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실연 (3)
콰르르릉!
그냥 걷는 여파만으로 지진이 일어나며 건물이 무너졌다.
기사단원들과 베요네타가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인 상황.
당연하다.
진원지를 제거하지 못하는 이상 파괴는 막을 수 없다.
“빈아!”
이현이 빈이의 눈앞으로 뛰어올랐다.
“빈아! 아빠야!”
빈이의 눈을 채운 우주 속에서 새카만 블랙홀이 그를 응시했다.
금색의 날개가 채찍처럼 휘며 그를 후려쳤다.
퍼억!
파리채에 맞은 파리처럼 날아간 이현이 건물에 박혔다.
건물이 부서지며 이현을 깔아뭉갰다.
“폐하!”
베요네타의 비명을 들으며 이현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저것은 불완전한 상태로 태어나 영원히 불완전하게 살아갈 것이니.
문득, 레비아탄 문소드의 말이 떠올랐다.
“젠장!”
휘두른 주먹에 파편이 솟구쳤다.
벌떡 일어난 이현이 다시 날아올랐다.
불완전한 존재라서… 어쨌다는 거냐.
설령 장애가 있었더라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의 책임이자… 사랑이니까.
“빈아! 제발 아빠 말 좀 들어!”
땅에서 솟구친 이현의 문자가 빈이의 전신을 묶어 정지시켰다.
빈이가 크게 입을 벌려 불을 쏘려고 했지만, 그 주둥이도 문자에 휘감겨 강제로 다물렸다.
철컥.
“크윽…….”
대형견을 입마개 하라는 말에 반발하는 견주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이해가 안 갔는데…….
지금, 그 마음이 약간이나마 이해가 됐다.
딸에게 힘을 쓰는 것만으로 가슴에 균열이 나고 용암이 펄펄 끓었다.
“빈아, 아빠 말 들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응?”
묶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도저히 가슴이 아파할 수 없었다.
애원할 수밖에.
이현은 빈이의 묶인 입을 살며시 토닥였다.
“빈아, 아빠야.”
그 순간, 빈이의 몸이 번쩍 빛났다.
몸을 묶던 이현의 문자가 안에서 밀려 나온 똑같은 문자에 풀렸다.
빈이에게 걸었던 이현 자신의 힘이었다.
“이런…….”
예상치 못했다.
그 자신이 건 보호마법에 힘이 막히다니.
하긴, 빈이를 위협하는 모든 힘을 막게 만들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이런 사태를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겠나.
게다가…….
“우리 빈이 힘, 아빠랑 비슷하네.”
빈이가 지닌 고유한 힘도 이현과 흡사했다.
마력을 흡수하며 닮은 것일까.
어쩌면 전에 카오스 신들에게 흡수당했던 힘은… 빈이의 고유한 힘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놈들 때문에 힘이 불안정해진 탓일까?’
그때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졌다.
“크아아아!”
날카로운 이빨이 잔뜩 난 거대한 입이 이현을 덮쳤다.
콰드득!
이현이 피하자, 건물을 대신 물은 빈이가 고개를 흔들어 잔해를 털어냈다.
이글거리는 한 쌍의 은하가 이현을 향했다.
“제기랄!”
그때 새로운 목소리가 도착했다.
“폐하!”
날아온 아시스가 이현의 옆에 섰다.
이미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그도 침통한 표정이었다.
“잘 왔다, 아시스! 나랑 빈이를 방패에 가둬!”
“예?”
놀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빨리!”
“아… 알겠습니다!”
일단 피해를 줄여야 한다.
사람들도 사람들이지만… 이 많은 사람들의 피를 빈이 손에 묻힐 순 없다.
‘만약 돌아올 수 없다면?’
빈이가 문소드의 말대로 그저 불완전할 뿐인 존재라… 영영 저 모습으로 살아야 하고 다시는 이성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이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도… 아빠는 빈이 곁에 있을 거야.’
그 시간이 영원이라면 영원히.
그럴 각오도 없는 아빠가 아니다.
하지만…….
“아빠는 빈이가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어, 빈아.”
이런 일에 마음 아파하고 귀엽고 똑똑한 우리 딸로.
아빠를 보며 방긋 웃는 그 얼굴로.
이현은 펄쩍 뛰어 빈이의 머리에 올랐다.
동시에 아시스가 방패를 작동했다.
거대한 결계가 삽시간에 빈이와 이현을 삼켰다.
