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미는 허리를 꾸벅 숙이고 재빨리 제 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반쯤 얼굴을 가린 채 그들을 지켜보았다.
동부지점장은 신해수와 구실장을 데리고 VVIP 상담실로 들어갔다.
‘뭐야 대체...’
은미의 눈이 빠질 것처럼 커졌다. 같이 밥을 먹었던 동료도 그 말을 듣고 달려와 호들갑을 떨었다.
“뭐야 뭐야, 은미씨 남자 제대로 잡았네?”
은미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몰라, 모르겠어, 내가 왜 그랬지, 젠장.”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잠시 후, 그 둘이 상담실에서 나왔고, 지점장은 맞이할 때보다 더 그들에게 굽신굽신하며 배웅을 했다.
“...확실히 관리하겠습니다.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은미는 그가 나가는 모습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지.’
그녀는 바로 해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보니까 반가웠어요. 밥이나 한 번 먹어요. 이번에는 제가 살게요.]
‘좋은 말 할 때 물어라.’
속마음과 달리 몸은 솔직하게 초조하여 손톱을 뜯었다. 그때, 5분도 안 되어 전화가 왔다.
-경장 신해수입니다. 누구십니까?
예상치 못한 물음에 은미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아 뭐에요. 장난 치는 거에요?”
-아, 김은미씨군요. 죄송합니다. 그날 연락처를 삭제해서 못 알아보았습니다.
“...예? 삭제?”
-예, 연락처에 불필요한 번호는 남겨두지 않는 편이라서
“불필요한 번호...”
-메세지는 저에게 잘못 보내신 겁니까?
"아... 예."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그럼, 좋은 남자분 만나기를 바라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뚝
은미는 멍하니 있다가 끊긴 전화를 한 번 보았다. 불필요한 전화번호라는 말에 도저히 식사 한 번 하자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녀는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
“하, 하, 하하 참내 진짜... 누가 경찰 아니랄까봐 참 칼같네, 칼같애!”
***
구실장과 헤어진 신해수는 전에 구매했던 오토바이를 다시 구매했다. 다행히 수사 보상금이 나와 손해가 크지는 않았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전에 살던 고향, 송원시로 향했다.
“...전화드렸던 신해수 경장입니다. 지금 사건 파일 볼 수 있을까요?”
해수가 고향을 찾은 이유는 다름아닌 송원 경찰서를 들르기 위함이었다.
그곳은 아버지의 사건을 담당했던 곳이다.
“아 예, 오랜만에 뵙네요. 그런데 이거... 전에 어떤 분도 열람하셨어요.”
“예? 누가 보고 갔습니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살로 깔끔하게 마무리가 된 사건을 12년 만에 누가 살펴보았을까?
“그럴 줄 알고 적어놓았습니다. 안 오시면 어쩌나 했는데,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영철...경위.”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도 아니고, 처음 듣는 이름이다.
해수는 사건 파일을 한 번 더 훑어보고, 바로 박영철이라는 사람의 휴대폰으로 연락을 취했다.
-예, 박영철입니다.
삶에 지친, 느린 목소리.
“신해수입니다.”
-아하... 언젠가 연락 올 줄 알았는데, 지금이었구만.
그는 해수를 알고 있는 듯했다.
*
박영철은 해수를 자신이 근무하는 곳으로 불렀다. 그는 시골 한적한 곳의 파출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진한 눈썹에 지금은 세월이 흘러 옅어졌지만 고집이 꽤 강할 것 같은 인상의 중년인이다.
그는 해수에게 믹스커피 한 잔을 내밀고는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맞네, 정석이형 얼굴이 있네.”
“저희 아버지를 아십니까?”
“같은 팀에 있었지.”
해수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아버지와 같은 팀이던 사람들은 모두 만났었다.
“봰 적이 없습니다.”
“그렇겠지, 내가 팀에서 나가고 얼마 안 돼서 일이 생겼으니까.”
