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딸
아득한 과거의 어느 날.
이현은 용암 속에서 이글거리는 알을 발견했다.
“엥?”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산에 올라온 이유는 ‘그냥 오름직한 산이 있어서’였다.
친구는커녕 말할 사람도 없이 오랜 시간 홀로 돌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목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어린 시절 ‘이 블록에서 저 블록까지 금 밟지 않고 가기’ 같은 쓸데없는 놀이를 고안하고 즐거워하던 경험에서 떠오른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걸어 다니거나 산을 오른다.
그런 사소한 목표를 세우고 이루는 것만으로 오늘을 살 힘을 얻는다.
지구로 돌아갈 때까지…….
“알이라.”
이현은 태어나 처음 알을 발견한 사람처럼 화산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성한 수염에 하반신만 나뭇잎으로 가린 차림.
철퍽철퍽.
발아래에서 용암이 밟혔지만… 이런 것에 피해를 입지 않게 된 지도 오래됐다.
이현은 알을 주웠다.
“오랜만에 계란후라이 해먹겠네!”
그러나 이현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이걸… 먹는 게 가능한가?”
일단 껍질이 너무 단단했다.
최선을 다하면 깰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힘 조절을 잘못해서 산산조각을 내버리면?
용암에 있던 것이 불에 올려놓는다고 익을 리가 없다.
“어쩐다.”
알을 안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두근.
안에서 희미한 맥동이 느껴졌다.
“유정란이었나.”
살아있다.
그걸 알게 되자 갑자기 동정심이 치밀었다.
부모도 없이 버려진 알.
화산 속에서 홀로 불타고 있었던 모습.
“좋아, 넌 이제부터 윌슨이다!”
이현은 알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의 손에서 황금색 빛이 흘러나와 알을 감쌌다.
“깨지면 안 되겠지.”
이때의 이현은 아직 마법에 대해 잘 몰랐다.
그냥 몸을 보호하듯이 힘 자체를 알에 두를 수밖에 없었다.
두근.
힘에 반응하듯, 알이 다시 한 번 맥동했다.
* * *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요?”
무너진 폐허가 만들어낸 작은 동굴.
먼지를 뒤집어쓴 스켈레톤이 알을 살며시 두드렸다.
톡톡.
화강암같은 껍질이 돌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생명체같지 않은 둔탁한 소리다.
노란색 물감으로 껍질에 그려진 얼굴이 공허한 시선을 스켈레톤에게 향했다.
옆에서 그를 보던 이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일 년에 한두 번 두근거린다니까. 나한테만.”
“뭐 그런 거로 합시다…….”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젓는 모습이 매우 불쾌했다.
“아, 짜식이! 진짜야! 누구를 정신병자로 몰아!”
이만한 힘을 가지면 정신병도 안 걸린단 말이다.
이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정신병에 걸렸으면 지구가 그립지도 않고 편했을 텐데.멀쩡한 상태로 외로움과 그리움을 느끼려니 환장할 지경이었다.
‘이놈도 마찬가지였겠지.’
이현은 스켈레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몇 번째일지도 모를 차원의 멸망한 도시.
멸망하지 않았으면 괜찮은 판타지 도시였을 세계였다.
어릴 적 읽은 판타지 소설을 떠올리며 걷던 중… 허름한 오두막에서 이놈이 기어 나왔을 땐 정말 깜짝 놀랐다.
세상에 뼈다귀가 살아서 움직이다니!
온갖 세계의 온갖 생물을 다 본 이현도 기절할 뻔했다.
“근데 너 이름이 뭐였더라?”
스켈레톤이 버럭 소리쳤다.
“거 좀 이틀이나 같이 잤으면 기억해야 하는 거 아니오? 위대한 네크로맨서 헤르피오스의 소환수인 아크나이트 호르피언이오!”
데스나이트의 상위 어쩌고 하며 자신을 자랑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포대 자루 하나를 망토 대신 두른 모습이 볼썽사납다.
이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길잖아. 대충 줄여서 아낙톤 어떠냐?”
“너무 대충이시네! 음? 어, 근데… 흐음~ 아낙톤이라.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됐고, 가볼까?”
