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소개팅 제안, 신해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자연스레 채연이 생각났다. 미련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퇴근 후에는 운동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강력팀일 때와는 달리 여가시간도 많아졌다.
해수는 짧게 고민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좋아요. 그럼 번호 넘길게요. 신경장님이 먼저 연락해보세요.”
“알겠습니다.”
***
비번 날.
신해수는 불법주정차량들을 긁으면서 사이드미러와 옆면이 완전히 긁힌 차는 폐차를 시켰다.
어차피 현재 상태로 중고차로 팔아도 100만 원, 수리비도 100만원 가까이 들기 때문에 처분했다.
대신 오토바이를 구매했다. 교통체증이 심한 강진시의 도로를 보며 전부터 오토바이를 떠올렸었다.
브르릉
낮고 무거운 배기음이 공기를 떨리게 한다.
투어러라고 불리는 오토바이로, 고속주행과 승차감,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기종이다.
마음같아서는 완전 고속주행용으로 구매하고 싶었지만, 한 번 시범삼아 탔다가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사고를 낼 뻔하여 이것으로 골랐다.
브르르릉!
소리가 최대한 작게 나도록 개조했지만, 그래도 차보다는 훨씬 큰 소리를 내는 것이 영 부담스러웠다.
리드 빌딩이라는 간판이 금빛으로 번쩍이는 빌딩 앞에서 멈춰 섰다.
하층에는 음식점과 헬스장, 외과의원 등이 있고 6층부터는 사무실이 들어서 있는 10층 짜리 빌딩이다.
‘613호...’
해수는 복도를 거닐던 중에 뿔태 안경을 낀 깔끔한 스타일의 남자와 마주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어서오세요. 사장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산관리사 구세주’
쇼파에 앉은 해수는 책상 위에 놓인 명패를 빤히 바라보았다. 구세주가 녹차를 해수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름이 특이하지요? 제 직업과 잘 어울리기도 하고요.”
“그렇네요.”
“경찰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직업 또는 혼인여부에 따라 적립되는 시드머니가 다르기 때문에 기본적인 메뉴얼이 나와있습니다. 여기 보실까요?”
그가 내민 메뉴얼에는 직업별, 연령별, 혼인 여부에 따른 시드머니 적립 예상금과 자산관리 수수료가 적혀 있었다.
“공무원분들은 보통 C-2타입을 선호하십니다. 안전하게 시드머니를 천천히 불리는 형식으로요.”
그러나 가장 윗부분에도 해수에 맞는 타입은 없었다.
“이거 말고...”
“충분히 이해합니다. 자산관리를 하지 않으셨던 분들은 최저수수료가 부담될 수밖에 없지요. D,E,F타입도 보여드릴게요. 잠시만요.”
구세주는 또 다른 메뉴얼을 보여주었다. 해수는 고개를 저으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어차피 현재 라이프 스타일로는 평생 써도 남는 돈,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결정했으면 툭 까놓자.
“백십삼억입니다. 시드머니.”
“아하 백십삼... 예?”
구세주는 두 눈을 깜빡이며 방금 들었던 금액을 인지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지금까지 그가 자산관리를 맡은 사람들 중에 20억이 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소소한 사람들 위주로 이름을 천천히 알리고 있는 자산관리사였다.
해수는 놀란 그의 얼굴을 보고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김팀장님 소개 받고 왔습니다.”
“아, 어, 예 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구세주가 따로 계셨네, 구실장이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래도 실무경험 10년 이상인 구세주는 금세 놀란 기색을 감추고 차분하게 자산관리사가 하는 일에 대하여 설명해주었다.
“...이렇게 사장님께서 원하시는 범위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주식 또는 건물 매입 및 관리도 위임하실 수 있고요. 물론 거래 때는 직접 승낙해주셔야합니다.”
“전부 위임하겠습니다.”
“예... 하하, 시원시원하시네요. 수수료는 순수익의 20프로입니다. 최저 수수료는 선택하신 타입은 연 천만 원 입니다.”
