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초월자의 귀환 (3)
“그래서요?”
지애의 싸늘한 눈빛에 서류를 들고 있던 남자가 굳었다.
“예, 그… 그러니까, 이번 협회 심사에서 탈락한 분들 중에 저번에 파티에서 보신 김 판사님의 자제분께서 계셨거든요. 그래서 그 기수만 이제 한 번 더 검토를 해봤는데, 우연찮게 김 판사님 자제분께서 헌터 적성에 맞으시더라고요.”
김 판사.
저번 파티에서 음흉스레 가슴골을 쳐다보던 중년 남자의 얼굴이 지애의 뇌리에 스쳤다.
“누가 그런 의견을 냈죠? 박 책임님?”
박 책임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의 손에서 서류가 펄럭거렸다.
“어유, 저는… 저는 당연히 아니죠.”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오늘 옷 벗을 사람이 한 명뿐이라는 얘기니.”
싸늘한 목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김 판사 자제분 포함해 재검토한 합격자들 전부 탈락시키세요. 박 책임님은 오늘 내로 그 검토한 사람 찾아서 내 앞에 데려오시고. 못하면 박 책임님이 옷 벗습니다.”
돌부처가 된 박 책임에게 얼음장 같은 시선이 향했다.
“안 나가요? 오늘 바쁘실 텐데?”
“아… 네! 넵!”
아마 박 책임은 이제 꽤나 바쁘게 움직이겠지.
하지만 그가 누굴 데려오든 상관없다.
어차피 둘 다 해고니까.
지애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지압했다.
최근 협회의 기강이 많이 해이해졌다.
제국의 협력 덕에 헌터들의 업무는 주로 치안 유지에 돌려지고, 부상 및 사망률도 60% 가까이 줄어들었다.
심지어 제국은 게이트에서 나온 아티팩트를 대부분 헌터들에게 양보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에서,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이 된 것.
그래서인지 헌터 자격증을 얻기 위한 부정 청탁이나 서류 조작 등이 부쩍 늘었다.
찾아내 쳐내도 끝이 없을 지경.
게다가 이를 거부하면 말도 안 되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협박하거나 기자들을 이용하여 협회와 소속 헌터들에 대한 좋지 않은 선전을 펼쳤다.
‘이 인간들은 우리가 지구를 구했다는 걸 알고는 있나?’
진짜 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씩 때리고 싶은 심정이다.
꾹꾹 머리를 지압하던 손을 내리는데…….
팔랑.
머리카락이 손에 딸려왔다.
“헉.”
지애는 휘둥그레 눈을 떴다.
스트레스성 탈모인가.
이 나이에!
“아으으!”
아무래도 잠깐 안마의자라도 쓰고 와야겠다.
지애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는데…….
우우웅!
우우웅!
책상에 던져놓았던 핸드폰이 마구 울렸다.
“뭐야?”
좀 쉬려고 했더니 누가 전화를?
험악한 표정으로 핸드폰에 접근한 지애는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굳었다.
[이현]
“…어?”
우우웅!
우우웅!
지애는 눈을 비볐다.
꿈인가?
어째서 이현의 번호로 전화가 온단 말인가.
그는 지금 실종 상태인데.
지애는 자신의 뺨을 살며시 꼬집어보았다.
아프다.
덜덜 떠는 손이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여보세요?”
-오, 지애 씨. 난데.
어루만지는 듯 부드러운 중저음.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목소리였다.
“마…왕님?”
손에서 핸드폰이 스르륵 미끄러져 떨어졌다.
“엄맛!”
지애는 S급 헌터도 놀랄 손놀림으로 재빨리 핸드폰을 다시 받았다.
-응?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왕님 맞으세요?”
-어, 나 맞지. 반응 보니 그쪽도 얘기를 제대로 못 들은 모양이군.
한숨 소리가 들린 후, 이현이 말했다.
-전화로 하기는 좀 그렇고… 내가 밥 해주기로 했었지? 오늘 시간 되나?
“당연하죠! 어… 언제 가면 될까요?”
조금이라도 늦게 대답하면 이현이 말을 바꿀라, 지애가 큰 소리로 물었다.
-음… 7시 전에만 와.
“네!”
* * *
‘꿈이 아니었을까?’
지애는 핸들을 잡고 멍하니 생각했다.
2년만에 갑자기 연락이 와서 집에 초대라니.
하지만 몇 번이나 확인해도 통화 목록에는 이현의 이름이 분명하게 떠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빠앙!