“힘내십시오… 폐하……!”
아시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결계를 완전히 발동했다.
결계의 정육면체가 일순간 사람 하나 감쌀 정도의 크기로 줄어들었다.
한 차원에 해당하는 강력한 힘.
그러나…….
펼쳐진 거대한 초원 위로 빈이가 몸을 굴렸다.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이던 빈이가 더욱 분노를 불태웠다.
수십쌍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꼬리부터 머리까지 빛이 이동했다.
강력한 힘이 빈이의 머리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런!”
이현은 입을 막으려다가 멈칫했다.
이만한 힘을 지금 강제로 막으면 힘의 역류로 빈이 자신이 다칠지도 모른다.
‘결계가 버티기를 바라는 수밖에!’
쿠아아아!
금색의 불꽃이 뿜어져 결계를 강타했다.
끼이이익!
세계가 나무 뒤틀리는 소리를 내며 뒤흔들렸다.
어마어마한 힘이다.
“어지간한 신은 상대도 안 되겠군. 역시 내 딸이야.”
이현은 빈이의 고개를 강제로 옆으로 꺾었다.
어쨌건 힘이 한 점에 집중되는 것보다는 분산되는 게 낫겠다 싶어서 한 행동인데…….
콰드드드득!
불길이 결계를 길게 긁었다.
금색의 선이 하늘을 불태우며 이어졌다.
금이 간 하늘에서 제국의 풍경이 언뜻 비쳤다.
“아시스의 결계를 한 방에?”
키이이잉!
빈이의 몸이 다시 빛났다.
다시 힘을 발산할 셈.
그러나 이번에는 이현이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빈아! 사춘기가 너무 빨리 왔잖아!”
이현의 힘이 다시 한번 빈이를 휘감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구속이 아니다.
흐르는 물에 바위가 움직이듯.
이현의 힘에 빈이가 모은 힘이 흩어졌다.
쿠르르르.
한껏 모은 힘이 사라진 반동이 컸는지, 빈이가 털썩 엎드렸다.
콧김에 흩날리는 수풀 사이로 이현이 내려섰다.
“이래도… 안 풀리나?”
마력이 흩어지면 변신도 풀릴 거라 생각했는데…….
‘단순한 변신이 아니야.’
변신이라기보다는 변화에 가까운 모습.
아니, 문소드를 생각하면 오히려 이것이 빈이의 본모습일지도 모른다.
이현은 빈이의 미간에 달라붙어 이마를 툭툭 쳤다.
“빈이 너! 자꾸 이러면 아빠가 때찌한다!”
그간 어떤 어리광이든 멈추게 만든 마법의 주문, 때찌.
그러나 그 말에도 빈이는 아랑곳 않고 그르렁거렸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아예 이성이 없는 건가?’
쿠르르…….
빈이가 몸을 꿈틀거리자, 몸을 묶은 힘이 흔들렸다.
너무나 강력한 힘이다.
근본적으로 동질에 가까운 힘이라선지 제대로 제압이 안 됐다.
‘미치겠네.’
지금까지 겪은 모든 상대 중에 가장 까다롭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대로 계속 가둬둘 수도 없다.
빈이의 힘이 너무 강력했다.
아마 이현이 묶어두지 않는 한 순식간에 결계를 부수고 나올 것이다.
이 와중에 아버지로서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어쨌든 대책을 찾아야 했다.
-폐하!
“응?”
갑자기 이현의 눈앞에 꾸물거리는 물방울이 나타났다.
거기서 기계음이 섞인 크루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크루엘입니다. 들리시나요?
“어, 들리는데… 뭐냐, 이건?”
물방울을 손으로 톡 건드리니 젤리같은 탄성이 느껴졌다.
원래 이 결계는 적을 가두는 용도.
당연히 바깥과의 통신도 차단하기에 이현도 결계가 유지되는 동안은 바깥과 연락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연락을 하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혹시 몰라 말씀드리는데 쉽게 터지니까 건드리시면 안 됩니다.
“…아 그러냐?”
얼른 손을 뗀 이현이 뒷짐을 지었다.
-우선 폐하의 질문에 답을 드리자면… 이건 제가 개발한 양자통신 시스템입니다. 양자 간 흔들림을 통해 연락하기 때문에 설령 차원이 차단되어 있더라도 연락할 수 있는 것이죠.
“오, 그렇군. 완벽하게 이해했어.”
전혀 이해 못한 이현의 말투가 서글펐는지 크루엘이 잠시 침묵했다.
