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벗고...”
신해수는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지금 알았다. 그녀는 신발도 없었다. 지금 신고 있는 것은 병원 슬리퍼였다.
해수는 그녀의 발을 보느라 잠시 생각이 멈추어 현관에 그대로 방치했다.
킁 킁
그때 돌연 어떤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지독한 피 냄새와 퀴퀴한 곰팡이, 찌든 먼지 냄새가 뒤섞여 코를 마비시켰다.
해수는 고개를 돌려 검지로 욕실을 가리켰다.
“일단 씻어.”
여자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종종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그녀가 발을 딛을 때마다 하얀 바닥에 흙먼지 얼룩이 찍힌다.
해수는 그 끔찍한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여자가 씻으러 들어가고, 해수는 그 사이에 씻을 쌀의 양을 1인분 더 추가하였다.
*
쏴아아아-
여자는 샤워기를 틀고 천천히 욕실을 둘러보았다.
곰팡이 하나 없이 깔끔한 바닥, 핥아도 될 정도로 새하얀 벽면이 사면을 채우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하다.
슥
“헙”
빙글빙글 돌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샤워기 물에 몸이 닿았다.
그런데 물이 따뜻하다. 지금껏 항상 뼈가 시릴 만큼 차가운 물로만 씻어서 씻는 물이 따뜻할 수도 있다는 정보를 잊고 있었기에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여자는 손 끝을 샤워기 물에 살짝 대고 한참을 있다가, 천천히 닿는 부위를 늘려갔다.
‘따뜻해...’
엄마의 뱃속에 다시 들어온 것마냥 따스함이 온 몸을 감싼다.
여자는 이대로 몇 시간이고 있고 싶었지만, 손이 쭈굴쭈굴해지는 것을 보고 해수에게 혼날까 싶어 그만 씻고 나왔다.
“다 씻었으면...”
해수는 이번에도 말을 하다가 본의아니게 끊었다. 그녀가 이전에 입고 있었던 나시티와 속옷만 입고, 그것도 물로 빨아서 마르지도 않은 것을 입고 나온 것이다.
그녀가 내민 손 위에는 해수의 활동복 점퍼가 곱게 접혀 있었다.
매우 마른 몸이지만 일반 여성과는 다르게 군데군데 잔근육이 잡혀 있고,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수많은 흉터들이다. 얼마 안 된 것도 있고 오래된 것도 보인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하겠다.
“그건 버리고, 이거 입어.”
해수는 자신의 옷 중에 가장 작은 트레이닝복을 꺼내어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해수에게 트레이닝복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입었던 옷을 벗고 환복했다.
해수는 시선을 의식적으로 돌렸다.
“옷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갈아 입어.”
“네...”
그녀는 오랫동안 입었던 다 찢어진 나시티와 속옷은 해수의 말대로 쓰레기통에 미련없이 버렸다.
그녀는 못 먹고 자란 것치고 키가 170은 되어 꽤 큰 편인데도, 해수가 준 옷은 커서 후즐근해보였다.
해수는 그녀를 보지도 않고 식탁에 밥상을 차리며 말했다.
“앉아.”
2인 식탁이라서 해수의 맞은편밖에는 자리가 없었다. 그녀는 해수와 마주앉아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
밥그릇에 봉긋하게 올라온 새하얀 쌀밥, 계란옷을 입힌 햄, 그 위에 뿌려진 케찹, 잘 구워진 김, 돼지고기가 들어간 빨간 김치찌개.
여자는 이런 밥상이 매우 어색하여, 감히 손을 대기가 힘들었다.
그때 해수가 먼저 숟가락을 들고 밥을 퍼 먹었다.
그곳에서는 숟가락과 젓가락은 주지 않았다. 어디선가 나온 음식물 쓰레기를 갈아서 그릇에 주었고, 그저 마시기만 하면 되었다.
숟가락, 젓가락질을 해본 지 10년이 넘은 것이다.
그녀는 조심스레 젓가락을 들고, 해수가 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며 따라서 햄을 집었다.
툭
그것을 입으로 가져오다가 떨어트려 케챱이 식탁에 묻었다.
그 모습에 해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고, 여자는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슥
욕설, 또는 주먹질이 날아올 줄 알았는데, 그녀 앞에 해수가 집어준 햄이 있었다. 해수가 햄을 그녀의 숟가락에 올려준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반전에 그녀는 뇌가 고장난 듯이 멍하니 있다가, 숟가락을 들어 햄을 한 입 먹었다.
