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여학생은 하루의 그 스산한 목소리에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렸다. 등골에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무섭다. 무섭지만 지금 물러서면 안 된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다른 여학생들의 눈치를 보았다. 이 정글은 약해보이면 끝이다.
“이 미친년이!”
여학생은 하루의 따귀 때리려고 팔을 크게 휘둘렀다.
하루는 주먹을 말아쥔 상태에서 엄지만 추켜들고 팔을 뻗었다. 마주 손을 휘둘렀다기보다는 여학생의 팔에 엄지를 갖다 대는 것에 불과했다.
콱
“아악!”
하루의 엄지가 여학생의 팔꿈치 안쪽을 정확히 찔렀다.
여학생은 팔에 구멍이라도 난 듯한 고통에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털썩 주저앉아 울었다.
“아아! 시팔 졸라 아파!”
그 모습에 다른 여학생 세 명이 일어나 하루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미친년, 별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 졸라 떠네.”
그 가운데에 노란 머리 여학생이 주머니에서 접이식 칼을 꺼내더니 하루 앞에서 칼날을 펼쳤다.
착
“아줌마, 죽고 싶-”
탁
여학생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칼이 자신의 앞에 붕 떠오른 것을 보았다.
어느새 하루가 손 끝으로 칼의 손잡이 끝부분을 위로 올려친 것이다. 칼은 여학생의 손아귀에서 쏙 빠져나와 공중에 떠올랐고, 하루는 그것을 가볍게 낚아채었다.
척, 스스 슥 착-
눈앞에 펼쳐지는 현란한 칼놀림에 여학생들은 멍하니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여학생들이 물고 있던 담배가 입술 바로 앞까지 잘려 있었다. 조금만 가까웠어도 코와 입술이 베였을 것이다.
“헙”
“어...”
하루는 칼을 고이 접어서 휙 던졌다. 그것은 고철 분리수거통에 정확히 골인했다.
그녀는 여학생들과 처음 마주쳤던 그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 담배 피면 집주인님이 싫어한다. 다른 데서 펴.”
그러고는 쿨하게 뒤돌아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여학생들은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얼어붙어 있었다.
“야... 내가 지금 뭘 본 거냐?”
“저,저,저게 썅 말로만 듣던 그 숨어 지내는 킬러 그런거야?”
“씨발 졸라 멋있어.”
“미친년들아 목소리 낮춰, 들릴라...”
여학생들은 동시에 몸을 움츠리며 소리를 낮추었다.
*
‘흠...’
전봇대에 숨어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신해수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폭력을 안 쓰고 넘어가다니... 이제 곧 홀로서기도 가능하겠어.’
삑삐삐삑 철컥
다다다닥-
문을 열자 하루가 한 손에 물티슈를 든 채로 해수에게 달려왔다.
그 속도가 빨라 해수가 본능적으로 손을 벌려 그녀를 받으려고 했는데, 코앞에서 급정거하더니 허리를 꾸벅 숙였다.
“오,오셨어요!”
방금 전에 보였던 카리스마는 온데간데 없고, 마치 장기여행을 다녀온 주인을 만난 고양이처럼 허둥지둥댔다. 생긴 건 여우상인가.
“잘 있었어?”
거의 일주일만이다. 하루는 눈을 한 번 온전히 마주했다가 금세 내렸다.
해수와 눈을 똑바로 마주하는 건 여전히 아직 잘 하지 못했다.
“네, 네...”
“잠깐.”
해수는 손으로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눈 밑 다크서클이 매우 심하다. 얼굴도 푸석푸석해졌다.
“피곤해보이네?”
“잠을 잘 못 자서...”
해수는 혀를 찼다.
“내가 없어도 제때 자고 제때 일어나.”
“넴.”
그날 밤, 하루는 해수의 소매를 붙잡고는 안도의 한숨을 작고 길게 내쉬었다.
제때 잠을 청했지만 이것이 없어서인지, 해수가 없어서인지 매일 밤 악몽으로 밤잠을 설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오늘은 편히 잘 수 있겠다.
*
다음날.