“아...”
“정석이형과 친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거야, 그 형은 절대 자살할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다 손 놓고 있으니까 그때부터 파봤지.”
박영철은 사건 당시에도 경찰 신분이었다. 분명 해수보다 많은 것을 찾았을 것이다.
“알아낸 것이 있습니까?”
영철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돌려 해수와 눈을 마주했다.
“자네는, 자네 아버지가 정말 타살이라고 생각하나?”
해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대답에 영철은 커피를 한 번에 털어 마시고, 종이컵을 구기며 물었다.
“용의자 특정법 기초는?”
“범행동기를 찾는 것입니다.”
“네 아버지의 자살에 용의자가 있던가?”
해수는 문득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가 떠올랐다. 그러나 아무런 증거도 없다.
“없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증거를 찾는 것입니다.”
“증거도 없었잖아.”
“다음은 피해자를 조사하여 용의자를 특정합니다.”
묻지마 폭행에는 해당되지 않는 방법이다.
해수의 대답에 영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차로 걸어가더니, 차 안에서 종이백을 하나 꺼내어 해수에게 건네었다.
“네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봐라, 이건 네 아버지가 그때 맡았던 사건과 내가 개인적으로 조사했던 자료들이야.”
해수는 벌떡 일어나 그것을 소중히 받아들였다. 아무리 친하다고 한들 이미 종결난 사건을 십 년 넘게 파고 있었던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철은 손을 휘휘 저으며 담배를 한 대 물었다. 해수는 재빨리 라이터를 꺼내어 불을 붙여주었다.
“감사할 필요 없어, 다 알려주는 게 아니니까, 숙제야, 그 자료 파보고 의심스러운 것들 추려서 가져와봐,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찾지 못하면 어차피 알려줘도 소용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연락 드리겠습니다.”
해수는 그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
신해수는 박영철에게 받은 자료를 집으로 가져가 밤새 붙들고 있었다.
해수의 아버지 신정석이 사고났던 당시에 맡았던 사건들은 해수도 이미 한 번씩 찾아보았었다.
그러나 이 자료는 훨씬 디테일한 정보들이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 신정석의 개인적인 행적도 조사되어 있었다.
해수는 여기에 힌트가 있다 생각하여 모든 것을 의심하며 살펴보았다.
아버지를 죽여야 할 사소한 이유라도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후...”
그러나 모두 진범이 잡혀 제대로 정리된 사건들 뿐이다. 해수가 지친 눈을 꾹꾹 누르던 그때,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자살?”
국회의원 이성진 살인 사건, 수사망이 좁혀오자 진범이 증거를 가지고 자수했다. 범행동기는 부자만 보면 분노가 일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자료에 의하면 처음에는 자살로 신고가 들어왔었다고 한다. 본래 자료에는 없었던 정보다.
신정석의 행적을 살펴보면 사건이 마무리 된 후에도 국회의원 이성진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조사하고 다녔다.
“확실히 이상해...”
해수는 먼저 이성진 살인사건의 진범, 강석구에 대해 조사해보았다. 그때 당시 입금 기록은 없고, 가족이라고는 외국인 아내가 있었는데 잦은 폭력으로 도망쳤다.
동선과 알리바이를 알아보고 싶지만 그때의 영상 기록은 당연히 남아있지 않다.
일단 만나봐야 답이 나올 듯하다. 그가 진범이 맞는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청탁을 받았는지.
바로 아침이 밝자마자 오토바이를 타고 액셀을 당겼다.
[효성 교도소]
강석구가 수감되어 있는 곳이다. 해수는 면회를 신청했다.
“신해수씨?”
“예.”
“수감자 면회 거절입니다.”
“아...”
예상했던 바다. 해수는 영치금 30만원을 넣어주고 다시 면회를 신청했다. 그러자 그제야 강석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긴 머리를 뒤로 넘기고 험악한 인상의 사내다.
