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성단연합 (2)
삐빕삐빕, 삐로링~
이현의 집 문을 열고 남우가 들어왔다.
일성이 죽은 후, 남우는 간혹 저녁을 사 들고 이현의 집을 찾았다.
빈이가 일성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도록 신경 써달라는 이현의 부탁이기도 해서, 진즉에 비밀번호를 받았다.
“형님~ 저녁거리 사왔습… 뭐 하세요?”
남우는 거실의 풍경을 보고 당황했다.
손에 플라스틱 동전을 든 이현이 거실 벽에 딱 붙어 있었다.
우주를 다스리는 거대한 존재와의 맹렬한 사투를 막 끝낸 듯 지친 얼굴.
빈이는 장난감 카운터를 앞에 두고 앉아 열심히 동전을 세는 중이었다.
다 셌는지, 동전을 내려놓은 빈이가 작은 종을 흔들었다.
“들어오째요~”
혀 짧은 목소리가 귀엽다. 그러나 그 귀엽고 명랑한 목소리에 이현은 기가 빨린 듯 쪼그라들었다.
“네…….”
힘없이 대답한 이현이 빈이의 앞에 앉았다.
그가 카운터에 동전을 올려놓았다.
“오므라이스 주세요.”
빈이가 고개를 저었다.
“안 대요. 오므라이스는 아까 해떠요.”
“그럼 떡볶이?”
“떡보끼도 아까 해떠요.”
아마 중복 메뉴는 안 되는 것 같다. 이현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닭고기 크림 스튜?”
빈이가 환하게 웃었다.
“네에~ 기다려주세요~”
이현이 축 늘어진 채 장난감 식탁을 앞에 두고 앉았다. 남우가 그 옆에 쪼그려앉았다.
“형님. 이건 무슨 일입니까?”
“주주의 레스토랑 세트다.”
철천지원수를 소개하듯 이현이 말했다.
“보다시피 빈이가 요리사고 내가 손님이지. 내가 주문한 요리를 빈이가 만드는 건데… 계속 다른 요리를 주문해야 해… 왜냐면 난 다른 손님이거든.”
빈이가 열심히 뭔가를 만들었다. 정해진 플라스틱 조각들로 만들 수 있는 조합이야 어차피 그게 그거일 텐데, 사뭇 진지한 얼굴로 뭘 뒤섞고 빻는다.
“요리 나와쯥니다!”
빈이가 카운터에 접시를 척 올려놨다.
아무리 봐도 닭고기 크림 스튜 비슷한 것도 아니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동심을 깨트릴 만큼 남우는 잔인하지 않았다.
이현이 언제 늘어졌냐는 듯 활짝 웃으며 요리를 받고는… 뒤돌아서 다시 울상을 지었다.
필사적인 표정 관리!
아버지란… 이리 힘든 것이었나!
그때 빈이가 남우를 바라보았다.
“쏜님. 오셔쪄여?”
“헉.”
음식을 먹는 시늉을 하던 이현이 남우의 어깨를 짚었다.
“난 아이디어가 떨어졌다. 앞으로의 일은… 네게 맡기지.”
남우의 손에서 비닐봉지가 툭 떨어졌다.
“예? 혀, 형님. 잠시만요.”
작은 손이 카운터를 톡톡 두드렸다.
“쏜니임.”
이현이 속삭였다.
“힘내. 앞으로 두 시간 정도만 더 놀아주면 될 거야.”
“그거 그냥 추측…….”
말하기도 전에 이현이 식탁을 정리하고 방으로 도망갔다. 저승사자 같은 목소리가 남우를 불렀다.
“쏜님!”
* * *
새카만 우주에 뜬 거대한 푸른 별.
초록이 짙은 대지는 의외로 얼룩처럼 작고, 대부분이 새파란 바다다.
우주정거장에 앉아 극지에서 일렁이는 오로라를 바라보던 이현이 중얼거렸다.
“예쁘네.”
“그렇군요.”
옆에 앉은 베요네타가 푸근한 미소를 짓고 동감했다.
“정말 아름다운 별이옵니다. 과연 폐하의 고향이로군요.”
뭔가 감동하는 지점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지만… 베요네타는 원래 이런 녀석이니까.
“가짜치고는 꽤 리얼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지구는 가짜. 진짜 지구는 뒤에 숨겨져 있다.
그렇지만 그 모습은 완전히 같고, 심지어 기척마저 느껴졌다.
“예. 오딘이라는 자, 경계할 필요가 있는 힘입니다.”