“흐으...흡”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가 입밖으로 나와 다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맛있다. 엄청나게 맛있다. 정말 너무 황송하여 눈물이 차올랐다.
바닥이 따뜻한 집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에도, 온수로 샤워를 할 때에도 이 정도 감동은 아니었다.
여자는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해수가 싫어할까 꾹꾹 참아내며 햄을 씹었다.
해수는 처음에는 그녀가 자신이 차린 밥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 숟가락을 들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 입이 들어가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는 그녀가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조금이나마 상상이 되었다.
그저 귀찮고 민폐인 상대에서 조금은 안쓰러움이 피어났다.
“뭐라고 부를까?”
해수의 첫 질문에 그녀는 젓가락과 숟가락을 둘 다 내려놓고 머뭇거렸다.
“계속 야, 너라고 부를 순 없잖아.”
그 사람들은 10년을 그렇게 불렀는데, 정말 이 사람은 다르구나. 마음에 벽이 아주 조금 금이 생겼다.
그녀는 정말 귀를 가까이 대어야만 들릴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입을 열었다.
“...하루”
여자는 아린이가 귓속말을 하던 때가 떠올랐다.
-이제 언니 이름은 하루야, 언니나 나나 하루만 더...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아린은 언젠가는 나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항상 품고 하루하루 버텨왔다.
그리고, 그녀의 희망은 이루어졌다.
이름에 얽힌 스토리가 해피엔딩이기에, 하루는 이 이름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래.”
식사를 마치고, 다시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지나 잠을 청할 때가 되었다.
해수는 괜히 왔다갔다하며 무언가를 열심히 고민하다가 구석에 쪼그려앉아 있는 하루에게 다가왔다.
“저기서 자.”
해수가 침대를 가리켰다. 하루는 물끄러미 침대를 보더니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음 말고.”
해수는 쿨한 척 바로 일어나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하루는 무릎을 접고 쪼그려앉은 채 불 꺼진 방 안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자신에게 지금 주어진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는다. 실감이 안 난다.
병원에서는 부모와 상봉한 아린이 참 부러웠는데, 지금은 부럽지 않았다.
아까 식사 때 음식을 먹으며 느꼈던 그 행복감이 떠오른다. 씻을 때 따뜻한 물이 생각나고, 이 집주인이 주었던 새옷을 입을 때의 부드러운 촉감, 좋은 냄새도 떠오른다.
슥 슥
하루는 손으로 바닥을 문질렀다. 여긴 바닥도 딱딱하지 않고 따뜻하다.
정말 뭐 하나 좋지 않은 것이 없다. 너무 좋아서, 누군가가 빼앗을까 두렵다.
‘어...’
그녀의 시선이 창문에 닿았다.
창문너머로 쉼의 빛을 내는 초승달이 비췄다. 방 안에서 창문으로 밖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초승달을 보는 것도, 모든 것이 감동이었다.
‘하루만이라도 더 이런 날이 있었으면 좋겠어... 내일 하루만이라도.’
그 지옥으로 다시 끌려가더라도, 오늘을 떠올리며 버틸 수 있게.
*
어둠이 짙어지는 새벽, 하루는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해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해수는 태연한 척하지만 그 살벌한 눈빛을 낼 수 있는 여자가 집 안에 함께 있으니 잠이 쉬이 오지 않아 경계 상태로 깨어 있었고, 그녀가 다가오자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암살 시도인가...'
해수가 실눈을 뜨고 반격태세를 갖추는 동안, 하루는 무릎 걸음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와 그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돌아서서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더니, 손을 뻗어 해수의 옷 소매 끝을 잡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고르게 변했다.
새근 새근
무슨 애착인형마냥, 해수의 옷 소매를 잡으니 마음이 편안해진 것이다.
그녀는 해수를 처음 봤을 때, 그가 했던 말과 행동이 뇌리에 깊게 새겨졌던 것이다.
-잡아.
-놓치지 마.
그 소매를 잡고 따라간 세상은, 그녀에게 구원이었다.
해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다가 참고 가만히 잠을 청했다.
***
다음날.
하루는 신해수가 자고 있는 침대 옆에 붙어 쪼그려 앉은 채로 잠을 자다가 실 눈을 떴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눈을 크게 떴다.