이현은 윌슨을 끌어안고 일어났다.
“응? 가다니, 어디를?”
“너도 기억 못 하네. 고향 찾아다니는 중이라고 했잖아.”
“아~ 또 찾으러 가는 거요?”
아낙톤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의 뒤로 백골이 된 사체가 보였다.
아낙톤을 소환한 네크로맨서라고 했나.
세계가 멸망하기 직전 아낙톤을 소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때는 이미 병에 걸려 있어 며칠 살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다.
그 후로 오랜 세월 혼자 이 세상을 떠돌았다지.
‘외로웠겠지. 나처럼…….’
지구에서도 보육원에서 자랐고, 독립한 이후로도 아무도 없는 자취방에서 혼자 살았다.
혼자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
사회 속에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사람은 위안을 얻는 것이다.
물끄러미 보던 이현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같이 갈래?”
“응?”
“여기 혼자면 너도 심심할 것 아니냐. 같이 가자고. 나도 심심했거든.”
그간 이현은 여러 번 동료나 애완동물을 만들어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몇 번 데려간 애완동물들이 원인 모를 이유로 죽는 모습을 보고 관두게 됐다.
물을 잘못 마셔서, 음식이 안 맞아서… 그냥 차원 게이트를 통과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서.
정을 준 동물들이 다양한 이유로 죽어갔다.
먹을 것을 거부하고 굶어 죽을 때는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냥 두고 키워보려고 해도 수명이 걸림돌.
결국 곁에 남은 것은 윌슨뿐이었다.
‘뼈만 남은 이 녀석이라면 먹을 것이나 적응 걱정 없이 돌아다닐 수 있나?’
말이 통하는 동료.
체온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대화가, 사람이 그리웠다.
잠시 바라보던 아낙톤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나 뼈만 남았지만, 엄연히 수컷이요.”
잠시 이해가 안 돼서 쳐다보던 이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됐다. 혼자 살아라.”
이현은 알의 위에 손을 올리고 다시 힘을 불어넣었다.
우웅!
금색의 힘이 알을 투명하게 감쌌다.
* * *
언제나 품에 안고 다녔던 알.
보호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힘을 불어넣었다.
그 힘을 흡수했던 걸까.어쩌면 자는 도중 조금씩 힘을 흡수했을 수도 있다.
그러다 마침내 지구에서 태어난 것이다.
너무나 닮았다고 여겼던 그 얼굴은… 정말로 이현 자신에게서 힘을 받아 태어난 아이인 탓이었다.
레비아탄이 말했다.
-다른 종족의 언어로 말하자면 너는 저 아이의 부모라 볼 수 있겠지.
“그렇군.”
마음속에서 안개가 걷힌 느낌이었다.
좀 더 깨끗하게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자, 은연중 갖고 있던 불안이 가장 먼저 보였다.
빈이가 레비아탄으로서 성장하기 위해 차원을 흡수하고 생명을 희생시켰다면.
그것은 이현이 그저 다른 차원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도구로 이용당했음을 의미했다.
이용당했다는 점 자체는 상관없었다.
다만 빈이가… 마치 뻐꾸기 새끼처럼… 그를 아버지가 아닌 생존의 도구로서 이용했을 뿐이라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어.’
미소와 함께 주먹을 쥐는 이현을 문소드가 무감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러니 네 질문에 대답하자면, 저것이 다른 차원을 흡수할 가능성은 없다. 저것은 불완전한 상태로 태어나 영원히 불완전하게 살아갈 것이니.
“네 완전론에는 관심 없어.”
쓰레기 같은 녀석.
하지만 어쨌든 명색이 빈이의 생물학적인 어머니다.
궁금했던 사실도 알게 됐으니…….
빈이를 모욕한 대가는 그것으로 받았다 쳐야겠지.
일단 빈이의 가까이에서 아빠가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교육에 안 좋을 테고.
몸을 돌리는데, 문소드가 그를 불러세웠다.
-나도 묻고 싶은 것이 있군.
“응?”