오늘은 휴가다. 1팀 전체가 이틀 휴가를 받았다.
쯉 쯉
해수와 하루는 아침부터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아 바나나나맛 단지 우유를 빨대로 흡입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아직 빨대를 꽂지 않은 바나나 우유가 세 개 더 있었다.
“신사장님! 어?”
구세주 실장이 멀리서부터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가 해수 옆에 있는 하루를 발견하고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여,여자친구분...? 모델인 줄 알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신사장님 자산관리를 맡고 있는 구세주 실장입니다.”
“여자친구는 아니고, 사정이 있습니다.”
누가 봐도 순하고 선한 인상의 구실장이지만, 하루는 그저 경계하며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런데 누구 또 기다립니까?”
“예, 한 분 더 오시기로 했습니다.”
“누구...”
말하기가 무섭게 흰색 세단이 편의점 바로 앞에 멈추어 섰다. 뒷좌석에서 흰색 바탕에 검은색 스트라이프 정장을 차려입은 안서은이 내렸다.
그녀를 발견한 구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서은은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기 전에 하루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그녀는 일단 묻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오셨습니까?”
“예,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자산관리사 구세주입니다! 전에 대성병원에서 한 번 뵈었었습니다!”
“네, 기억나요. 반가워요. 안서은입니다.”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실장이 허리가 끊어져라 숙이며 감사를 표한다.
하루는 구실장에게 했던 것처럼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눈은 계속 아래를 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이 아직은 힘든 것이다.
해수는 미리 준비해둔 바나나 우유를 안서은과 강실장에게 건네주고, 하루에게 카드를 주며 말했다.
“하루, 바나나우유 좀 더 사다줘, 투 플러스 원으로.”
“네.”
하루가 일어나서 편의점에 들어가자, 해수가 설명을 시작했다.
“저 아이가 오래전에 납치를 당했던 피해자입니다. 기본적인 사회생활도 불가하여 제가 임시로 데리고 있는데 예전 기억이 없어서 신분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원 등록을 위해 구실장님 도움을 받으려고 합니다.”
신원 등록 절차는 매우 복잡하다. 성과 본의 창설 허가, 가족관계등록부 창설 허가 심판 등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한다.
구실장이 다른 고객들 관리가 모두 끝나고, 오롯이 해수만의 개인 자산관리사가 되었을 때 개인비서처럼 활용하라는 말에 이것의 도움을 구한 것이다.
“아하...”
안서은 이사는 먼저 해수에게 볼 일이 있다고 하여 해수가 약속을 같은 시간에 잡은 것이다.
간결한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하루가 바나나우유를 가지고 왔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안서은이 눈짓으로 하루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지금 저 아가씨하고... 해수씨가 한 집에 사신다는 건가요?”
현실 적시에 해수가 움찔했다.
“일시적인 주소 공유 관계입니다.”
“동거한다는 거군요.”
“...예.”
구실장이 해맑게 박수를 쳤다.
“와,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아니, 그게 아닙니다.”
“그렇군요...”
안서은은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해수에게 건네었다.
“제 용건은 이거에요.”
고급스런 케이스를 열어보니 안에는 그보다 더 고급스러운 지갑이 놓여 있었다.
“이게 뭡니까?”
“열어보세요.”
그녀의 말대로 열어보니 지갑에 검은색 카드가 하나 꽂혀 있었다.
“저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신해수씨의 활약이 저희 회사 이미지에 이렇게 크게 영향을 끼칠 줄 몰랐어요. 그 금액이 점점 커지니까 양심에 찔려서요.”
안서은은 해수가 들고 있는 블랙 카드를 가느다란 검지로 가리켰다.
“그 카드에 제가 양심에 덜 찔릴 만큼의 가치를 금전으로 환산해서 넣어뒀어요.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고요. 이체도 문제 없으실 거예요. 받아주실거죠?”
“음... 네, 잘 쓰겠습니다.”
해수는 그녀가 재벌이니만큼 몇 천만 원 정도 넣어두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생활비로 쓰면 되겠다 싶어 간단히 수락했다.
