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병원 정문,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신해수는 자신이 밟고 있는 덩치 큰 사내를 병원 경비들에게 넘겼다.
해수의 제압을 처음 본 구세주 실장은 입을 쩍 벌린 채 엄지를 올리고 있었다.
“가시죠.”
“어떻게 저 덩치를, 대단하십니다. 역시 대한민국 경찰!”
“목소리 좀 낮추시고...”
그때, 정갈한 목소리가 그들의 발을 멈춰세웠다.
“잠시만.”
돌아서니 고급스런 검은색 투피스 정장을 입은 여자가 해수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한 손을 가슴에 얹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해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해야할 일을 한 겁니다.”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죠, 안서은입니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내어 해수에게 건넸다. 메탈 재질의 흰색 바탕에 글씨가 은색으로 음각되어있는 깔끔한 명함이다.
[대명E&M 대표이사 안서은]
명함을 확인하고 있는데 구실장이 옆에 찰싹 붙어서 속삭였다.
“대명그룹 막내따님이에요. 오너일가 오너일가.”
고개를 드니 그녀의 폼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해수도 명함을 꺼내어 건네었다.
명함을 자주 쓰지 않으니 명함 예절이 어색한 해수였다.
“신해수입니다.”
그녀는 명함을 받아 핸드백에 넣고 해수와 다시 눈을 마주했다. 눈동자가 매우 맑다.
“간단하게 제압하셨지만 작은 도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녀가 어느새 지갑을 꺼내고 있었다. 지갑에서 무언가 나오기 전에 해수가 먼저 손을 뻗어 차단했다.
“아까 말했듯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명함대로 저는 경찰입니다. 이런 거 받으면 안 됩니다.”
“예... 신념이 확고한 분께 실례를 했군요. 사과드립니다. 오늘 일은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안서은은 다시금 공손히 고개와 허리를 숙였다.
많아봐야 20대 후반인데 행동에 기품이 느껴진다. 고개를 숙였음에도 그녀의 품격은 오히려 높아졌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라 그런가.’
그것이 해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같은 땅을 밟고 있지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자와의 괴리감.
해수는 대충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섰다.
“아닙니다. 그럼 이만.”
그들과 떨어져 택시에 타자마자 구실장이 조잘거렸다.
“대박이네요. 실물은 처음 보는데 연예인 뺨치네요 진짜, 안서은 이사, 엔터 쪽에만 명함 달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대명호텔하고 병원도 꽉 휘어잡고 있어요. 저렇게 젊은데 능력도 좋죠?”
“잘 아시네요.”
구실장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야 그쪽 분야 전문가 아닙니까?”
“가시죠, 경찰서로.”
“아 그래도 역시 경찰서는 무서워.”
올라간 어깨가 금새 내려가며 쪼그라드는 구실장이었다.
*
대성병원 정문.
안서은은 신해수의 뒷모습을 꽤 오래 바라보았다.
“강실장님, 저 분 좀 알아봐주세요.”
“경찰분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서은은 뒤돌아서다가 멈추고 자신의 경호원을 바라보았다.
“아, 김실장님은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죄송합니다.”
경호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 그녀의 뒤를 따르지 못했다.
***
강진경찰서 형사과.
구실장 뺑소니 사건은 단순 사고가 아니기에 강력1팀이 맡게 되었다.
취조실 밖. 신해수는 구실장에게 취조 중인 뺑소니범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글쎄요.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네요.”
“음...”
뺑소니범은 답답한 주장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냥 실수였다니까요? 그리고 무서워서 도망치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그럼 칼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건 그냥 등산용으로 있던 거죠, 등산! 아 몰라, 나 변호사 올 때까지 말 안 해.
해수는 같이 취조실 밖에서 방관 중인 형사를 긴히 불렀다.
“휴대폰 기록은 확인되었습니까?”
“아 예, 이상한 게 많아요. 마지막 전화가 도주 중 시간하고 겹칩니다. 도주하면서 통화를 했다는 거죠.”
그때, 다른 형사가 문을 열고 들어와 말했다.
