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찰이 너무 강함-35화 (35/255)

채연의 부름에 신해수가 돌아섰다.

“아... 채연아.”

해수의 흔들리는 눈을 마주한 채연은 확신했다. 이 돈없는 남자가 백화점에, 그것도 여성의류매장에 서성이는 이유는 백프로다.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동남철과 헤어진 소식을 듣고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3년 연애하면서 한 번도 매장을 찾아온 적이 없던 그였다.

“여긴 웬 일이야?”

해수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모습에 채연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뻔하지 뭐.’

채연은 짐짓 모르는 척 질문을 넘겼다.

“잘 지냈어?”

“똑같지, 범인 잡고...”

“진급은 했고?”

“응, 올해.”

“그래, 할 때도 됐지, 집은?”

“회사 근처에 원룸 구해서 살고 있어.”

“월세?”

“응.”

월세라는 말에 채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손을 뻗어 해수의 팔뚝을 스스럼없이 만졌다.

“몸은 더 좋아졌네?”

해수는 그 거침없는 손길에 팔을 비틀어 자연스레 뿌리쳤다.

‘풋, 뭐야, 그래, 니가 듣고 싶은 말 해줄게.’

채연은 두 손을 모으고 죄책감이 묻어나는 어투로 말했다.

“나, 동남철이랑 헤어졌어.”

동남철이라는 이름이 거론되자 해수의 미간에 확 주름이 생겼다.

그때.

또각 또각 또각

화장실 방향에서 눈에 띄는 여자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다가왔다. 하얀 블라우스에 리본넥, 하늘색 스커트로 산뜻한 옷차림의 여자였다.

채연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려는데 여자의 걸음이 멈추었다. 바로 해수 옆에서.

채연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도,동행이 있었구나?”

“어, 여기는 하루, 하루야, 그... 채연이.”

해수가 그녀를 소개할 말을 고르다가 그냥 이름만 붙였다. 하루는 가볍게 목례만 하고는 해수의 뒤에 바짝 붙었다.

‘뭐,뭐야, 모델?’

채연은 하루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하이힐은 딱 봐도 9센티인데도 해수와 키가 비슷할 정도로 크고, 군살하나 없이 늘씬하다. 화장도 안한 것 같은데 예쁨이 묻어난다.

‘이 짠돌이가 어디서 이런 여자를...’

해수의 반응을 보니 자신이 여기에 일을 하고 있다고 복수심에 잘 사는 것을 보여주러 온 것은 아니다. 애초에 해수는 돈 앞에서 찌질할지언정 그런 뒷공작은 하지 않는 성격이다.

하지만 베알이 꼬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 여자친구 옷 사러 왔구나? 우리 매장 들어와, 내가 잘 봐줄게, 오빠 여자 옷 잘 못 보잖아?”

“제가 잘 봐서 괜찮습니다.”

그때, 이번에는 뒤에서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연은 뒤돌아섰다가 화들짝 놀랐다.

‘아,안서은 이사?’

채연은 오너일가 안서은의 얼굴을 익히 알고 있었다. 가끔 백화점을 쓸고 가기 때문에 더 잘 알았다.

“해수씨 의외로 여성분 인맥이 넓네요?”

“좁습니다.”

“아하?”

“저,저는 이만,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해수가 안서은과 알은 체를 하자 더욱 당황한 채연은 다급히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녀는 매장 안에 숨어서 유리창너머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저렇게 셋이 어떤 관계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천하의 안서은이 질투의 감정을 비춘 것이다.

‘그사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저러면...’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여자 둘, 저 사이에 자신이 끼어있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내가 오징어가 되잖아...’

채연은 카운터 안쪽에 쪼그려 앉아 부끄러운 착각을 삼켰다.

*

해수의 집 앞.

강실장이 해수에게 쇼핑백을 한가득 넘긴다.

하루는 안서은과 강실장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진짜, 정말, 존... 감사합니다.”

“뭘요. 저도 오늘 재미있었어요. 종종 같이 쇼핑해요. 괜찮죠?”

그녀는 해수를 보며 허락을 구했다. 일단은 해수가 하루의 보호자 역할이니.

“음...”

해수는 하루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루는 고개를 숙인 채 볼을 붉히고 있다.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쇼핑 내내 이런 표정이었다. 말은 안 하지만 정말 좋았던 것이다.

그때 여고생들을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상대했던 일도 있고, 자신이 없어도 괜찮을 듯하다.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안서은이 잘 수습할 것 같은 믿음이 있다.

“좋다고 합니다.”

“그래요. 하루씨, 연락할게요.”

“...네.”

안서은을 보내고 집으로 올라가는 길, 계단을 오르는 하루의 발걸음은 미세하지만 평소보다 가벼웠다.