설명이 끝나자 해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약서를 작성하고 서명했다.
해수가 서명을 하는 그 펜 끝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구세주는 서명이 끝난 후에도 얼떨떨하여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해수가 그에게 계약서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하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구세주였다.
“예! 사장님! 목숨을 다하겠습니다!”
구세주의 격한 인사를 뒤로 하고 주차장으로 나왔을 때였다.
지이잉
-소개팅: 오늘 12시에 보는 거 맞아요?
잊고 있었다. 약속을 잡아놓고 며칠동안 연락이 없자 소개팅녀가 재차 확인한 것이었다.
-예.
***
강진시 번화가에 위치한 미용실.
김은미는 머리 스타일링을 마치고 일어나 전신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산뜻한 색의 가디건에 짧은 스커트를 입은 그녀는 봄처녀 느낌이 물씬 풍겼다.
미용실 직원들이 손을 모으며 칭찬을 남발했다.
“오늘 너무 예쁘신데요?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으세요?”
은미는 머리를 찰랑이며 대답했다.
“소개팅,”
“상대분 쓰러지겠는데요?”
은미는 자신감 넘치는 눈을 하고 옆머리를 튕겼다.
“그건 당연한 거고.”
그녀는 약간 설레는 마음을 안고 미용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약속장소로 향했다.
10분 늦게 나왔는데도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 옆에 정차한 오토바이를 탄 남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감히 김은미를 기다리게 만든다고?”
띵 띠링 띵 띵
그때, 벨소리가 울렸다. 소개팅남이다. 은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디세요?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데 대답은 들리지 않고, 코 앞으로 누군가의 휴대폰이 들이밀어졌다. 자신의 번호가 찍혀 있다.
휴대폰 너머 힐끔 보니 헬멧을 쓴 남자가 서 있었다. 구석에 정차된 오토바이의 주인이다.
그가 헬멧을 벗으며 은미와 눈을 마주했다.
“김은미씨?”
오늘은 망한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든다. 은미는 똑바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를 외면하지 못하고 마주보았다.
“아...안녕하세요오..,”
“반갑습니다. 타시죠.”
은미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자신의 짧은 치마를 검지로 가리켰다.
“저 치마가 좀 짧은데요. 그냥 장소 알려주시면 택시 타고 갈게요.”
그러자 해수가 오토바이 안장을 들어올려 그곳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은미는 그것에 또 한 번 놀람을 금치 못했다. 경찰 마크가 떡하니 붙어있는 활동복 상의이기 때문이다.
“그건 무슨... 어머”
은미가 충격을 받아 입을 반쯤 벌린 채 멍하니 있자, 해수가 그녀의 허리에 활동복 상의를 두르고, 팔 부분으로 묶어 고정시켰다.
“올려드릴까요?”
“아뇨, 하... 됐어요.”
은미는 하는 수없이 오토바이에 옆으로 올라탔다. 다리가 예쁘게 모아지는 자세다.
그러자 해수는 가만히 그녀의 하체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은미는 살짝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꼴에 지도 남자라고... 근데 너무 대놓고 쳐다보는 거 아니야?’
그때, 해수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자세로는 낙상 위험이 큽니다. 바로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생각지도 못한 안전 경고 멘트에 은미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그냥 좀 가죠."
“실례하겠습니다.”
“엄머마!”
해수는 그녀를 공주님 안기로 번쩍 들어올렸다가 정면을 쳐다보는 자세로 다시 앉혔다.
안장이 꽤 넓어 은미는 본의 아니게 다리를 쩍 벌리게 되었다.
경찰복으로 가려져 있지만 민망한 자세에 정신이 혼미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갑자기 스타일링 잘 된 머리에 헬멧이 쑥 들어왔다.
“악”
“왜 그러십니까? 작습니까?”
“아니, 아니... 빨리 출발이나 해요.”
“네, 꽉 잡으십시오.”
그제야 오토바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치마가 많이 말려 올라가 하얀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경찰 활동복으로 가려지는 건 극히 일부일 뿐이다.