“통화중이었던 번호 대포폰 발견했답니다.강화사거리 근처 공원에 쓰레기통에서”
“이런 젠장, 또 눈알 빠지겠네, CCTV 확보 들어갔지?”
“예썰”
해수는 구실장과 눈을 마주했다.
“구실장님, 기다렸다가 같이 분석하실 시간 되십니까?”
“신경장님 부탁이면 당연히 해야죠.”
구실장은 수사 도움을 위해 같이 보았다. 아무래도 구실장을 목표로 삼은만큼 면식범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말에 겁이 나 하루빨리 잡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제일 컸다.
강화사거리에서 공원까지 폐쇄회로 시시티비와 블랙박스를 확보하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해수와 구실장은 서에서 강력팀 형사들과 함께 시시티비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해수가 한 장면에서 멈추었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 강화 사거리 횡단보도에 있는 여자가 찍힌 장면이다.
“이 여자 추적 좀 해주십시오. 현장에서도 제가 확인했는데 구실장님 보고 돌았습니다. 입모양도 통화 중으로 보였습니다.”
“아, 어... 확실히 수상하긴 하네요. 딱 도니까 바로 사고 나고, 알겠습니다. 얘들아! 용의자 좁혀졌다!”
해수의 의견에 따라 그 여자가 나오는 시시티비 장면이 연달아 찾아내며 동선이 나오고 있었다.
“어, 잠시만요.”
구실장은 여자의 얼굴이 제일 잘 나온 장면에서 멈추게 하고 실눈을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많이 본 실루엣이다. 그는 잡혀온 뺑소니범이 있는 취조실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벌렸다.
“아?”
“뭐 떠올랐습니까?”
“기억 날 거 같아요. 딱 한 번만 봐서 정확하지는 않은데... 그때 워낙 인상적이어서”
구실장의 말에 시시티비를 분석하던 형사들이 몰려들었다. 그가 용의자를 특정하면 눈 아픈 분석은 필요없으니.
해수가 물었다.
“고객입니까?”
“아뇨, 정확히는 고객의 딸이죠, 박막련이라는 할머니가 있는데...”
박막련은 현재 요양병원에 있다. 구실장이 초기에 자산관리사로 일할 때부터 오랫동안 맡겨, 고마운 마음에 요양병원을 자주 찾아갔는데, 한 번은 그 딸을 만났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할머니가 그 딸을 무서워하는 모습이 보여, 나중에 찾아가서 물어봤는데 폭력적이고 돈만 빼앗아간다는 말을 들었다.
“...3억짜리가 재개발로 17억 자산가가 됐는데도 박복한 삶을 사셨지요. 아! 그거 전부 사회복지재단에 기부하시기로 한 게 바로 오늘입니다!”
“그거네.”
“그거군요.”
“역시 결국 돈 때문이었군요. 박막련씨를 살해해도 위임받은 구실장님이 기부를 진행할 수 있으니.”
“자... 75년생 김임숙씨, 대충 봐도 얼굴 시시티비랑 일치네요. 주소 오관동 33번길 20, 103호, 일단 잡으러 갑시다. 튀기 전에”
형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준비하여 김임숙을 잡으러 나갔다.
*
김임숙은 그녀가 사는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한 차 아래에서 네 시간 동안 숨어있다가 잡혔다.
먼저 잡혔던 뺑소니범은 그녀의 내연남이었다.
구실장이 휴대폰을 떨어트리게 만든 사람도 그 남자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들은 살인 계획을 치밀하게 세운 점, 현직 경찰인 해수가 칼에 찔린 점이 죄가 배가 되어 각각 15년 형을 받았다.
“나쁜 놈들...”
법원에서 마지막 선고까지 보고 돌아가는 길, 구실장은 그들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표정이나 발음을 보니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말인 듯했다.
해수는 구실장의 차를 얻어탔다. 오토바이는 사고 날에 신호기 박스를 박아 완전히 박살났다.
해수는 조수석에서 구실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구실장님, 지금 맡은 고객은 몇 분입니까?”
