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꽃 한 송이
팔짱을 낀 이현이 우수에 젖은 눈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이따금 한숨을 푹 쉬거나 미간을 문지르기도 했다.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그 모습을 보던 네 기사단장들이 소곤거렸다.
“폐하께서 며칠 전부터 상당히 초조해 보이시는군.”
“그러게요. 뭔가 고민이 있으신 게 아니실지…….”
“고민? 폐하께서 말인가?”
“있을 수 있지. 외신에게만 걸리는 치질이라거나.”
“크루엘, 당신의 모욕적인 상상력을 폐하께 적용하기 전에 한 번 더 충성이나 윤리라는 필터를 거칠 생각을 하는 게 좋겠군요.”
“무한한 상상력에 제한을 둬서 폐하의 문제 해결에 발목을 잡는 게 충성이라는 생각은 지성이 모자란 자나 하는 것 아닌가?”
“…….”
“…….”
“이봐, 아시스. 얘네는 왜 사이가 좋아지지를 않는 거야?”
“…다 들리는 목소리로 묻지 마시고 말려주시죠, 아낙톤 공.”
그때.
드르륵!
베란다 밖에 서 있던 이현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가 움찔했다.
“뭐야, 너희들 언제 우리 집에 왔어?”
“한… 두 시간쯤 된 것 같사옵니다.”
두 시간이나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당황했는지 이현이 멍청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래? 근데 왜?”
“폐하께서 오랜만에 점심이나 같이하자고 부르셨사옵니다.”
“아!”
말한 것도 잊고 있었다니…….
기사단장들이 장난치던 것도 잊고 걱정스럽게 이현을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뭔가 문제가 있으신 것이 아니신지요?”
이현이 피식 웃었다.
“응? 아냐, 아냐. 아! 밥해줄 테니까 앉아 있어.”
“아, 옙.”
괜히 돕겠다고 나섰다가 접시를 깨고 혼난 적이 있는 경험이 다들 한 번씩 있는 기사단장들은 조용히 식탁에 앉아 요리를 기다렸다.
그들끼리 궁리할 문제도 있었다.
“폐하께서 대체 무슨 일로 저리 궁리하시는 거지?”
크루엘이 액체로 된 손으로 턱을 괴고 선글라스 모양을 만들어 썼다.
“혹시 외신의 침략이 아닐까? 이번에는 외신들로 이루어진 군대라던가.”
“그런 문제라면 오히려 폐하께서 우리에게 의존하시겠지.”
아낙톤이 번쩍 눈을 빛냈다.
“아, 그러고 보니… 요전에 폐하께서 내게 인터넷에 대해 물어보셨는데.”
“인터넷?”
“아… 그 지구의 기묘한 정보망 말이로군.”
“거기서 폐하에 대한 여론이 어떤지 궁금해하셨다.”
네 기사단장들이 끄덕였다.
“과연… 안 좋은 말이라도 들으셨나?”
“인터넷이라는 곳은 온갖 낭설로 점철된 하수구 같은 공간이라더군. 폐하께서 상처 입으시지는 않으시겠지만, 회의를 느끼셨을 수도 있지.”
베요네타가 설녀처럼 웃었다.
“감히 폐하에 대한 낭설을 퍼트리는 자가 있다면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뼈만 남은 손이 그녀를 제지했다.
“아니, 진정해. 그런 의견이 있다는 건 아니었거든? 있기야 하겠지만.”
베요네타의 뒤에서 시커먼 기운이 이글이글 불탔다.
외신도 겁을 먹고 도망칠 것 같은 기운이다.
괜한 소리를 한 게 아닐까.
뒤늦게 아낙톤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꺼낸 말.
‘뭐 악플 다는 놈들은 처맞아도 돼.’
당장 아낙톤도 요즘 악플에 시달리고 있는데… 슬쩍 그놈들 중 일부를 베요네타에게 추적을 부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국에서 그런 놈들은 대가리에 도끼가 꽂히는데…….’
그때 크루엘이 식탁 위로 몸을 쑥 늘렸다.
“아니, 아직 악플 때문인 건 결정 난 게 아니잖아. 폐하가 그렇게 섬세한 사람이냐?”
“하긴…….”
“음… 그건 그렇죠.”
“그럼 내가 섬세하지 않다는 거냐?”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크루엘이 팔짱을 낀 모양을 갖추고 끄덕였다.