안서은은 살풋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 이만, 일이 있어서.”
그 모습에 강실장과 김실장도 급히 우유를 마시고 그 뒤를 따랐다.
“들어가십시오.”
“아.”
그녀는 차에 타려다가 돌아서서 하루에게 다가가 명함을 건네주었다.
“도움 필요하면 연락 줘요. 재워줄 수도 있으니까, 아, 나중에 쇼핑이나 같이 해요.”
하루는 당황하며 해수의 눈치를 보았다가 명함을 받았다.
안서은 이사가 떠나고, 해수는 하루를 구실장에게 맡겼다.
“구실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 주십시오.”
“옙!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제가 또 법원이랑 친하잖아요. 자, 하루씨, 가실까요?”
“네, 네.”
하루는 구실장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대답하고는 그를 따랐다.
*
차 안, 안서은은 굳은 얼굴로 창문너머 하루를 바라보고 있다. 그 모습에 강실장이 물었다.
“이사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저 여자, 예쁘죠?”
“예? 아, 객관적인 시선으로... 비율이나 얼굴 대칭을 보면 미인상에 속합니다.”
강실장의 대답에 안서은이 엉덩이까지 가운데로 옮기고 고운 미간을 좁혔다.
“나보다? 나보다 예뻐요?”
“네? 어, 아, 다,당연히 이사님이 훨씬 아름다우십니-”
“늦었어, 앞이나 잘 보세요.”
그녀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조수석에 타고 있는 김실장이 살짝 몸을 틀고 엄지를 추켜올렸다.
“저는 원래부터 이사님이-”
“쉿”
“넵.”
***
침구가 여기저기 널려있는 지저분한 원룸, 끈적한 공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침대 위.
채연은 초점없는 눈으로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헤어지자.”
“어,엉??”
이불 안에서 채연의 다리를 주무르던 동남철이 벌떡 일어났다.
채연은 그를 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상위호환인 줄 알았는데, 하위호환이었어.”
“뭐, 뭐가? 뭔 말이야!”
상위 하위 운운하는 것은 남자를 말하는 것, 동남철은 불쾌한 누군가가 떠올랐다.
마침 채연의 시선이 동남철의 하체로 향했다.
“뭐해? 나가.”
철컥- 삑.
동남철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채연의 집 밖으로 쫓겨났다.
“이런 씨팔... 신해수, 신해수 이 새끼 때문이야, 이 새끼는 존재 자체가 걸림돌이야.”
철컥- 쿵!
동남철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다른 집 문이 열렸다가 한 여자가 그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빠르게 문을 닫았다.
그는 시바시바거리며 옷을 챙겨입고 계단을 내려갔다.
*
대성 백화점 브랜드샵.
유니폼을 입은 채연은 매장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신해수가 남자다운 면은 있었지, 생긴 것도... 동남철 그 새끼는 고동처럼 생겼고...’
채연은 휴대폰으로 해수의 캐톡 대화방을 켜놓고 고민했다.
‘연락 한 번 해볼까? 내 말이라면 꿈뻑 죽었었는데, 아냐아냐, 그래도 그 짠내나는 연애를 또 할 순 없지, 서른 넘도록 대출금만 갚으면서 여자친구 집에 얹혀 살던 놈이야... 정신 차리자 채연아, 세상에 남자는 많...어?’
그때, 채연의 눈에 매장 밖 복도에 서 있는 어깨깡패가 보였다.
뒷모습만 봐도 확신할 수 있었다. 태평양같은 등짝에 옷을 대충 걸쳐도 태가 나는 기럭지, 울긋불긋 여기저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근육.
한동안 배 나온 동남철만 보다가 해수를 보니 눈이 정화되는 듯했다.
방금 했던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채연은 전신거울로 자신의 미모를 체크했다.
마침 해수는 어떤 옷보다도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가장 좋아했고, 오늘도 미모는 그를 껌뻑 죽일 자신이 있었다.
채연은 전투태세를 취하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해수...오빠?”
그녀의 부름에 해수가 돌아섰고, 채연을 확인하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34. 휴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