-…아무튼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혹시 블랙스톤 광산 기억하십니까?
“어… 아니.”
-하긴 폐하께서 기억하실 리가 없죠…….
쯔쯔.
혀를 차는데… 안 그래도 심란한데 열이 받는다.
“그래서 뭐, 임마.”
-크흠, 블랙스톤 광산은 ‘끝없이 탐식하는 공허’의 힘을 봉인해둔 곳입니다.
“뭐? 그걸 왜 거따 봉인해?”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돌아왔다.
-폐하께서 그 힘이 쓸만하다고 봉인하자고 하셨거든요.
이현의 목소리가 절로 유해졌다.
“내가… 그랬나?”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날까…….
-네, 그랬죠. 그럼 그놈 힘도 기억 못하시겠군요. 놈은 모든 것을 먹어 치워서 소화시켰는데, 그 전에 상대의 힘을 빼내서 무력화시켰죠.
“응? 아… 그래서 쓰레기통으로 쓰자고 했던가?”
물방울이 쭉 목을 뺐다.
-오, 기억나셨나요?
“아니, 지금 생각난 건데.”
-…아무튼 그래서 블랙스톤에 놈을 봉인해두었는데, 놈의 힘이라면 황녀님의 힘도 삼킬 수 있지 않을까요?
상당히 그럴듯한 이론이다.
끝없이 탐식하는 공허는 아자토스와 비교해도 우위를 가리기 힘든 강력한 외신이었다.
놈의 힘이라면, 비록 타다 남은 재에 불과한 힘이라도 빈이에게 효과를 발휘하겠지.
“빈이가 상처 입을 수도 있어.”
-…….
암을 방사선으로 치료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피폐해지는 이유는, 방사선이 암세포뿐만이 아니라 주변 세포도 함께 파괴하기 때문이다.
크루엘의 제안이 바로 그 방사선 치료와 마찬가지.
빈이의 몸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 있었다.
쿠르릉!
그때 빈이가 꿈틀 움직였다.
세계가 진동하며 방금 전 빈이가 브래스로 만든 균열이 더욱 커졌다.
이현은 더욱 힘을 집중해 빈이를 묶었다.
“꾸어어엉!”
몸을 묶는 힘이 아픈지 빈이가 비명을 질렀다.
저도 모르게 힘을 빼자, 빈이가 사납게 몸을 뒤흔들었다.
콰릉! 쿠궁!
반짝거리는 파편들이 세계 곳곳에서 떨어졌다.
결계가 무너지고 있다.
꽉 쥔 이현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눈이 벌겋게 충혈됐다.
-폐하. 송구합니다만… 빨리 결정하셔야 합니다.
“알아! 좀만 기다려!”
자책과 후회가 수렁처럼 몸을 끌어당겼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았으면…….
예방할 방법을 찾았더라면…….
으득.
어금니를 꽉 깨문 이현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목소리가 힘겹게 잇새를 비집고 나왔다.
“실행… 해.”
-알겠습니다.
이현은 힘을 줘 빈이를 억눌렀다.
고통에 빈이가 격렬하게 떨며 신음했다.
“끄르르르…….”
등의 날개들이 전기가 부족한 전구처럼 깜박거렸다.
“조금만… 조금만 참자, 빈아.”
블랙스톤까지 이동하는 잠깐의 시간이 천 년처럼 느껴졌다.
이동하는 동안 몇 번이나 마음을 바꾸고픈 충동이 일었다.
도착하면 빈이를 기다리는 것은 고통.
하지만…….
‘이대로 놔둘 순 없어.’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원래 그가 알던 빈이가 이 괴물에 잠식되어 완전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에 비하면 빈이가 조금 다칠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폐하, 도착했습니다!
“그래.”
퍼엉!
균열을 중심으로 결계가 산산조각 났다.
수백 미터 상공에 이현과 빈이가 풀려났다.
아래로 시커먼 광산의 입구가 보였다.
말이 광산이지 지상에 생긴 블랙홀처럼 어둡고 깊은 구멍이었다.
안쪽에서 느껴지는 강력하고 음산한 힘에 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제국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혔던 힘이다.
이제는 의지도 없지만… 남아 있는 잔재만으로 한때의 끔찍함이 느껴졌다.
저곳에 빈이를 넣어야 한다니.
“제기랄!”
이현은 눈을 질끈 감고 빈이를 아래로 밀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