-저 개체로 무엇을 하려는 거지? 너는 우리 못지않은 강력한 힘을 지녔다. 저 개체를 키운다고 이득이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득…이라.”
정말 쓰레기 같은 놈이다.
혐오감이 물씬 들어 냄새가 날 지경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 종족이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했는지 이해가 안 갔다.
이현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얘기해봤자 못 알아들을 거다.”
문소드의 거대한 머리가 이현에게 다가왔다.
-나의 지성을 의심하는가?
“아니, 지성이라기보다는… 다른 부분이지. 대화 안 즐거웠다. 그럼 이만.”
이현은 중지를 들어 보이고 몸을 돌렸다.
다시 돌아온 이현을 빈이가 양팔을 벌려 맞이했다.
“아빵.”
“그래, 우리 빈이.”
아낙톤이 꽤 재미있게 놀아줬는지, 빈이는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상태였다.
이현은 빈이의 머리를 정돈해주며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빈이, 착하기도 하지.”
차원의 모든 생명을 삼키는 사악한 본성을 따르지 않고.
이현의 힘을 받아 태어난 아이.
그냥 순수하게 밝은 빛에 이끌리는 나방같은 본능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레비아탄들과는 다른 따스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빠의 말을 듣고 빈이가 환하게 웃었다.
“비니, 착해?”
“그럼. 우리 빈이 우주에서 제일 착하지!”
이현은 빈이를 꽉 끌어안았다.
“아빠, 숨 막혀.”
“어, 그래.”
* * *
쿠르르릉!
천둥소리가 울리는 게이트.
짙은 푸른색으로 휘몰아치는 외곽과 달리, 안쪽은 새카만 어둠이었다.
“또 멸망급 게이트라니. 이거 너무 자주 오는 것 아니오?”
먹필도사는 부채를 펄럭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최근 터진 촉수 괴물 습격 사건으로 헌터들의 수도 부쩍 줄었다.
그런데 또 멸망급 게이트라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번에는 제국의 군대도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이다.
먹필도사는 흘끔 뒤를 보았다.
하나하나가 S급 헌터에 버금가는 괴물들 수백이 진열을 짜고 도열했다.
‘이거… 이러다 S급 위상이 너무 추락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이미 조르그라는 저 괴물들에게 치안을 맡기는 편이 더 쉽고 빠르다는 말이 많이 나왔다.
제국 주둔기지가 세워지는 강원도 땅값이 폭증하는 현상까지 일어나는 상황.
저들은 A급 이상의 게이트에만 출동하겠다고 못을 박아두었다지만…….
업계에 강력한 경쟁자가 생긴 것이라 상당히 우려가 됐다.
‘그냥 나도 연예계나 진출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그런 생각을 하는데, 게이트에서 마력의 파장이 일렁였다.
뭔가 나온다는 의미.
먹필도사는 재빨리 자세를 잡았다.
쿠르릉!
번갯불이 번뜩인 순간.
게이트 안쪽에서 웬 날개 달린 아기가 튀어나왔다.
붉은 머리에 붉은 눈.
용과 인간을 섞어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귀여운 외모에 전의가 뚝 떨어졌다.
“…응?”
“엥?”
먹필도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거… 마왕님 딸내미 아닌가?’
당혹한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아이고, 빈아! 그렇게 날아가면 위험해!”
이현과 아낙톤이 배를 타고 나왔다.
빈이가 다시 휭 허공을 날아 이현의 품에 안겼다.
“아빠, 사람이 잔뜩 이써!”
“아이구. 우리 공주님 반겨주러 왔나 보다. 빈이 인사하자.”
“안뇽~”
빈이가 손을 흔들었다.
조르그들이 멍청히 보는데.
이현이 빈이의 뒤에서 살기 띤 눈을 번뜩였다.
‘웃어.’
모여 있던 조르그들이 억지웃음을 띠고 목각인형처럼 단체로 손을 흔들었다.
“와, 와아아.”
“공주님이다!”
“우와아아!”
그렇지.
흐뭇하게 웃은 이현이 빈이와 함께 배를 타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게이트가 조개처럼 입구를 오므렸다.
먹필도사의 등 뒤로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진짜 때려치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