이현이야 모든 힘을 무력화할 수 있으니 상관없지만… 종말의 기사단장들이라도 크루엘 정도로 탐색에 뛰어나지 않은 한 간파하기 어려울 힘이었다.
“그런데… 데려온 녀석들은?”
“휘하 질병의 기사단 1,500. 대기 중입니다.”
“좋아. 우리 할 일은 저기 이끌린 녀석들 중에… 결계를 빠져나온 놈들만 상대하는 거야. 무리할 거 없고 지구에만 못 가게 하면 돼.”
이번 목표는 최대한 성단들의 힘을 빼놓는 것.
오딘의 환상은 대단하지만, 적도 만만치 않다. 만약의 경우 환상을 눈치채거나… 빠져나올 가능성이 있다.
제국의 군대는 그렇게 빠져나온 녀석들을 상대하기로 되어 있었다.
만약의 경우 성좌들이 지더라도 구해줄 필요는 없다.
최대한 정보만 수집하고 빠진다.
이이제이.
물론 지구는 지킬 것이다.
빈이는 제국으로 보냈지만, 그 외에도 지켜야 할 사람은 많았다.
“무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마지노선을 넘겨서도 안 돼.”
과한 충성심에 엇나가는 놈들이 가끔 있다 보니, 집 나간 손주 걱정하는 할머니처럼 굴게 된다.
베요네타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나이다.”
그때 파란색의 작은 새가 나타났다.
새가 헤르메스의 목소리로 말했다.
“접근 중입니다!”
“오케이.”
이현은 눈에 힘을 집중했다.
멀리, 수십 마리의 괴물들이 나타났다.
외신의 사자.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이라고 하나?
외신의 사자는 외국인들이 농담으로 만들어낸 신과 상당히 비슷했다. 커다란 눈알을 중심으로 둥글게 뭉친 촉수들.
한 마리, 한 마리가 직경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다.
광대한 우주 공간에서는 작아 보일지 몰라도 지구의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한 위협.
아직 멀리 떨어져서인지 촉수를 흐느적거리며 날아다니는 모습이 해파리와 비슷해, 잠깐이지만 귀엽게 느껴졌다.
헤르메스가 긴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첫 열, 제 1경계면 돌파!”
경계면은 모두 세 개.
환상으로 만든 지구의 대기권이 제 3경계면으로… 그곳을 모든 외신의 사자들이 지나면 결계가 발동되어 가두기로 되어있었다.
이현은 팔짱을 끼고 묵묵히 지켜봤다.
“제 2경계면 돌파.”
아직까지는 순조롭다.
“다섯 개체가 제 2경계면에서 멈췄습니다! 나머지 제 3경계면에 진입!”
이현이 베요네타에게 손짓했다.
“보다가 안 들어가면 밀어 넣어.”
“네, 폐하.”
그 순간 밝은 빛이 터지며 지구의 모습이 사라졌다.
결계가 작동한 것이다.
“어디 솜씨 구경 좀 해볼까.”
결계에 갇힌 괴물 중 하나가 그 거대한 촉수로 투명한 벽을 꿰뚫으려고 했다.
그러자 번갯불이 괴물의 눈을 관통했다.
콰릉!
멀리서도 보일 만큼 강렬한 전격. 새파랗게 빛나는 빛의 창처럼도 보였다.
괴물이 몸을 비틀며 괴로워했다.
이어서 섬광이 번뜩이더니 두꺼운 촉수 중 하나가 썩둑 잘렸다. 노란 체액이 무중력 공간을 연기처럼 부유했다.
안력을 집중한 이현의 눈에 대검을 어깨에 걸치고 웃는 아레스가 보였다.
“저 녀석, 허당인 줄 알았더니 제법이잖아?”
저 촉수는 상당히 단단하고 질기다. 그것을 단숨에 베었다는 것은 아레스의 힘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의미.
그런데 칭찬하기 무섭게, 우쭐대던 아레스가 촉수에 휘감겼다.
“뜨어악!”
노란빛이 가로지르며 촉수에 바람구멍을 냈다. 아테나가 창을 내지른 것이다.
“호오.”
다른 괴물들은 각자 서너 명의 성좌들이 맡아서 싸우는데, 올림푸스의 세 성좌들만 하나씩 괴물을 맡아 처리했다.
그만큼 강함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이 합류하자, 기세가 기우는 것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괴물들의 시체가 하나씩 떠올랐다.
“생각보다 순조롭군.”
한 명의 성좌도 당하지 않고 있다.
‘이거 올 필요가 없었나? 빈이 유치원이나 더 알아볼 걸 그랬을지도.’