‘얘도 여자는 여자구나.’

*

그날 밤, 해수는 가만히 누워 창문너머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생소한 체험이 떠오른다.

‘리셋 능력이 바뀌었다?’

대략 한 시간 후에 일을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능력.

바뀐 것일까? 아니면 추가된 것일까?

하반신 마비가 되었던 여학생의 일 이후로 리셋 능력을 극도로 아꼈다. 그러다보니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지나면 알겠지.’

해수는 웬일로 자신의 소매가 아니라 쇼핑백을 끌어안고 자는 하루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

출근길, 주차장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헬멧을 쓰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신해수입니다.”

-신사장님! 어디십니까?

“출근하려고 합니다.”

-아, 잠시,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그, 뭐 별건 아니고, 잠시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차 한 대가 건물 앞에 정차하더니 구실장이 내렸다. 커다란 박스를 들고.

“그게 뭡니까?”

“이거, 제 선물입니다!”

무슨 선물인지 구실장의 얼굴이 많이 상기되어 있다. 해수는 헬멧을 벗고 박스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검은색 긴팔 티셔츠와 바지가 있었다. 그런데 모양새가 조금 이상하다.

“기억나십니까? 모창귀 사건 때 신사장님 크게 다치셔서 제가 경찰 장비 운운했던 거.”

구실장이 티셔츠를 꺼내어 해수에게 들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게 제가 정말 오랫동안 알아봐서 제작한 신소재 방어복입니다. 아주 조금이지만 신축성도 있고, 통풍도 잘 되고, 무엇보다 방어력이 뛰어납니다. 제가 샘플 받아서 부엌칼로 실험해봤는데, 웬만한 완력으로는 못 뚫어요.”

“음...”

대충 보기에는 기능성 운동복처럼 구멍 숭숭 뚫려있고 매우 얇다. 그런데 들어보니 보이는 것보다 무게가 꽤 된다.

해수의 반응이 미덥지 않자 구실장이 열심히 필요성을 피력했다.

“입어보면 안 입은 것처럼 편할 겁니다! 이게 무려 8개월만에 제작된 거예요. 여기 여기, 이 장갑도.”

동일한 소재에 마치 수술용처럼 손에 딱 맞는 얇은 장갑도 주었다. 가까이 보니 모두 범상치 않은 제품이라는 것은 알겠다.

“이거... 얼마입니까?”

“아, 하하하, 가격, 가격은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조심히 쓰세요. 사장님 덕분에 저도 돈 많이 벌었잖습니까?”

“얼마입니까?”

웃음기 없이 거듭 묻자 구실장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두 손가락을 들었다.

“2천?”

“2억이요.”

“허...”

해수는 가격에 놀라 구실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아무리 자신 덕분에 이득을 봤다고 해도 2억이라는 거금을 단지 선물로 주려고 쓸 줄은 몰랐다.

제작기간이 8개월이니 제작자까지 거의 1년은 걸렸다는 건데, 성의를 봐서라도 거절할 수가 없다. 사이즈나 용도 자체도 자신에게 맞춘 것이니 남에게 줄 수도 없다.

“감사히 쓰겠습니다.”

“하하, 그저 신사장님이 다치지 않으시기를 바랄 뿐입니... 어엇”

해수는 그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그 자리에서 바로 윗옷을 벗고 방어복을 입었다.

구실장은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몸으로 해수를 가렸다.

정말 기능성 운동복처럼 거슬림도 없고 통풍도 잘 된다.

해수는 바지와 장갑을 박스 안에 있는 보관 전용 가방에 넣어 챙겼다.

“이건 가서 입겠습니다.”

“아주 딱이십니다. 제가 다 뿌듯합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옙, 화이팅하십시오!”

구실장은 티없이 기쁜 표정이었다.

*

짧고 굵은 강력 1팀 전체의 휴가가 끝났다. 사무실로 들어서니 다른 팀 팀원들도 해수를 반겼다.

“돌격대장님 오셨어요?”

“와, 1팀 때깔 좋아졌네!”

“오셨습니까! 선배님!”

먼저 온 막내의 우렁찬 인사가 사무실을 울린다. 언제 봐도 조폭같다.

오갱이 해수와 하이파이브를 한 번 하고는 막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 막내 휴가 어떻게 보냈어?”

“저는, 여자친구와 여행 다녀왔습니다.”

“뭐?”

“뭐라고?”

오갱에 이어서 해수도 고개가 돌아갔다.

“우리 막내 여자친구도 있었어?”

막내가 소도 맨 손으로 때려잡을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네, 1년 되었습니다.”

“이야, 좋네, 좋아. 해수는...”