갑자기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어느새 신호가 바뀐 상태.
“아!”
지애는 정신을 차리고 액셀을 밟았다.
그러나 아파트 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에도 그녀는 지금이 꿈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딩동.
초인종을 누른 지애는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 침을 꿀꺽 삼켰다.
곧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덜컹. 끼익.
붉은 눈빛이 번쩍 빛나고.
새하얀 얼굴이 나타났다.
뼈만 남은.
“힉!”
설마, 이현의 집이 괴물에게 점령당한 것인가!
지애는 황급히 가방에 손을 넣었다가…….
스켈레톤이 친근한 차림임을 깨달았다.
커다란 박스티.
“아… 아낙톤 씨?”
키르단 제국의 죽음의 기사단장 아낙톤.
협회 소속 네크로맨서의 말에 의하면, 최상위 소환수인 데스나이트로 보인다나.
하지만 제국의 기사단장이고 막강한 힘을 지닌 만큼 데스나이트 이상의 존재일 것이다.
어쨌든 종종 만난 적이 있었다.
“오.”
스켈레톤, 아낙톤이 뒤를 돌아보았다.
“형님! 손님입니다! 그… 이쪽 세계 공주님이라셨나?”
“아… 하하, 그건 아니고. 유지애 이사라고 합니다.”
“이사가 공주님 같은 거 아냐? 아니, 왕비님인가?”
“굳이 따지자면 왕비 쪽에 더 비슷… 아니, 이현님 계신가요?”
그때 안에서 이현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지애의 눈이 커졌다.
청바지에 흰티라는 단출한 차림으로도 빛이 나는 미모.
뿌연 빛이 외곽선을 그리는 것 같다.
그가 씩, 익숙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네.”
지애는 아낙톤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현 씨!”
달려가 안기고 싶은 마음을 그나마 억누른 것이다.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바라보자 이현이 당황했다.
“아니… 설마 나 죽었다고 들었어?”
“아뇨… 그건 아니지만. 흐윽… 후에에엥!”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한 지애를 보고 이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그때 빈이의 방 문이 빼꼼 열렸다.
인형을 안고 나온 빈이가 우는 지애와 그 앞에 선 빈이를 보았다.
빈이의 품에서 인형이 스르륵 떨어졌다.
“아빠가 울렸어.”
“……?!”
* * *
보글보글.
갈비찜과 김치찌개, 김치전.
호화로운 한식으로 가득한 상을 보며 지애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요새 스트레스가 많아서요.”
“아니, 뭐, 괜찮아. 그럴 수 있지.”
빈이가 옆에서 지애의 어깨에 손을 척 올렸다.
“우리 아빠가 나쁜 남자니까 언니가 참아요.”
그러고는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고 이현을 본다.
“어휴, 참 걱정이라니까.”
어디 드라마라도 본 말투다.
이현이 공허한 웃음을 지으며 수저를 쥐었다.
지애는 놀라서 빈이를 보았다.
“빈이 언제 이렇게 말 잘해졌지?”
“저 원래 말 잘했어요. 말 잘 배워요!”
빈이가 수저를 들며 또박또박 말했다.
보기에는 4, 5살 정도인데… 10살이라고 봐도 좋을 만한 어휘력이다.
‘하긴 빈이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지.’
“그런데 대체 어디에 갔다 오신 거예요? 그것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다들 걱정했다고요. 물론 저도 그렇고요.”
사실 걱정 정도가 아니라 사회에 혼란이 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보호해주던 사람에게 당신이 없어서 힘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물에서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꼴이라 말할 수가 없었다.
이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응, 그건 진심으로 미안.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거든. 뭐 말을 남길 틈도 없어서.”
큼지막한 고기를 흡입하듯 입에 넣던 빈이가 말했다.
“아빠가 언니 고기 훔쳐 먹었어요?”
“응?”
“아빠 자주 그래요. 욕심쟁이.”
와앙.
고기를 문 빈이가 눈을 흘겼다.
“어허, 빈아. 딱 한 번 그런 거 갖고.”
“한 번 아닌데. 다섯 번인데.”
“…미안.”
무슨 꽁트 같다.
하지만… 여전히 사이좋은 부녀였다.
지애가 푸근하게 웃었다.
“제게 사과하시지는 않으셔도 돼요. 그냥 방송에만 좀 나와주시면.”
“방송……?”