“끄아악!”
갑자기 비명이 울렸다.
촉수에 휘감긴 성좌 하나가 보였다. 몸부림쳤지만 힘이 밀리는지 점점 몸이 촉수에 가려졌다.
성좌의 능력인지 초록색의 물방울이 마구 돌며 촉수를 후려졌다.
콰직! 치이익!
촉수가 맞을 때마다 움푹 파이거나 찢겼다. 맞은 자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봐서는 그냥 물이 아니라 산이나 독 종류 같았다.
그러나 촉수는 고통을 못 느끼는지 조금도 힘이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표면에 돋은 지렁이 같은 핏줄이 굵어지며 더욱 힘을 줬다.
몇 초간 밀고 당기는 치열한 싸움이 이어졌다.
그러나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고, 기본적인 힘에서도 앞서는 외신의 사자에게 붙잡힌 순간 성좌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뿌지직!
“아아아악!”
마침내, 끔찍한 소리와 함께 빛과 문자가 성좌의 입으로 새어 나왔다.
그런데 허공으로 흩어지려던 문자들이 멈추더니 고스란히 촉수에 빨려들었다.
이현의 얼굴에 흥미가 돋았다.
“저건… 흡수하는 건가?”
성좌의 힘을 흡수한 촉수가 눈알을 홱 돌렸다. 성좌가 쓰던 것보다 커다란 초록색 구슬이 다른 성좌에게 날아갔다.
“오호라.”
외신의 사자는 먹어 치운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먹을수록 강해진다.
직접 보지 않았으면 믿기 어려웠을 강력한 이능력이었다.
‘저놈들이 다른 차원을 한두 개 흡수한 게 아닐 텐데…….’
그런데 어째서 저것들은 흡수한 힘을 사용하지 않는가?
힘을 흡수하자마자 사용할 수 있는 놈들인데.
오한이 스몄다.
전략, 전술에 있어 가장 기본은 당연히 상대도 나 정도로 생각할 거라고 가정하는 것.
저 외신의 사자라는 놈들이 생긴 것은 멀쩡해 보여도 지능까지 정말 그럴 리가 없다.
시간제한이 있는 걸까?
‘게임도 아니고… 그럴 확률은 적어. 만약 저놈들이 힘을 흡수하지 못한 개체라면?’
힘을 흡수한 적이 없는 새로운 개체라면, 저것들은 버리는 패다.
그때 진짜 지구의 위에 피웅덩이를 연상시키는 게이트가 나타났다.
달을 집어삼킬 듯 거대한 크기였다.
하나… 둘…….
수십 개의 피웅덩이가 대기권에 고였다. 끈적하게 휘몰아치는 붉은 웅덩이 속에서 각각 수십 개의 촉수들이 빠져나왔다.
출렁!
출렁!
다급한 텔레파시가 머리를 찔렀다.
-폐하! 저 크루엘입니다! 지구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상 현상이…….
지구의 대기가 완전히 붉게 물이 듦과 동시에 텔레파시가 끊겼다.
“크루엘!”
100% 확신하지는 못하겠지만… 지구를 둘러싼 저 게이트에 아시스의 결계와 같은 힘이 있어, 외부와의 연결을 차단하는 것 같았다.
-베요네타. 난 지구로 들어간다. 바깥은 네가 맡아.
텔레파시를 남긴 이현이 몸을 지구로 쏘았다.
붉은 게이트를 향해 그가 주먹을 내질렀다.
“합!”
채앵!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나며 앞을 가로막은 붉은 물결이 산산조각 났다.
먹구름 속으로 이현의 몸이 떨어졌다.
런던의 상징인 빅벤의 첨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는… 영국인가?”
한국으로 떨어질 생각이었는데, 게이트에서 나온 정체불명의 힘 탓에 위치가 어긋난 것 같았다.
아래를 보니… 도망치는 사람들의 뒤로 웬 하얀 옷을 입은 인간들이 십자가를 치켜들고 행진 중인 모습이 보였다.
“합일의 순간이 왔습니다!”
“모두 회개하십시오!”
이현은 어처구니가 없어 코웃음 쳤다.
“말세군, 말세야.”
이현은 빅벤의 위에 착륙해 제국과 이어지는 게이트를 열었다. 약간의 저항이 느껴졌지만, 힘을 주자 우유곽 뒤를 억지로 찢듯이 문이 열렸다.
“역시 안에서는 더 열기 쉽군.”
“폐하?”
아시스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현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기사단들 대기 중이었지? 전부 데리고 나와.”
“예!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