해수는 아무 말없이 자리로 돌아가 아령을 들었다.

“에효, 우리 해수가 범인은 잘 잡는데, 여자를 못 잡아, 막내야, 해수 어때?”

“신해수 선배님 훌륭하시다고 생각합니다!”

오갱이 새끼 손가락을 들어 흔들거렸다.

“그럼 니가 새끼 좀 쳐줘봐, 해수가 올해 서른하나인가?”

“전 괜찮습니다.”

“바로 여자친구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막내가 휴대폰을 들었다.

“막내, 난 괜찮다니까.”

“여자친구가 항공과입니다. 선배님에 걸맞는 근사한 여성분을 찾아드릴 자신 있습니다!”

띵 디링 딩딩

통화 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수는 아령을 내려놓았다.

“막내, 휴대폰 내려.”

“예 알겠습니다!”

한층 낮은 목소리에 막내는 재빨리 통화를 종료하고 휴대폰을 내렸다.

오갱이 손을 휘휘 저었다.

“에이 왜 그래, 범인만 잡지 말고, 와 항공과라니, 내가 결혼만 늦게 했어도...”

손톱을 깎던 팀장이 중얼거린다.

“제수씨 번호가 뭐더라.”

“오늘은 우리 사랑하는 와이프가 좋아하는 치킨을 사가야겠다.”

1팀이 재충전되어 밝은 분위기로 시덥잖은 농담을 이어가던 그때, 강력팀 사무실 문이 열렸다.

“팀장님 오셨습니까?”

“팀장님 오셨습니까!”

풍채 좋은 남자가 거만하게 턱을 들고 들어와 한 손을 휘적거렸다.

“어어, 그래, 그래요. 앉아요.”

그 남자를 발견한 해수의 눈동자가 커졌다.

오갱이 멀리서 남자를 확인하고 말했다.

“아, 우리가 휴가 나간 사이 2팀장 새로 들어왔다고 했지? 젊네?”

2팀장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1팀을 확인하고는 웃으며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경찰청에서 전입한 2팀장 동남철입니다. 앞으로 자알 부탁합니다.”

동남철이 한 손은 호주머니에 넣은 채 1팀장에게 악수를 청했다. 계급은 같으나 나이는 열 살 넘게 차이나는데 마치 하급자를 대하는 태도다.

1팀장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일어나 손을 맞잡았다.

“아 예, 반갑습니다. 곽수철입니다.”

동남철은 1팀장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가 놓고는 1팀원들을 둘러보며 선전포고하듯이 말했다.

“알아보니까 굵직한 사건은 1팀이 독점하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내가 왔으니까 앞으로 사건은 공평하게 분배할 겁니다. 1팀도 잘 조율해줄 거라 믿습니다.”

오갱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요?”

근육은 없어도 키는 해수와 비슷한 동남철이 오갱을 내려다보며 이죽거렸다.

“그쪽은 팀원 아닌가? 계급도 낮은데 첫날부터 하극상을 하시면 안 되지?”

오갱의 눈에 불이 이글거렸다. 딱 봐도 자신보다 어린데 하극상 운운하니 깨문 입술에서 피가 나올 지경이었다.

“하...”

오갱의 한숨소리에 해수가 일어났고, 동남철과 눈이 마주쳤다.

동남철은 전혀 놀라지 않는 얼굴이다. 해수는 그것으로 눈치 챘다. 동남철은 본래 절대 형사과에, 그것도 가장 사건이 많은 강진서에 올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온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드니 더 괘씸하다. 해수가 걸음 옮기려는 그때, 1팀장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자자, 사건 분배는 차차 얘기하고, 오늘은 인사하러 오신 거잖습니까? 들어가세요.”

팀장의 중재에 동남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아... 진짜, 내가 팀장님 체면 봐서 참는 겁니다. 팀원 관리 잘 해주세...”

턱 턱 턱

그때, 동남철은 해수가 빠르게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콱!

해수가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 눌렀다.

“아악!”

그 엄청난 악력에 동남철은 속수무책으로 옆으로 쓰러져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해수는 그의 귀에 입을 가까이 하고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동남철, 감히 니가 여길 와? 어떤 좆같은 생각으로 왔는 지 몰라도 형사과 팀장 자리는 너같은 쓰레기가 앉을 자리가 아니야,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조용히 짐 싸서 꺼져, 알았어?”

“너,너 씨발 이러고도 무사...악!”

으득

해수가 그의 쇄골을 더 강하게 눌렀다. 동남철의 날카로운 비명이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야 말려 말려!”

“야 돌격아!”

“팀장님!”

1,2팀 팀원들이 모두 해수에게 다급히 달라붙었다.

< #35. 새로운 2팀장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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