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10년 후
강남 한복판에 세워진 커다란 건물.
한 무리의 아이들이 선생님으로 보이는 여성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왔다.
개중에는 리저드맨이라고 불리는, 도마뱀과 인간이 섞인 아이와 도깨비처럼 생긴 푸른 피부의 아이도 보였다.
아이들은 서로 장난을 치고 때로는 앞서나가다가 제지당했다.
그러나 건물 안에 들어서자 자유분방한 행동들은 하나로 통일됐다.
입을 벌리고 중앙을 쳐다보는 것이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우뚝 선 네 사람의 상.
벌레를 다루는 여성.
뼈만 남은 기사.
흘러내리는 인간.
소를 닮은 괴물.
네 방향을 바라보는 기사들의 아래를 온갖 종족으로 이루어진 군세가 떠받치고 있다.
“우아!”
“기사다!”
“히어로!”
“아냐! 헌터야!”
“그게 그거지.”
남자아이 하나가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책을 들었다.
[천상의 기사들]
화려한 컬러북의 표지와 눈앞의 기사들의 동상이 똑같다.
아이들을 인솔하던 선생님이 푸근한 미소로 말했다.
“자자, 싸우지 말고. 다 맞는 말이에요. 이분들은 키르단 제국의 기사님들이고, 영웅이기도 하니까. 헌터도 사람을 구하는 영웅들이고.”
“네!”
리저드맨의 아이 하나가 번쩍 손을 치켜들었다.
“선생님! 우리 아빠도 기사예요!”
“어머~ 그랬구나! 그래서 우리 솔잎이가 이렇게 씩씩한가 보다.”
“에헤헤.”
“우와~ 솔잎이 멋이따!”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아이들의 머리 위에서 여성의 음성이 울렸다.
-본 기념관은 10년 전 멸망급 게이트의 전투에서 세계를 위해 싸운 제국의 기사단과 황제 이현님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현님은 게이트에 휘말리고 3년 후, 강력한 힘을 갖고 다시 나타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을 보며, 한 남자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푹 눌러쓴 모자의 아래에서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갑자기 남자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음?”
핸드폰을 든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이런……!”
남자가 모자를 벗고 달려갔다.
그의 얼굴을 본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어!”
“저 사람은……?”
순식간에 건물을 빠져나온 남자가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이 한 곳에만 모여 있다.
옛날 같으면 기묘한 기상 현상이라고만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모두에게 익숙한 파괴의 전조.
구름이 점차 커지며 안쪽에서 빛이 번뜩였다.
“게이트…….”
남자의 말에 호응하듯, 경보가 사방에서 울렸다.
땅이 갈라지며 벙커가 올라왔다.
-3급 게이트 경보. 시민 여러분들께서는 간이 대피소로 신속하게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3급 게이트 경보. 시민 여러분들께서는 간이 대피소로 신속하게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대피하던 사람들이 남자를 흘끔거렸다.
“어! 플레임 라이더다!”
“플레임 라이더 김남우!”
“오오오!”
“A급 헌터다!”
남우가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6년 전 얻은 아티팩트 ‘루비 아머’.
A급 아티팩트 중에서는 독특한 힘을 지닌 물건으로… 강력하지만 약간의 단점이 있는 물건이었다.
주변을 살피며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남우가 속삭였다.
“아… 아티팩트… 발동!”
목걸이에서 나온 붉은 빛이 남우의 몸을 휘감았다.
풀플레이트 메일을 닮은, 날렵한 디자인의 붉은 갑옷이 남우에게 입혀졌다.
남우의 몸이 자동으로 전대물에 나오는 영웅 같은 포즈를 취했다.
그의 등 뒤로 화염이 폭발하며 망토처럼 휘감겼다.
“플레임 라이더 등장!”
아티팩트, 루비 아머의 특징은… 사용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작동 시 특정 포즈와 이펙트가 나타난다는 점이었다.
그 쪽팔림을 감수할 만큼 강력한 힘을 지녀서 어쩔 수 없이 사용 중이지만…….
‘대체 왜 이런 기능이 있는 거냐고.’
남우는 매우 부끄러웠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매번 저러지?”
“몰라. 먹필도사 같은 컨셉이 아닐까?”
“방송 출연에 욕심이 있는 거지.”
“그런 것치고는 인터뷰도 잘 안 한다는데.”
주변 시민들의 반응에 남우는 더욱 부끄러워졌다.
‘빨리 게이트에 들어가자.’
훌쩍 뛴 남우가 게이트에 들어갔다.