꽤 오래 잠에 들었던 듯하다. 벌써 창문 밖은 초승달이 사라지고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하루는 잠에서 깨어나면 어제의 그 방이 아닐까 봐, 어제 경험했던 것들이 모래처럼 흩날리고 사라질까 봐 눈을 뜨기가 무서웠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없었던 따스함이 하루를 반기고 있었다.
저기 등을 보이며 요리를 하고 있는 남자가 지금은 꿈이 아니라고 일깨워준다.
"일어났으면 앉아."
하루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식탁 앞에 앉아 오늘도 황송한 아침밥을 먹었다.
냠 얌
해수는 출근한 준비를 하고 신발을 신으며 그녀에게 당부했다.
"절대 나가지 말고 집에만..."
새삼 말문이 막혔다. 10년 간 갇혀있던 사람에게 또 집에 감금되어 있으라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후..."
해수는 미간을 좁히며 하루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신발을 벗고 리모콘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가 당황한 눈으로 해수를 바라본다. 리모콘도 거꾸로 든 채 가만히 있다.
“어떻게 쓰는 건 지 모르는... 모르는 구나.”
해수는 그것으로 TV를 틀어주고 채널 돌리는 법과 음량 조절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나 올 때까지 집에만 있어, 어디 나가지 말고.”
해수는 그녀가 이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그녀는 나이에 맞지 않게 천진난만한 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해수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
삑, 철컥-
해수가 나가고, 문이 닫히고, 몇 초가 지나서야 하루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TV 앞에 앉았다.
***
신해수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하지, 원룸 하나 구해주고 혼자 살게 놔둬? 일자리 구해주고 타인에게 맡겨?’
다 걸린다. 자살할까 봐, 남을 해칠까 봐, 그렇다고 집에 계속 데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어서 난감하다.
“뭔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 오늘 진짜 막내 온다는 거 들었지?”
팀장의 말에 오갱이 해수의 어깨를 주물렀다.
“신경사 이제 막내 탈출했네.”
“하하...”
해수가 멋쩍게 웃었다. 오갱은 지구대 시절의 습관 때문에 해수에게 막내라고 부르지 않았다.
팀장이 손가락으로 인중을 긁으며 말했다.
“이제 뭐라고 부를까? 내주서에서는 뭐라고 불렀어?”
“신똘입니다.”
“신똘? 혹시, 신씨 성 또라이를 줄여서 신똘?”
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형사들이 별명은 참 잘 짓는단 말이야, 그래도 우리 돌격대장한테 똘은 좀 그렇고...”
“신돌 하면 되겠네, 신돌.”
오갱의 말에 팀장이 손가락을 튕겼다.
“오갱 니가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구나, 그래, 이제 신돌이다.”
막 새로운 별명을 짓자마자, 3팀 형사가 자료를 가지고 들어오며 말했다.
“1팀 막내 받아라~!”
“오 드디어 막내!”
“막내다!!”
터벅, 터벅, 터벅.
3팀 형사를 따라 덩치 큰 근육덩어리가 들어온다.
“막내...야?”
조폭인 줄 알았는데 정복을 입고 있다. 키도 해수보다 조금 더 크고 뇌까지 근육으로 찼을 것 같은 자다.
“순경 우강철! 강진서 강력1팀으로 전입을 신고합니다!”
팀장은 천천히 엄지를 추켜올렸다. 오갱은 일어나 그를 격하게 반겼다.
“오... 우리팀은 이제 강력팀이 아니라 돌격대다.”
“형님, 회식합시다!”
***
[고기 한판]
초저녁, 삼겹살 전문 가게.
동동파는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흥 조직이다. 두목 김동동은 사기 진작을 위해 고기집에서 회식을 하고 있었다. 조직원은 아직 열 명이 넘지 않았다.
“우리가 말이야, 아직 영업장이 하나도 없지만, 이 주먹만큼은 어디에도 안 꿀릴...”
그때 옆 테이블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막내를 위하여!”
“위하여!”
“아 형님 첫 잔은 원샷 아닙니까?”
“아 싫어, 니가 나이 먹어봐.”
김동동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앉아있는 사람들 모두 덩치가 제법 있다.
다른 조직원들도 그들을 보며 신경썼다.
“어디 식구야, 저것들은.”
“질 수 없지, 얘들아, 잔 들어라!”
김동동이 잔을 들자 다른 조직원들이 따라서 높이 들었다.
“고암동을!”
김동동의 선창에 조직원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피바다로 만들자!!!”
신흥답게 패기있는 구호, 동시에 저쪽 테이블 네 명이 벌떡 일어났다.
< #27. 길고양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