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아비규환의 도시 (1)
위잉! 위잉! 위잉!
사이렌이 헌터 협회를 연신 울렸다.
오퍼레이터들이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서초, 사당에서 폭동 발생!”
“압구정에서 이상 마력 감지!”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지애가 초조한 얼굴로 펜 끝을 물었다.
“이게 설마?”
이현이 말했던 멸망급 게이트 열 배의 재앙.
그 시작이라면…….
“모든 벙커를 여세요.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헌터들을 동원해서 막고요.”
오퍼레이터 실장이 그녀를 보았다.
“예? 하지만 단순 폭동에 헌터들을 투입하면…….”
“제가 전부 책임지겠습니다. 하세요.”
이게 멸망급 게이트 이상의 재앙이라면, 막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할 뿐.
“정당방위 차원에서 폭력행사도 허가합니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헌터들의 폭력행사를 허가한다는 말은, 군인들에게 총기 사용을 허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강력한 힘을 민간인들에게 휘두르면 분명히 피해가 나올 터.
하지만 지애의 결연한 목소리와 지금껏 쌓아온 신뢰가 오퍼레이터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녀의 판단이라면 믿을 수 있다.
“알겠습니다!”
지애는 유리창을 통해 피처럼 붉은 하늘을 바라봤다.
‘이현님, 제발… 저희를 지켜주세요.’
* * *
커다란 눈알에 수십 개의 번개가 꽂혔다.
창백한 푸른빛을 띤 굵은 번개 줄기가 꿈틀거리며 눈알을 지졌다.
외신의 사자가 수십 개의 촉수를 제우스에게 뻗었다.
“어림없지!”
아레스와 아테나가 가세했다.
촉수가 잘리고, 터지고, 불탔다.
퍼엉!
눈알이 터지며 노란 체액을 흩뿌렸다. 드러난 상처를 새로운 번개가 지졌다.
마침내 괴물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제우스가 손을 털며 눈살을 찌푸렸다.
“공격력은 별것 아닌데… 정말 끈질기군.”
이래 봬도 한 성단의 주신인 그의 공격을 정통으로 몇 번을 맞고도 버텨낸다니.
징그러운 녀석들이었다.
“이게 마지막 한 마리였나?”
제우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전투는 소강상태.
거대한 괴물들의 사체들이 우주를 둥둥 떠다니고 있다.
아테나가 창에서 피를 털어내고는 끄덕였다.
“네, 끝입니다.”
“우리 쪽 피해는?”
“케찰코아틀과 베놈이 죽었습니다. 중상이 셋 있고 부상이 일곱입니다.”
“두 명이라. 방심했군.”
게다가 베놈은 몰라도 케찰코아틀이면 나름 이름있는 성좌인데 죽었다니.
뼈아픈 피해였다.
“얕보지 않기를 잘했어.”
흡수한 성좌의 힘을 이용하는 그 능력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결국 저희만 고생한 꼴이 됐군요.”
아테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영을 빠져나간 외신의 사자들이 있으면 이현이 맡아주기로 했건만…….
괴물들은 두려움이나 전략이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모인 성좌들에게만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다.
일부러 진영을 느슨하게 했는데도 결국 마지막 한 마리까지 그들이 처리해야만 했다.
이쪽의 피해가 그리 크지 않은 점이 그나마 다행일까.
“그럼 오딘 님께 결계를 거두어달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결계에 구멍이 뚫리기 무섭게, 헤르메스가 그 틈으로 들어왔다.
“제우스! 큰일입니다!”
“뭐냐?”
“이중 공격이었어요! 지구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황급히 지구로 날아간 성좌들이 아연했다.
붉은 결계에 감싸여 바깥으로부터 차단된 지구의 모습은 완전히 이계 같았다.
“당했다!”
외신들이 필사적으로 달려든 이유.
모든 성좌들이 지구에서 눈을 떼게 만들고, 그 사이 지구를 집어삼키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완벽하게 유인했다고 생각했건만, 오히려 유인당한 것은 그들이었다.
“게이트이면서 결계인가!”