“섬세하기는커녕 그 뭐랄까… 무신경의 극치지, 극치.”
“호오…….”
“……?”
슬라임 같은 몸 안에서 물방울이 뒤로 돌아갔다.
요리 냄비를 쥐고 웃고 있는 이현의 얼굴이 보였다. 미소와 달리 이마에 맺힌 힘줄이 무시무시했다.
“폐, 폐하. 그게…….”
“닥쳐.”
빠악!
* * *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이현의 초조는 더욱 깊어갔다.
빈이의 앞에서는 멀쩡했지만, 이제 눈치가 없는 길가메시 눈에도 이현의 동요가 보일 지경이었다.
“형님. 왜 밥을 코로 드쇼?”
“앗. 크엑!”
휴지로 슥슥 코를 문질러 닦은 이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 참. 쪽팔리게.”
“요새 진짜 이상하군. 형님 혹시…….”
함께 식사하던 베요네타와 아낙톤의 눈이 길가메시의 입으로 모였다.
길가메시도 나름 이현과 오래 지낸 사이.
그라면 새로운 시각에서 이현이 꺼내지 않는 고민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좋아하는 여자 생겼소?”
“……!”
“……!”
잠시 멍하니 길가메시를 보던 이현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너냐? 여자 하나 때문에 징징거리게.”
평소라면 발끈한 길가메시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길가메시가 훗, 웃었다.
“사나이 길가메시, 더 이상 형님이 알던 그 길가메시가 아니오.”
“응?”
넓은 어깨를 당당하게 펼친 길가메시가 말했다.
“여신님과 데이트 약속을 잡았소.”
땡그렁!
이현의 손에서 수저가 떨어졌다.
베요네타와 아낙톤도 비슷하게 놀랐다.
이현이 심각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너 이 새끼… 결국…….”
이현의 몸이 덜덜 떨렸다.
감동과는 뭔가 다른 반응에 길가메시가 눈썹을 모으고 보는데…….
“저질렀냐?!”
“저지르긴 뭘 저지르오!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해서 받아놨다, 이 말이요!”
“그럴 리가 없는데.”
상대는 S급 헌터 웨어울프걸.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지만… 그거야 지구 기준이고.
그녀는 길가메시가 힘으로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다.
웨어울프걸의 태도가 워낙 강경하고, 길가메시도 스토킹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몇 년 전 이후로 별 신경을 안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데이트가 성사됐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의심스러웠다.
“임마! 너 그거 지구에서는 범죄야!”
“폐하, 제국에서도 범죄입니다.”
“아, 그렇지. 아무튼 당장 그만둬!”
“아니, 진짜 형님! 잠깐 이거 보시오!”
억울했는지 길가메시가 핸드폰을 펼쳤다.
저건 또 언제 마련했냐.
모두가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웨어울프걸로 보이는 여자와 길가메시의 톡 대화였다.
[길. 상수동 아리아떼에서 1시 맞죠?]
[맞습니다. 크하핫.]
[그럼 그때 뵐게요.]
[네! 크하핫.]
정상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모두가 경악했다.
“뭐… 뭐지. 두렵다.”
“크흠. 아무튼, 이 몸은 여신님과 잘될 예정이지. 형님도 연애 문제라면 이 내게 다 털어놓으시라, 이 말이오. 연애로 치면 이제 이 내가 선배이니. 크하하핫!”
이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범죄 아님 됐다.”
“자, 형님도 솔직담백하게 얘기해보시오.”
“아니야. 맞아도 너한테는 상담 안 한다.”
이현이 파리 쫓듯이 손을 휘둘렀다.
베요네타와 아낙톤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면 대체 폐하는 무슨 고민에 빠져 있는 거란 말인가.
* * *
이틀 후.
소파에 앉은 네 기사단장들의 눈이 시계추처럼 왼쪽으로 갔다 오른쪽으로 가기를 반복했다.
거실을 왔다갔다 하는 이현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따르르르릉!
갑자기 알람이 크게 울렸다.
이현의 핸드폰이었다.
우뚝 멈춘 이현이 비장하게 말했다.
“가자!”“예?”
“빈이 하원 시간이다!”
방에 들어간 이현이 정장을 입고 나왔다.
공식적인 행사에서나 입던 옷이다.
움직이기 불편하다고 싫어하던 옷을 자진해서 입다니.