“음... 현재 다섯 분이요. 박막련 할머니는 기부하면 곧 끝나니까 사장님까지 네 분이요.”
“개인 자산관리사는 얼마입니까?”
“개인? 자산관리사가 고객 여러 명 맡지 않고 일대일로 관리 말씀하시는 거죠? 보편적으로 수수료 3퍼센트 상승에 최저수수료는 연 4000입니다. 혹시... 저는 언제 죽을 지 모르니 관리사를 바꾸실려고...”
겁먹은 그의 표정에 해수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전방을 주시하며 말했다.
“저는, 제 돈을 탐내서 구실장님을 죽일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 돈만 관리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 엑?”
구실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수는 그가 거절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물었다. 아무리 최저수수료가 있더라도 현재 수입보다 훨씬 줄어들 것이기에.
그러나 구실장은 다른 고객들을 다른 자산관리사에게 연결해주는 조정 기간만 상의하고 해수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였다.
오히려 고마워했다. 집중 케어가 까다로운 사람이면 몰라도 해수같은 경우에는 매우 수수하여 부담도 적고 자산은 많기 때문이다.
*
다음날, 퇴근시간.
띠리리리 띠리리리
사복으로 갈아입고 지구대를 나서는데 귀신같이 알고 전화가 울렸다. 구실장이다.
“예, 실장님.”
-신사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만나서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됩니다. 어디서 봅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그럼 제 집 앞에서 뵙죠.
잠시 후, 해수가 사는 원룸 1층에 위치한 편의점.
그 앞에 나무로 된 야외 테이블에 해수와 구실장이 마주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컵라면 두 개와 김치, 단지 우유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구실장은 원룸 건물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100억대 자산가 치고 참 소소하시네요.”
“불편함을 못 느껴서, 굳이 일부러 돈 낭비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매우 맞는 말씀입니다...”
구실장은 그답지 않게 말꼬리를 늘렸다. 해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감이 오지 않아 조용히 라면만 먹었다.
“그, 제가 이상한 걸 봤어요.”
다시 한 움큼 라면을 집던 젓가락이 멈추었다. 사건 얘기인가 싶어 이야기에 집중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그때 있잖아요. 사고 때...”
구실장은 찬찬히 자신이 죽었던 리셋 전의 기억을 말했다. 이상한 사람으로 볼까 싶어 해수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환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때의 고통, 감정, 촉감,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뇌리에 깊게 박혀 있어서, 제가 참 혼란스럽습니다.”
해수는 어떤 말인지 정확히 알고 있기에 무슨 헛소리냐며 따지지 않고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도 어쨌든 안 죽었으니 다행이다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신사장님의 행동이 딱 걸립니다.”
그의 말에 해수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제가 죽음을 경험했을 때, 이전에 모든 것이 같았어요. 신호등, 지나가는 사람, 옷차림, 전부, 그런데! 신사장님의 행동만 달랐어요.”
해수가 진지하게 듣는 태도를 보이자 구실장은 입술에 침을 묻히고는 다시 설명을 이었다.
“그 기억과는 달리 횡단보도에서 대기하다가 사고 전에 날 불러서 멈춰세우고, 그것으로 모자라 차가 오기도 전에 날 낚아채서 구해줬어요. 마치 그 차가 나한테 핸들을 꺾을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는 젓가락을 들어 눈동자를 가리켰다.
“죽음을 경험했을 때 사장님의 눈빛도 이상했어요. 죽을 사람을 대하는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꼭 살려주겠다는 비장함이 깃들어있었어요. 그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는 두 손을 펼치며 해수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이게 대체 뭐죠? 저는 진짜 혼란스러워요. 밤새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신사장님이 이 두 개의 기억에 열쇠를 쥐고 있다고 생각해서 찾아온 거예요. 대답해주십시오!”
해수는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라면이 불는 것도 신경쓰지 못할 정도로, 구실장의 기억력이 이렇게 뛰어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정말 허술하다. 죽기 전에 의식이 있다면 데자뷰처럼 기억에 남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안일했다.
한 시가 급한 때이니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그랬지만...
해수는 구실장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건...”
< #13. 비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