* * *
구름 낀 올림푸스의 하늘에 빛이 내려왔다.
무지개색의 기둥.
그 안에서 황금으로 만든 커다란 배가 나타났다.
아스가르드의 배였다.
미리 마중을 나와 있던 제우스의 앞으로 배가 미끄러지듯 착륙했다.
망토를 펄럭이며 내린 오딘의 외눈이 모여 있는 신들을 훑었다.
“이쪽도 다들 지구에 내려가 있나?”
제우스가 코웃음을 쳤다.
“흥, 당연하지 않나.”
요즘 성좌들은 자주 인간의 형태를 갖추고 지구에 내려갔다.
영화를 보고 밥을 먹는 등 인간인 척을 하며 유흥을 즐겼다.
지구에 내려가기 위해서는 제국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불편한 절차가 있지만, 그걸 감수할 만큼 매력적인 유흥인 모양이었다.
“마왕 때문에 지구가 완전히 달라졌다는군. 외신을 신경 쓸 필요도 적어졌고, 확실히… 평화로워졌으니까.”
구름으로 이루어진 정원에 두 신이 들어섰다.
일년내내 만개한 꽃들이 그들을 반겼다.
황금 사과나무의 아래에 나란히 뒷짐을 지고 선 두 신에게 바람이 스쳤다.
오딘이 안대를 매만졌다.
“언제까지 그의 치세가 이어질 거라고 생각하나?”
이현이 게이트를 관리하며 처음에는 몇몇 성좌들이 반발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부 제국의 철퇴를 맞고…….
올림푸스, 아스가르드를 포함하여 처음부터 동맹을 맺은 성단들만 살아남았다.
수염을 쓰다듬으며 제우스가 대답했다.
“가능한 길게 이어졌으면 좋겠군.”
오딘의 황금색 외눈에 의혹이 어렸다.
오랜 세월 지구의 패권을 두고 다툰 자다.
비록 이현의 힘이 강대하다고는 하나…….
다른 성단들의 힘도 이현의 방임 하에 조금씩 강해지는 실정.
올림푸스도 아스가르드도 강해지고 있었다.
“패권은 포기했나?”
“괜찮지 않나? 오랜만의 평화야. 평화는 좋은 거지.”
“평화? 군비를 증축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평화를 위해서인가?”
“후후… 자네의 오른눈은 뭘 놓치는 법이 없군.”
먼 곳을 보며 제우스가 말했다.
“미래 세대의 평화를 위해서지. 손주들 몇이 얼마 전에 지구의 ‘중학교’라는 곳에 입학했거든.”
오딘의 외눈이 커졌다.
마침 이현의 딸도 얼마 전에 중학교에 입학했다.
이현의 딸에 대한 사랑이 범상치 않음은 이미 익히 알려진바.
만약 제우스의 손자들 중 하나가 이현의 딸과 친해지거나, 후에 그 인연을 계기로 혼인이라도 하게 되면….
딸을 아끼는 이현의 특성상 신경 쓰지 않을 리가 없다.
“이 음흉한 놈……!”
오딘의 힐난에 제우스가 눈을 흘겼다.
“음흉하다니? 자네도 그 중학교에 손녀를 잠입시키지 않았나?”
상대를 감시하던 것은 오딘만이 아니었다.
정곡을 찔린 오딘이 뜨끔했다.
“크흠! 그건 그냥 지구 문물을 배우려고 한 거지!”
사실 계속 빈이와 친해지려고 하고 있지만… 반 배정을 다르게 받아 접근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것까지 들켰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매우 부끄러웠다.
“후후. 마음대로 하시게. 결국 최후의 승자는 이쪽일 테니.”
이현이 언제까지고 군림할 리가 없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백 년, 이백 년 후까지 그의 통치가 이어질지는 알 수 없는 일.
그때가 되면… 빈이나, 빈이의 자식이 실권을 쥘 것이다.
지금은 찬밥 신세인 올림푸스나 아스가르드여도, 자식이 빈이의 남편이나 친구가 되면 다르다.
‘오딘 놈에게 질 순 없지!’
‘제우스 놈에게 지면 안 되지!’
두 성좌는 열심히 김칫국을 들이켰다.
* * *
쨍그랑!
우주 공간이 산산조각 나며 한 점으로 무너졌다.
오색으로 반짝이는 우주의 파편 사이에서 거대한 괴물이 나타났다.
창백한 피부를 지닌 뱀.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시멘트를 발라 만든 것 같은 가면이 있었다.
가면의 입이 벌어지며 장어 같은 이빨이 가득 찬 입이 드러났다.