“모르는 얼굴이네?”
그는 건들건들 들어와 의자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뭔 일로 조용히 사는 사람을 돈으로 매수한대? 기자? 경찰? 유가족인가?”
“이성진, 당신이 안 죽였지.”
“하, 뭔 개소리야? 그거 물어보려고 30만원 썼어?”
부정이 강하다. 마치 자신이 진범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이.
“몇 년이나 썩을지도 모르는데 돈으로 매수하지는 않았을 테고, 가족도 없고, 약점이 잡히긴 잡혔는데...”
해수는 그의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살인자의 눈이 맞다. 웬만한 살인범들을 상대해본 형사들은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진범이라고 자수했을 때 쉽게 믿었을 것이다.
“너, 다른 사람 죽였구나.”
“뭐야, 이 미친 새끼는? 교도관! 교도관! 나 면회 끝났어!”
“한 명이 아니구나.”
“별 그지같은, 저 눈깔 봐라, 지가 무슨 무당이야? 교도관!”
곧 교도관이 들어왔고 강석구는 해수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개소리 잘 들었고 앞으로 볼 일 없을 거다. 잘 꺼져라, 30만원은 맛있게 먹을게.”
“그래, 또 보자.”
강석구는 이제 출소가 2년 남았다.
해수는 그와의 면회를 끝내고 정보를 정리했다.
국회의원 이성진의 죽음과 강석구의 자수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신정석은 이성진의 사건을 파다가 자살 당했을 확률이 크다.
강석구가 진범이 아니라는 가설을 세우고 생각해보면, 그가 국회의원 살인을 뒤집어쓰고 자수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건이 무엇인가?
그는 사람을 죽여본 눈이었다. 그를 자수시킨 사람, 아마도 사람들이 그의 살인을 알고 있고, 그것으로 협박하여 형량이 더 적은 이성진 살인 건으로 자수시켰다고 한다면 말이 된다.
‘뒤에 숨어있는... 강석구를 자수시킨 놈이 아버지를 죽였을 가능성이 크다.’
해수의 눈동자가 생기있게 반짝였다.
그동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남자가 죽였을 것이라는 심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12년만에 이렇게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을 만나고, 타살일 수도 있다는 의혹이 하나 둘씩 나오고 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사그라들었던 열정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다.
***
어느 때보다 값진 휴가가 끝나고, 복귀날이 되었다.
신해수는 벌개진 눈을 비비며 운전대를 다잡았다. 그 모습에 임순경이 물었다.
“신경장님, 피곤해보이십니다. 제가 운전할까요?”
“아닙니다. 이제 다 끝나가는데.”
그 말에 임순경이 휴대폰을 보았다. 새벽 한 시, 교대할 시간이다. 그녀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그렇네요. 일찍 바꿔드릴껄”
“괜찮습니다.”
말을 하는 동안 주차장에 도착하였고, 해수는 임순경과 함께 지구대 안으로 들어갔다.
한 시가 넘어가 교대 근무자들이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해수는 근무복을 갈아입으려고 2층 계단을 올라갔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강력1팀 오강석 경위]
새벽 한 시가 넘어간 전화, 해수는 왠지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는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해수 경장입니다.”
-신경장님, 오강석입니다. 지금 근무 끝난 거 확인했는데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 드렸습니다. 갈고리파 대가리 위치 떠서 잡으러 가는데 얘가 괴물급이라는 소문이 있어서요. 같이 가실 수 있습니까?
무자비한 폭력배들의 두목을 잡으러 가는 길, 조폭과 조폭 간의 칼부림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위험한 일, 총이 있어도 경찰관 사망이 거의 항상 나오는 종류의 사건이다. 고민할 이유가 없다.
“어딥니까?”
해수는 0.1초도 고민하고 않고 대답했다. 그의 몸은 이미 뒤돌아서 계단을 다시 내려가고 있었다.
< #17. 12년 전 그 사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