신호등에 멈춰 설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울 정도로 느껴졌다. 도보는 물론 운전자들까지도, 이럴 땐 또 헬멧 쓴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진짜, 내리자마자 헬멧으로 대가리 후려치고 갈까?’
“도착했습니다.”
그에 반해 목소리에는 군더더기가 없어서 더 짜증났다.
스윽
은미는 헬멧을 거칠게 벗으며 부스스해진 머리로 해수를 째려보았다.
“차는 원래 없으세요?”
“있었는데, 며칠 전에 사고가 나서 폐차 시켰습니다.”
“하, 하하...”
어이없는 대답에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자, 소갈비집 간판이 떡 하니 보였다. 계획 변경이다. 저것 먹고 스타일링 뽕만 뽑고 가자.
“다행히 메뉴선택은 잘 하시네요.”
“가시죠.”
갈비집은 내부 인테리어도 예쁘고 룸 형식인데다가 직원이 직접 구워주고 알맞은 크기로 잘라주는 곳이었다.
냠
맛있다. 근 몇 달, 아니 올해 먹었던 고기 중에 가장 맛있다.
그러자 머리 눌린 것도,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치마 입고 다리를 쩍 벌리고 오토바이를 타고 왔던 불쾌감도 입 안에 고기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여유가 생기니 아까 일이 떠올랐다. 만난 지 1분도 안 되어 자신을 번쩍 안아 든 남자,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놀랐지만 그때 느낌이...
'박력 있었지, 내가 미쳤네 진짜.'
은미는 해수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얼굴도 저 정도면 괜찮고... 인상이 조금 날카롭지만 남자는 그래야지, 그것도 나쁜 놈 잡는 경찰이니, 키도 크고, 어머, 어깨는 또 왜 이렇게 넓어?’
절로 친구 임시아의 말이 떠올랐다.
-진짜, 내가 본 경찰 중에 최고야, 내가 결혼만 안 했으면 너한테 소개 시켜줄 일 없었을 거야.
은미는 티슈로 입을 조신하게 닦고는 도도한 표정으로 해수를 보았다.
“경찰이시라고요.”
“예, 임순경과 같은 동부지구대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저는 무슨 일 하는지 들으셨어요?”
“아니요.”
잠깐의 정적, 은미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네, 궁금합니다.”
“하하... 전 대한은행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여자가 은행, 그것도 금융계 연봉 최고라는 대한은행에 다니면 보통 놀라거나 기가 죽는다. 그런데 정말 눈썹도 까딱이지 않으니 자존심이 살짝 상했다.
“요즘 공무원 선호도가 5년 전에 비해 40프로 이상 줄어들었다고 하던데, 그 이유가 연봉이 중소기업보다 적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그런가요?”
연봉으로 찍어 누르기, 우회적인 질문에 해수는 정통으로 들이받았다.
“중소기업 평균 연봉보다 낮을 겁니다. 저는 과잉진압으로 4년간 지속적인 감봉을 받았기에 최근 연봉은 대략 이천만 원이었습니다.”
“...예?”
그녀의 초봉 절반도 안 된다. 은미는 어이가 없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때 해수가 연타를 날렸다.
“현재는 감봉 해제 상태입니다.”
“하, 하하.”
은미는 고기를 먹으며 영혼 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7년 근무하셨으면 집 구하셨겠네요? 대출 끼셨거나.”
“대출은 합의금 주느라고 많이 당겨서 더 이상 대출을 끌어쓸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합의금을 전부 청산하고, 현재는 월세 원룸에 거주 중입니다.”
“하하, 하하하!”
은미는 검지로 해수를 가리키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임시아 썅년”
“예?”
“아니에요. 그쪽한테 욕한 거...”
‘미쳤네, 더 볼 것도 없어, 갈비로 뽕이나 뽑아야지, 오토바이 끌고 올 때부터 알아봤어, 그래도 오토바이에 앉힐 때 박력 있기는 했... 정신 차려 김은미, 박력이 밥 먹여주냐?’
