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유치원에 가자 (1)
“시러! 안 갈래!”
빈이가 안전벨트를 꼭 붙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울먹이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대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표정.
그러나 이현은 더욱 표정을 험악하게 굳혔다.
“어허, 아빠랑 약속했지? 돌아오면 제대로 사과하기로.”
“철이가 시러하면 어뜨케?”
벌써 빈이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친하게 지내던 기사단장들의 이름도 잊어버린 빈이였지만…….
자기가 상처 입혔던 철이는 잊지 못했다.
눈앞에서 괴로워하던 철이의 모습이 빈이에게는 강력한 트라우마로 남은 것이다.
‘그나마 이렇게 낫기까지도 오래 걸렸지.’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빈이는 철이의 이야기를 꺼내면 다시 레비아탄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스스로 변신을 해제하는 것을 익히는 데 반년이 걸렸다.
그리고 철이에게 사과를 결심하는 데 다시 반년…….
그렇게 2년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막상 사과하려고 하니 또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철이가 싫어해도 사과해야지. 빈이가 잘못한 거니까 철이가 화를 내도 어쩔 수 없어. 아빠가 전에도 얘기했잖아?”
울먹이는 목소리가 물었다.
“철이가… 빈이 다시는 안 보겠다고 하면?”
빈이로서는 처음으로 맞이하는 역경이다.
아버지로서 당연히 이를 도와주고 싶었으나… 이것은 혼자서 넘어보지 않고는 의미가 없는 산이었다.
대신 사과하거나 그냥 넘어가 버리면, 앞으로도 빈이는 같은 일이 있을 때 이현을 쳐다볼 것이다.
행동에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현은 빈이의 머리를 당겨 안았다.
“빈이가 잘못한 거 사과도 안 하면 철이는 빈이 더 싫어할 거야. 아빠도 빈이한테 실망할 거고.”
자그마한 손이 이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빠, 조아해.”
“아빠도 빈이 좋아해. 그래서 아빠는 빈이가 실망 안 시켰으면 좋겠어.”
말을 하면서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빈이에게 반드시 시켜야 하는 교육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한참 그렇게 안고 있던 빈이가 마침내 끄덕였다.
“갈게…….”
“그래. 아빠가 옆에 있어 줄 테니까.”
* * *
“아… 안녕하세요…….”
빈이가 덜덜 떨며 원준에게 꾸벅 인사했다.
원준이 씩 웃으며 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이구, 우리 빈이. 공주님이 다 됐네. 예뻐졌네.”
반기는 반응에 빈이가 조금 용기를 얻은 듯 하얀 볼에 홍조가 돌았다.
빈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잘못해쪄여…….”
“응?”
다짜고짜 인사한 탓에 원준이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내 이유를 깨닫고 웃었다.
“그래, 사과해주니 고마워.”
빈이가 물기 어린 빨간 눈으로 원준을 바라보았다.
그때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빈이 만큼 훌쩍 큰 철이가 거실로 나왔다.
이현은 혹시 몰라 철이의 손을 바라봤다.
크루엘이 직접 치유했다더니… 화상 자국은 전혀 남지 않았다.
큰 상처였을 텐데 정말 다행이었다.
하긴, 흉터가 남았다면 원준도 지금처럼 유하게 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두 아이의 눈이 마주쳤다.
흠칫.
빈이가 잔뜩 움츠리고 겁에 질려서 이현을 보았다.
이현은 팔짱을 끼고 묵묵히 빈이를 내려다보았다.
‘믿는다, 빈아.’
망설이던 빈이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철이에게 다가갔다.
원준의 말에 의하면 그날의 일은 철이에게도 마음의 큰 상처였다.
당연히 철이는 2년이 지났음에도 빈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두 아이가 가까이 마주 섰다.
빈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철아…….”
또로록.
하얀 볼을 타고 커다랗고 맑은 이슬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울먹울먹하던 빈이가 뭉개진 발음으로 말했다.
“미안해…….”
잠시 빤히 빈이를 보던 철이가 빈이를 와락 안았다.
“비니다!”
빈이는 물론, 지켜보던 이현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예상 못했는데.’
“후에엥!”
간신히 막혀 있던 둑이 터진 듯, 빈이가 울음을 터트리며 철이를 안았다.