‘역시 무슨 날인가?’
‘황녀님과 관련된 일이었군.’
‘근데 대체 뭐지?’
다들 어리둥절한 가운데 조용히 이현을 따랐다.
이현은 유치원까지 가는 동안 한마디도 안 하고 입을 꾹 닫고 있었다.
그 모습은 사뭇 비장하기까지 해, 아무도 감히 말을 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유치원에 도착하자 긴장은 절정에 달해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후우…….”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점검한 이현이 유치원으로 갔다.
아이들을 하원시키고 있던 선생님이 이현을 보고 반색했다.
“안녕하세요, 빈이 아버님!”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현이 평소와 달리 관절이 굳은 것처럼 인사했다.
“빈이는……?”
“아빠아!”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잔뜩 홍조가 오른 얼굴로 빈이가 뛰어나왔다.
상의는 곰돌이가 그려진 노란 셔츠에 하의는 발레리나 치마를 입은 난해한 패션.
신발도 짝짝이로 신었다.
이현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빈이가 자신의 의사를 고수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등원시키며 언제 한숨을 푹푹 쉬었냐는 듯, 이현은 두 팔 벌려 빈이를 안았다.
“아이구~ 우리 빈이~”
“아빠아!”
달려오던 빈이가 멈칫했다.
평소대로라면 폴짝 뛰어 아빠 품에 안겨야 하는데,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얼른 뒤로 숨겼다.
“빈아, 선생님한테도 인사해야지?”
“아.”
빈이가 몸을 돌렸다.
그 덕에 빈이가 뒤로 감추고 있던 것이 훤히 드러났다.
작은 하얀색의 쇼핑백이었다.
“선생님 안뇽히 계세요!”
“응~ 빈이 내일 봐요~”
“내일 봐요~ 헤헤헤.”
이현이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빈이를 바라봤다.
“우리 빈이 재미있게 잘 놀았나?”
“웅!”
빈이가 아빠의 눈치를 보며 게걸음으로 차에 탔다.
이미 들고 있는 것을 들켰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태도다.
어린아이다운 귀여운 모습에 네 기사단장들의 얼굴도 흐뭇하게 풀어졌다.
“아빠, 얼른 차에 타.”
“왜?”
“얼르은!”
소리가 등을 떠밀었다.
“그래그래.”
이현이 흐뭇하게 웃으며 차에 탔다.
그제야 기사단장들은 이현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긴장하고 초조했는지 알 수 있었다.
빈이가 감춘 저 선물 때문이었던 것이다.
대체 저 선물이 뭐기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현에게는 무척이나 기대되는 물건인 모양이었다.
그때 이현이 말했다.
“오늘은 다들 저녁 먹고 가라고. 응? 아, 그래. 사람을 좀 더 초대해야겠어.”
핸드폰을 든 이현이 갑자기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새로운 의문이 기사단장들의 신경을 사로잡았다.
‘뭔데 저래?’
* * *
매우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가끔 빈이의 방을 흘끔거리며 앉아 있던 이현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얼른 아무렇지 않은 척 자세를 바꿨다.
종종 걸어온 빈이가 손을 뒤로하고 아빠를 불렀다.
“아빵!”
“응? 왜?”
거실에 앉아 자기들끼리 블루마블을 하던 기사단장들이 어처구니가 없어 그 모습을 보았다.
‘연기 더럽게 못 하시네…….’
‘콧구멍 평수가 두 배가 되셨사옵니다, 폐하…….’
빈이가 뒤로 돌리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빨간 카네이션과 편지.
“헉!”
이현이 입을 틀어막고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우리 빈이… 어버이날 선물이야?”
“웅!”
유치원에서 단체로 만든 것. 빈이는 아직 그 의미도 제대로 모르겠지만…….
이현은 감동했다.
사실 이미 받기 전부터 감동하고 있었다.
덜덜 떠는 손가락이 편지를 열었다.
[아빠 사랑해요. 키워조서 감사합니다. 아빠가 최고야요.]
“크흡! 빈아… 아빠는 너무 좋아… 너무 감동이야…….”
열심히 키우면서도 항상 걱정됐다.
내가 잘 키우고 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을 받은 기분이었다.
“빈아. 고마워.”
잘 커줘서.
아빠를 사랑해줘서….
무엇보다… 아빠 딸이라서.
이현은 빈이를 와락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