가면 속에서 빛나는 붉은 눈이 멀리 보이는 파란 별을 주시했다.
다른 존재들은 알 리가 없는 강력한 마력과… 무수한 지성체의 기운이 느껴졌다.
“저곳이 그곳인가.”
그의 옆으로 식탁보 같은 하얀 천이 나타났다.
바람도 없는데 스스로 휘날리는 천 아래로 붉은 선들이 형이상학적 도형을 그리며 움직였다.
천의 중앙을 차지한 황금색 눈 모양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
“잊지 마. 반씩 나눠 먹는 거야.”
“난 양보다 질이야. 우후훗.”
그때 그들의 앞에 황금색으로 영롱하게 반짝이는 물방울이 떠올랐다.
물방울이 스스로 복제하며 수를 늘리더니 삽시간에 도넛 형태를 한 물거품을 이뤘다.
도넛의 구멍 안쪽에서 금빛의 수면이 나타났다.
수면 아래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천천히 솟구쳤다.
“아저씨들, 지구에는 무슨 볼일이시죠?”
수백 개의 은하를 담은 눈동자가 두 외신을 바라봤다.
광채로 된 날개가 게이트의 양옆으로 황금색의 긴 물결을 만들었다.
붉은 비늘로 덮인 몸이 우아하게 섰다.
“응? 레비아탄인가?”
레비아탄.
외신들 사이에서도 강력하기로 이름난 괴물이었다.
“우리는 지구를 먹으러 왔다. 비켜라.”
레비아탄의 눈에서 은하가 사라지고 태양이 떠올랐다.
빈이의 미간이 험악하게 주름졌다.
“지구가 사탕도 아니고 뭘 먹어! 죽을래!”
그때 상대적으로 작은 손이 레비아탄의 머리를 척 짚었다.
“빈아, 나쁜 놈들이라도 말은 곱게 해야지.”
“흥.”
빈이가 크게 입을 벌렸다.
키이잉!
콰아아앙!
빈이가 내뿜은 황금의 광선이 외신 하나를 휩쓸었다.
방심하고 있던 외신이 급히 힘을 모아 방어했다.
그러나 불길에 닿은 순간, 힘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쿠에엑!”
미처 다시 힘을 모아 막을 새도 없었다.
태양의 코로나 같은 열기가 순식간에 외신을 태웠다.
빛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은 새카만 먼지뿐.
간신히 휩쓸리는 것만 피한 다른 외신이 경악했다.
“헉!”
강하다.
어지간한 외신들은 꿈도 못 꿀 강력한 힘.
그저 지성체의 냄새만 맡고 왔을 뿐인 그로서는 대적할 수 없는 힘이었다.
‘저렇게 강한 레비아탄이 저 별을 지키고 있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거대한 뱀의 몸이 황급히 게이트로 들어갔다.
그런데 반도 들어가기 전에 몸통이 덥석 붙잡혔다.
이현이 그의 비늘을 붙잡고 있었다.
작은 손인데… 도대체 무슨 원리인지 알 수 없었다.
“어딜 도망가.”
“크악!”
리본 모양으로 묶인 외신의 시체가 둥실 우주 공간에 떠올랐다.
“오랜만에 운동하니까 좋네. 빈아! 아빠가 저녁에 맛있는 거 해줄까?”
빈이가 게이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저녁에 친구들이랑 파티하기로 했는데.”
“아빠랑은 이제 저녁 먹기 싫구나…….”
“아! 어제 저녁 같이 먹었잖아! 아빠가 애야?”
“우리 빈이가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이현이 주머니에서 사진을 소중히 꺼내 들었다.
턱받이를 한 빈이의 사진이다.
거대한 드래곤의 얼굴이 불타올랐다.
“언제적 사진이야! 내가 중학교 입학식 때 증명사진 준 거는 어쨌어!”
“그건… 귀하니까 보존 마법 걸어서 보물방에 장식했지.”
“징그러우니까 자랑스럽게 얘기하지 마.”
빈이가 다시 홱 몸을 돌렸다.
“아무튼 나 오늘 친구랑 놀 거니까 아빠는 혼자 드세요.”
“그래, 데리러 갈까?”
“싫어, 아빠가 오면 다들 불편해한단 말이야.”
이현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응… 알았어…….”
“내일은 파리에도 들러야 해서 바빠. 대신 선물 사 올게요.”
손을 흔들며 하는 빈이의 말에 시무룩하던 이현이 금방 활짝 웃었다.
“그래? 고마워~ 아빠가 기다릴게!”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