뒤에서 보고 있던 원준이 이현에게 말했다.
“철이는 예전에 빈이를 용서했어요. 계속 보고 싶다고 저한테 말했죠.”
“아하… 그랬나? 근데 왜 나한테는 얘기 안 해준 거야?”
“그걸 얘기하면 오히려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요.”
이현은 펑펑 우는 빈이를 보며 쓰게 웃었다.
“하긴 그랬겠군.”
철이가 용서했다고 하면, 이현의 마음도 조금 약해져서 다른 마음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빈이가 저렇게 슬퍼하고 가기 싫어하는데 굳이 보내야 할까~ 하고.
하지만 와서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인연이 어디까지 갈지는 몰라도…….
이 경험을 계기로 빈이는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는 것이다.
“유치원에서 마주쳐도 어색할 일 없게 돼서 다행이야.”
“하하하.”
* * *
“이거… 긴장되는군.”
이현은 정장 넥타이를 고치며 중얼거렸다.
그의 옷매무새를 고쳐주던 힐데가 피식 웃었다.
“꼭 폐하의 대관식 때처럼 긴장하시는군요.”
“우리 빈이 입학식인데 당연하지.”
평소에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는데…….
입학식을 생각하면 심장이 아팠다.
우리 빈이가 따돌림받으면 어떡하지… 시킨 놈들은 죽일 거지만.
우리 빈이가 긴장해서 실수라도 하면 어떡하지… 비웃는 놈들은 죽일 거지만.
음식이 입에 안 맞거나 환경이 안 맞으면…….
내일 아침 할 입학식을 생각하니 심부전이 올 것 같았다.
“이럴 때일수록 걱정은 줄이셔야 합니다. 폐하의 긴장이 황녀마마께 전염될 테니까요.”
“나도 아는데 쉽지 않다고.”
이현이 한숨을 푹 쉬는데…….
쾅!
문을 열고 빈이가 들이닥쳤다.
드레스 두 벌과 요술봉을 손에 든 상태다.
“아빠! 이거 어때!”
하나는 고딕풍, 하나는 르네상스풍의 드레스다.
우리 빈이에게 뭔들 어울리지 않겠냐만…….
“입학식에 그거 입고 가게?”
빈이가 밝게 웃었다.
“응!”
너무 눈에 띈다.
너무 화려하다.
그야 특별한 기념일이니만큼 아이답게 눈에 띄고 예쁘고 싶겠지.
하지만… 정도가 있다!
게다가 저 손에 든 요술봉은 장난감이 아니라 진짜 아티팩트다.
그것도 고위 마법 ‘운석 소환’이 담긴 S급 아티팩트.
유치원을 재앙의 현장으로 바꿀 수 있는 무시무시한 물건인 것이다.
“빈아. 요술봉은 빼자.”
“왜? 시러!”
“아빠가 마법 물건 함부로 쓰는 거 아니랬지.”
“시러! 시러어! 마법 안 쓸 고야! 후에에엥!”
주저앉은 빈이가 빼액 울음을 터트렸다.
환장하겠다.
“그럼… 요술봉이랑 드레스 둘 중 하나만 허락해줄게.”
최후통첩.
울먹이던 빈이가 요술봉과 드레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구롬… 구롬 드레스 하나만 돼요?”
“응? 당연히 빈이 몸이 하난데 드레스도 하나지.”
“아닌데.”
빈이가 양손을 들었다.
“갈 때랑 올 때.”
아… 그렇구나…….
왜 아빠는 그렇게 창조적으로 생각하지 못했을까…….
가슴 깊이 반성이 됐다.
하긴 요새 아침, 점심, 저녁으로 갈아입고 있으니 그 정도는 기본이겠지.
“빈아. 올 때는 아무도 안 보니까 필요 없지 않을까?”
“내가 보는데.”
그렇다. 존귀하신 황녀님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 그렇구나… 그랬지.”
이현의 미간에 깊은 고뇌가 들어찼다.
“아!”
빈이가 벌떡 일어났다.
‘그래! 빈이 너도 사실 귀찮지?’
희망을 갖고 보는 이현에게 빈이가 밝은 얼굴로 외쳤다.
“요거는 마음에 안 드러! 다른 거 가져올게요!”
잡을 틈도 없이 빈이가 쪼르르 방을 나갔다.
