장 좋은 병원에서,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해수는 그의 귓가에 대고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자백해.”
사정이 딱해도 범죄 은폐는 안 되지.
< #48. 자백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