단순한 결계가 아닌지 힘이 차단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오랜 세월 언어, 과학, 음악 등에 스며든 신들에 대한 숭배와 공포.
무의식과 영혼에 각인된 신앙.
그것이 외신들의 것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아낄 때가 아니다. 올림푸스 전군을 불러라!”
“네… 헉!”
그 순간 게이트가 일렁거렸다.
수면 아래 있던 개구리가 사냥감을 포착하고 뛰어나오듯, 수십 가닥의 촉수들이 게이트 밖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하나, 둘…….
한 게이트에서 보이는 그림자가 수십.
그런 게이트가 스무 개가 넘으니… 족히 수백의 괴물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제우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우… 우리가 죽인 놈들은 고작 선발대였나!”
* * *
“아시스 및 휘하 전쟁의 기사단 오천. 폐하의 명령을 기다립니다.”
이현은 아시스와 켄타우로스로 이루어진 전쟁의 기사단원들을 바라보았다.
붉은 하늘 아래 무릎을 꿇고 도열한 모습이 웅장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서는 빨리 명령을 내려야 하는데…….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가만, 이거…….’
몇 달 전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놈이 조작을 시도한 예언의 그림.
그 배경과 지금 모인 군단의 모습이 일치했다.
설마 이때를 예언한 것일까.
‘거기에 명우도 있었는데?’
“아시스.”
“네, 폐하.”
“내가 잡아 온 한국 헌터 어딨어?”
“황실 감옥에 가사 상태로 수감되어 있습니다.”
이거 맞나.
명령을 꺼내려다 이현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고작 예언의 그림 하나를 믿고 명우를 꺼내주는 게 맞나?’
그 그림은 그냥 한순간의 묘사였을 뿐이다. 그놈이 든 총이 여기 있는 누군가를 겨냥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니, 그 녀석… 안 그럴 거야.’
바보이기는 해도 본질은 순수하고 착한 놈이다. 그렇게 감상적인 놈이라서… 자기 자신조차 용서하지 못하고 죽으려고 했던 것이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다른 짓을 생각할 놈이 아니다.
어지간한 성좌 한 명분의 전력이다.
게다가 전투 센스로 치면 다른 성좌들보다 훨씬 우월하다.
지금 명우의 힘이라면 아시스나 베요네타와도 겨룰 수 있을 터.
“아시스. 그 헌터 꺼내줘.”
아시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제국의 입장에서 명우는 황제 시해범. 그걸 황제가 풀어주라고 말하는 것이다.
“위험합니다, 폐하!”
“안 위험해. 무기랑 장비도 전부 돌려주고 대충 어디 옥상에 던져 놔.”
깨어나면 알아서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하겠지.
“…알겠습니다.”
이현은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신을 믿으십시오!”
“회개하라!”
괴상한 소리를 내뱉는 놈들에게서 훨씬 허약하기는 해도 ‘외신의 사자’들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다.
단순히 조종당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잡아먹혔다.
돌이킬 수 없다.
“이래서 죽였군.”
예언의 그림에서 왜 민간인을 학살하고 있었나, 했는데 이런 이유였나.
입맛이 썼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
“너희들도 보이지? 머리에 이상한 게 심어진 놈들이 있다.”
이현은 주먹을 불끈 쥐고 날카롭게 도로를 주시했다.
“전부 죽여!”
* * *
“이러지 마세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남우는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으로 사람들을 밀쳤다.
눈이 하얗게 뒤집힌 사람들이다.
밀어도, 밀어도 소용없는 인간의 파도.
그들이 십자가며 가재도구를 무기 대신 휘두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했던 바리케이드는 이미 한참 앞으로 멀어졌다.
“남우 씨! 도망쳐야 해요!”
함께 사람들을 막던 헌터가 외쳤다.
“하지만…….”
남우는 울먹이는 얼굴로 사람들을 보았다.
이 뒤는 사람들이 대피한 벙커.
물러날수록 사람들이 위험해진다.
망설이는데… 곡괭이가 날아와 옆에 있던 헌터의 어깨를 찍었다.
“크악!”