김은미는 말없이 고기를 전투적으로 집어먹었다.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던 해수가 돌연 질문했다.
“은미씨는 방범에 대해 평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요? 방...범?”
소개팅에서는 나오기 힘든 주제이기에 은미는 잠시 그 뜻을 고민했다. 신조어인가?
“예, 범죄를 사전에 예방한다는 의미입니다만, 자신에게 범죄가 발생할 경우 얼마나 대비하고 있는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 거 생각 안 해봤는데, 그게 경찰이 하는 일 아니에요? 그러라고 세금으로 월급 주는 거 아닌가? 나도 해야하나?”
“물론 주기적인 순찰과 선전으로 방범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범죄 취약계층인 아이,노인, 여성분들도 대비를 해야합니다.”
“대비를 어떻게 해야하는데요?”
“호신용 스프레이 및 호루라기, 긴급 시 위치알림 서비스 가입 등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은미는 미간을 좁히며 손을 저었다.
“어으 그런 거 싫어요. 무겁고...”
“그렇군요.”
해수는 잠시 침묵하다가 은미가 먹다 남긴 뼈를 젓가락으로 가리켰다. 고기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다 드신 겁니까?”
“예, 왜요? 헙”
해수는 손을 뻗어 그녀가 남긴 뼈를 가져와 깔끔하게 뜯어먹었다.
“아니 저게...”
‘왜 멋있어?’
소개팅녀가 남긴 뼈를 남자가 가져가 뜯어먹는다.
문자만 보면 찌질하기 그지 없는데 은미의 눈에 그의 모습은 마치 고고하고 흉폭한 한 마리의 맹수를 연상케 했다.
은미는 다급히 머리를 털었다.
‘정신 차리자, 연봉 2천에 월세 사는 30대 남자야.’
식사가 끝나고, 겉옷을 챙겨입을 때 해수가 말했다.
“잠시”
“예?”
이 타이밍에 화장실을 간다. 은미는 어이가 없어서 방금 전에 멋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혐오했다.
‘그래, 연봉 2천에 대출도 못 끌어쓰는 빚쟁이가 무슨 돈이 있겠냐, 차라리 잘 됐어, 돈 잘 버는 내가 사고 깔끔하게 털어야지.’
그렇게 카드를 꺼내며 카운터로 향하자 직원이 말했다.
“남자분께서 계산하셨습니다.”
“예? 아...”
때마침 화장실에서 외모를 점검하고 나오는 해수가 보였다.
‘뭐야, 왜 잘생겼어 짜증나게...’
고기집을 나오는 길, 해수는 돌아서서 헬멧을 들고는 물었다.
“근처 커피숍으로 가시겠습니까?”
은미는 그가 들고 있는 헬멧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또 머리가 눌리고 이상한 자세로 오토바이에 탈 생각에 마음이 착찹해졌다.
은미는 헬멧을 낚아채며 말했다.
“아뇨, 술이나 마시러 가죠.”
술집에 들어서 테이블을 잡고 앉자마자 그녀가 외쳤다.
“여기요! 커스 두 병 처음이야 한 병이요!”
처음과는 달리 꽤 호탕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그녀가 직접 제조한 소맥을 한 잔을 들이킬 때였다.
와장창!
“야이 개새끼야!!”
처음부터 시끌시끌하던 바로 옆 칸에 테이블이 뒤집혔다.
건장한 사내 세 명과 여자 두 명이 있는 자리였다.
“뭐이 개새끼야? 내 말이 틀리냐?”
“시팔 니는 그럼 형님이 틀렸다는 말이냐?”
사정도 모르는 사내들은 서로 멱살을 잡고 흔들고 있었다.
그때 남직원이 와서 그들을 말렸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계속 이러시면 업무 방해랑 기물 파손으로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신고? 하 참 시팔넘이, 해봐 이 새끼야!”
쩌억!
사내의 따귀를 정통으로 맞은 직원이 맥주와 유리조각 가득한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모습에 해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10. 소개팅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