“요리 프로는 어떠세요? 음식 잘하시는데.”
방금 먹은 갈비찜도 단순한 갈비찜이 아니라… 어디의 50년 전통 한식 장인이 만든 것 같은 깊은 맛이 난다.
자연스러운 복귀로 요리 방송이 괜찮지 않을까?
이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방송은 좀 힘들 것 같은데. 우리 빈이 유치원 보내야 하거든.”
“유치원이요?”
빈이가 수저를 놓았다. 뾰로통한 얼굴이었다.
“난 유치원 시른데. 아빠랑 계속 여행 다닐래.”
“으음? 빈이 아빠랑 약속했는데. 유치원도 가고 철이한테도 제대로 사과하기로.”
“우우…….”
입술을 댓발 내민 빈이가 몸을 움츠렸다.
지애는 그 모습에 갸웃했다.
‘철이? 그건 또 누구지?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기는 한데.’
“그래서 말인데 말이야.”
이현의 시선이 지애를 향했다.
“지애 씨가 좀 우리 빈이 호적에 올리는 것 좀 도와줄 수 없나?”
“호적이요? 아직 안 올리셨나요?”
“내가 오랜만에 한국을 와서 적응이 안 됐거든. 유치원에 가려면 가족관계 증명서인가… 뭔가를 떼오라더라고. 협회가 원래 각성자들 정착도 도와주고 하잖아?”
“아, 그렇겠죠, 아마도.”
아이를 낳기는커녕 결혼도 안 해서 잘 모르겠지만.
‘내가 이현 씨 가족이었으면… 아니, 내가 뭔 생각을!’
지애는 괜히 혼자 얼굴이 뜨거워져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빈이의 호적처럼 사적인 일을 내게 맡겨주신다는 건… 이현 씨도 내게 호감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오시자마자 나한테 전화도 해주셨고…….’
무릎 위로 불끈 주먹을 쥔 지애가 끄덕였다.
“네, 그 정도는 도와드릴 수 있죠.”
“땡큐. 아, 밥 많이 있으니까 모자라면 더 먹어.”
그때 게이트가 이현의 등 뒤에서 열렸다.
커플룩처럼 흰 티에 청바지를 입은 베요네타가 나오다가… 지애를 보고 흠칫했다.
‘저 여자가 왜 폐하와 밥을 먹어?’
그런 눈빛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신가요.”
두 여인의 눈빛이 잠시 허공에서 교차했다.
본능적인 촉이 서로를 연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아, 언니 안뇽~”
빈이에게 살갑게 손을 흔들어준 베요네타가 지애를 다시 한번 본 후, 이현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말씀하신 물건들을 준비해놓았사옵니다.”
“그래? 밥만 먹고 갈게. 아, 넌 저녁 먹었어? 같이 먹을래?”
“그… 그래도 되겠사옵니까?”
“안 될 게 뭐 있어.”
지애는 뾰로통하게 이현을 쳐다봤다.
‘단둘이 식사일 줄 알았는데…….’
그와 저녁도 먹고, 술도 좀 같이 마시다 보면 깊은 속내도 꺼낼 수 있는 거고, 그러다 보면 정분도 나고…….
여러 가지 가능성이 사라졌다.
지애는 베요네타의 존재가 매우 달갑지 않았다.
딩동!
갑자기 울린 초인종 소리에 이현이 일어났다.
“먹고 있어.”
문이 열리는 소리 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으하하핫! 형님! 돌아왔다니 정말이었군!”
“길가메시, 네가 웬일이냐. 옆에는… 아들이냐?”
“응? 아니, 형님이 맡긴 제자면서 못 알아보기요?”
“제자…? 엑? 네가 걔라고? 근데 너 이름이 뭐였더라?”
“…민수요.”
“오! 그래, 민수! 이야… 아니… 너 너무 부풀었잖아. 키도 컸고. 길가메시, 너 애한테 약물이라도 꽂았냐?”
“이 몸의 철저한 훈련 덕이지, 무슨 약물이오? 응? 킁킁… 이 냄새는……!”
길가메시가 중문 너머로 얼굴을 쑥 내밀었다. 눈이 마주친 베요네타와 지애의 얼굴이 동시에 싸늘하게 굳었다.
‘왜 자꾸 사람이 느는 거야.’
그러나 길가메시는 눈치가 없었다.
“오! 맛있겠구만! 형님, 우리도 좀 같이 먹읍시다!”
“…마음대로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