평범한 민간인들이 백이 모여도 헌터를 상대할 수 없다. 그러나 눈앞의 사이비들은 어찌 된 일인지 도구에 마력을 실어 공격하고 있었다.
공격당한 헌터가 반사적으로 거대한 배틀해머를 휘둘렀다.
일단 떨쳐내기 위해 손속을 두고 휘두른 것이지만, 맞은 사람들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아!”
남우가 그 광경에 아연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일단 이들은 세뇌됐거나 조종당하고 있을 뿐인 민간인이다.
그런 이들을 상대로 무자비하게 마력을 휘두르다니!
“에이잇! 아이스 월!”
그때 헌터 중 하나가 스킬을 사용했다.
한기를 뿜는 거대한 벽이 남우와 사람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투명한 얼음벽 너머로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보였다.
벽을 내리치자 피부가 달라붙어 뜯겨졌지만, 사람들은 아랑곳 않고 계속 벽을 두드렸다.
그들의 주먹에도 마력이 실렸는지 얼음벽이 강하게 흔들렸다.
남우는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뭐, 뭐 하는 겁니까! 사람들이 다치잖아요!”
마법을 쓴 헌터가 남우의 말에 잠시 흔들렸지만… 날카롭게 굳은 눈빛으로 외쳤다.
“그럼 우리가 죽자고!”
이번엔 남우가 흔들렸다.
당연히 그도 죽고 싶지 않다.
그러나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방치하는 게 옳은 일일까?
“하, 하지만…….”
“협회에서 이미 마법을 허가했어. 그리고 저것들은 조종당하는 거야! 죽여도 정당방위라고!”
망설이고 있던 헌터들이 하나, 둘 무기를 들었다.
헌터들도 결국 인간.
군중심리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이미 한 번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으니 더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전쟁의 상황.
상부에서도 명령이 내려왔으니 정당성도 확보됐다.
“멀쩡한 사람들까지 다치게 둘 순 없어!”
“그… 그래! 맞아!”
“저 뒤에는 우리 가족들도 있다고!”
그 말이 남우의 가슴을 아프게 후볐다.
뒤에 있는 벙커에 가족들이 있는 것은 남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기를 휘두른단 말인가.
“기절만 시킬 수는 없을까요?”
어려운 일인 것은 안다.
평범한 사람도 기절만 시키고 제압하는 것이 죽이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어이! 혼자 착한 척해? 우리는 뭐 살인광이라 이러는 줄 알아!”
곡괭이에 찔렸던 헌터가 버럭 소리쳤다.
“그래! 시잇팔! 저 인간들 마력 쓰잖아! 나 죽을 뻔한 거 못 봤어?!”
데우스 엑스 마키나 때와 마찬가지.
오히려 그때에 비하면 약과라고 볼 수 있다.
숫자도 많지 않고 힘도 그리 강하지 않다.
‘할아버지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남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때 얼음벽 너머로 벼락이 내리쳤다.
콰르릉!
얼음벽이 충격에 무너지고, 그 너머에서 웨어울프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내뿜은 전기에 감전된 인간들이 거품을 물고 덜덜 떠는 중이었다.
“다들 괜찮으세요?”
“S급이다!”
“웨어울프걸이다!”
구세주를 만난 듯 헌터들이 환호했다.
남우가 그녀에게 급히 다가갔다.
“다… 죽이신 건가요?”
웨어울프걸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일단 못 움직이게만 했습니다. 꽤 다쳤겠지만 어쩔 수 없겠죠…….”
그녀의 말대로 화상을 입고, 몸에 전기가 관통한 자국이 선명하게 난 사람들이 보였다.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남우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쪽 블록은 제가 정리했어요. 전 이제 너머로 갈 건데, 여기 계신 분들은 다른 블록 정리 부탁드릴게요.”
“아, 네!”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고개를 든 남우가 입을 쩍 벌렸다.
“뭐, 뭐야… 저건?”
마치 문어의 다리를 연상시키는 촉수. 그러나 빨판 대신 있는 것은 거대한 눈알들이다.
하늘에서 거대한 촉수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