이현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큰일났다. 이거 잘 수 있나, 오늘?”
빙긋 웃은 힐데가 방을 나갔다.
“카페모카를 준비해드리지요.”
“…….”
* * *
대한민국의 사교육 열풍은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한 이후로도 별로 식지 않았다.
오히려 형태만 바뀌었을 뿐 건재하다고 볼 수 있었다.
신화 유치원의 입학식에 몰린 사람들의 면면이 이를 방증했다.
하나같이 정,재계의 유력 인사들의 아내.
부티 나는 옷을 입고 일부는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대동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신화 유치원은 대한민국에서는 처음으로 조기 마력 교육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굳이 헌터로 키우지 않더라도 마력이 몸을 강하게 해주고… 특별한 스킬은 살아가는 데 어마어마한 도움이 된다.
유치원 때부터 마력을 교육받은 아이들이 커다란 이점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
심지어 신화 유치원의 교육 과정에는 현직 A급 헌터의 강의도 준비되어 있었다.
“어머? 저 아이는 뭐람?”
몸에 착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은 한 여자가 꾀죄죄한 소년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기름기 흐르는 머리. 땟국물로 까맣게 번들거리는 소매와 얼룩덜룩한 피부. 표정도 어둡다.
다른 학부모들의 시선도 소년에게 쏠렸다.
일부 학부모가 비슷한 경멸을 내비쳤다.
“어머…….”
“꼴이 저게 뭐야.”
“부모가 관리를 안 하나?”
그때 처음 소년을 발견했던 여자가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녀, 한혜린은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에 꼽는 건설사인 성무건설의 며느리였다.
“얘, 너 부모님이 누구니?”
“왜 그러시죠?”
허름한 옷을 입은 여자가 겁에 질린 아이를 감쌌다.
그녀를 위아래로 본 혜린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 그래, 기초생활수급자 전형으로 들어오신 분이군요?”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에 여인이 어깨를 움츠렸다.
국가에서는 모든 유치원에 법으로 기초생활수급자들의 자녀들을 최소 셋 이상 받도록 지정했다.게이트 사태 이후 이상하게도 오른 출산율을 감당하기 위한 정책이었는데…….
혜린은 이런 정책이 평소부터 마음에 안 들던 참이었다.
원래 가난할수록 폭력성이 높다는 어느 연구 결과도 본 적이 있고… 더러운 질병 같은 것이 옮을 가능성도 있다.
아이 교육에 좋을 리가 없다.
실제로 저 더러운 몰골을 봐라.
“같은 애 가진 엄마 입장에서 좋은 데서 교육시키고 싶다는 마음은 알겠는데, 너무한 거 아닌가요? 최소한 애를 씻겨서는 보내야지. 냄새도 나는데… 우리 애들한테 뭐 이상한 거 옮으면 그쪽이 책임질 거예요?”
“죄송합니다. 애가 씻기를 힘들어해서요…….”
“무슨 이상한 소리예요? 당연히 씻기든가 알아서 해야지!”
표독스러운 외침에 다른 학부모들이 동의했다.
“그래요!”
“애 못 씻기는 게 자랑인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다수의 의견이 압력이 됐다.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잘 씻겨서 보낼게요.”
혜린은 팔짱을 끼고 쌍심지를 켰다.
“됐고. 난 그 애 우리 애랑 같이 있는 꼴 못 봐요. 나가서 씻겨서 데려오던가 해요.”
“예? 하, 하지만.”
이제 곧 입학식이 시작이다.
근처 사우나에서 물만 끼얹고 온다고 쳐도 20, 30분은 족히 걸릴 텐데…….
그 후에 돌아오면 입학식에 늦어버릴 것이다.
그것도 정상적으로 유치원에 들어올 수 있었을 때의 얘기지, 만약 문이라도 걸어 잠그면…….
쫓아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느꼈기에 가난한 여인은 겁을 먹으면서도 물러날 수 없었다.
그러자 압력이 더욱 거세졌다.
“빨리 안 나가요?”
“나가서 씻기란 말이야!”
“짜증 나게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때 벌컥 문을 열고 이현이 안에 들어왔다.
모두가 휘둥그레 뜬 눈으로 그를 보는데…….
햇빛을 등진 이현이 빈이의 손을 잡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