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죄와 벌
타앙!
이현은 날아오는 총알을 손으로 쳐냈다.
그러자 총알이 길게 휘더니 다시 그에게 날아왔다.
“응?”
탕! 탕!
이어서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총성.
수십 발의 총알이 그물처럼 이현을 감쌌다. 이현이 발을 냅다 지상에 내리찍었다.
쿠웅!
이현을 중심으로 공간이 왜곡됐다. 직선으로 날아오던 총알들이 부나방처럼 이현의 주위를 맴돌았다.
“네가 화가 났다는 건 알겠다.”
이현이 홱 손을 휘둘렀다.
주위를 맴돌던 총알들이 힘을 잃고 우수수 떨어졌다.
명우는 그 장면에 경악했다.
‘어째서?’
훨씬 더 강력한 마력과 새로운 힘을 더해 날린 총알이었다.
그런데, 그런데도… 이현에게는 조금도 상처를 줄 수 없단 말인가.
이현이 폐허를 저벅저벅 걸었다. 철골과 아스팔트가 이현의 발밑에서 엿가락처럼 뭉개졌다.
글자가 몸을 타고 피어올랐다.
“그런데 화나면 애아빠한테 폭탄 터트리는 게 네 정의냐?”
그늘진 얼굴에서 붉은 눈이 번뜩였다.
명우는 그 말에 움찔했다.
정의를 말했다면 반박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릿속에 스친 빈이의 얼굴에 대고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이현은 강하니까 살았지만… 보통 사람이었으면 첫 폭탄에 시체가 스플린터물의 좀비 시체처럼 되었을 것이다.
빈이의 얼굴에 대고 ‘네 아버지를 이렇게 만들었어’라고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지끈.
두통이 엄습했다.
부모님을 잃은 후, 힘을 각성해 헌터가 되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를 괴롭힌 원인 모를 두통이었다.
“큭… 후, 하하하하…….”
명우는 하회탈을 잡고 웃었다.
미친 듯이 웃는 그 태도에 이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멈췄다.
“그래요, 맞습니다. 저는 정의가 아니죠.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죠?”
“뭐?”
“전 사악한 인간으로 매도받아도 좋습니다. 역사에 히틀러 뺨치는 비도덕적인 인간으로 기록되어도 상관없어요. 그걸로 괴물들을 전부 물리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한숨을 쉰 이현이 턱을 어루만졌다.
“그래, 그럼 맞을 각오는 하고 해라.”
이현의 몸이 바람소리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눈 깜빡일 새 나타난 그의 주먹이 명우의 얼굴을 후려쳤다. 하회탈이 박살 났다.
“크악!”
충격에 팽그르르 돌며 날아가는 몸의 반대편에서 이현이 다시 나타났다.
빠악!
명치로 내리꽂히는 충격에 명우의 몸이 곤두박질쳤다.
콰앙!
또 다시 공격이 온다.
명우는 급히 힘을 발동했다.
[눈에는 눈]
예상대로 내리꽂힌 충격이 문자에 휘감겨 반사됐다. 되돌아간 충격에 이현의 몸이 튕겨 나갔다.
쿠웅!
“으아아!”
벌떡 일어난 명우가 샷건을 꺼내 난사했다.
그러나 이미 그 자리에 이현은 없었다. 금빛 문자를 휘감은 다리가 명우의 오금을 후려쳐 무릎을 꿇렸다.
머리채가 잡혀 강제로 몸이 들렸다.
“컥!”
샷건을 놓친 명우가 다시 몸에 힘을 운용했다.
그러나 금색 문자에 휘감긴 주먹이 그의 붉은 문자를 간단히 와해시키고 명치를 때렸다.
퍼억! 퍼억! 퍼억!
털썩.
엎어진 명우의 몸을 이현이 발로 툭 차 돌렸다. 물방울이 명우의 볼을 툭 때렸다.
툭. 투툭.
쏴아아…….
소나기가 쏟아졌다. 명우의 몸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이현은 명우의 가슴을 짓밟고 지그시 몸을 숙였다.
압도적이다.
너무나도 강력한 힘.
역시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예상했던 것처럼.
“큭… 크큭…….”
명우는 눈을 감고 웃었다.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웃을 때마다 몸이 아팠지만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아니, 이렇게 되기를 바랐던 걸지도 모른다.
가족들을 눈앞에서 잃었던 그 순간 명우는 분노와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냥 혼자 집에 가겠다고 했더라면… 밥 사달라고 어리광부리지 않았더라면 부모님이 굳이 데리러 왔다가 돌아가시지 않았을 텐데.
그의 분노는 단순히 리자드맨들… 괴물들을 향한 것만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도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괴물을 죽여도 분노가 해소되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가장 큰 분노는 바로 스스로를 향한 것이었으니.
“큭큭… 쿨럭.”
피가 튀어나와 입을 적셨다가 빗물에 쓸려 사라졌다. 명우는 입안에 남은 피를 뱉고 눈을 떴다.
먹구름을 등지고 선 이현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져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화가 많이 났겠지.
그의 국민을 죽이고, 도발했으니… 죽이고 싶을 것이다.
분노가 분노에 스러진다. 괜찮은 결말이었다.
“잘… 됐군요.”
그가 만드는 세상은 아름답겠지.
그처럼 강한 존재가 지켜주는 세상이라면 분명 안전할 것이다.
어쩌면 전쟁도 사라지고… 무서운 존재에게 잡아먹힐 두려움에 떠는 일도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
그 세상을 보지 못하는 건 약간 아쉬웠지만… 그런 걸 볼 자격 따위 없으니, 괜찮다.
‘그래… 난 괜찮아.’
그때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폐하!”
쿵쿵쿵.
뭔가 묵직한 걸음과 가볍게 타박거리는 걸음이다. 명우는 걸음이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베요네타와 아시스.
이현의 충신들이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송구합니다.”
“됐으니까 이 녀석 묶어서 데려가.”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명우의 손이 가슴을 누르고 있던 이현의 발목을 붙잡았다.
“어디를… 데려간다는 겁니까. 죽여요. 날 죽이라고요!”
이현이 발목을 털어 손을 뿌리치고 물러났다.
“미안하지만, 뒷맛 찝찝한 살인은 안 한다.”
“크윽…….”
명우가 다시 피를 토했다. 베요네타의 벌레들이 그의 몸을 묶어 들어올렸다. 명우는 남은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제기랄! 날 죽이지 않으면 또다시 같은 일을 벌일 겁니다! 날 죽여요! 아니면 차라리 식물인간이라도 만들던가!”
이현이 귀를 후볐다.
“난 승자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거든. 네가 할 일도 있고.”
“그딴 게 뭡니까!”
“유가족들한테 사과해야지.”
이글거리던 명우의 눈에서 불길이 걷히고 얼어붙었다.
“손해배상이랑 할 것도 많거든. 그거 다 한 다음에는 혀 깨물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
명우는 불끈 주먹을 쥐었다. 이런 식의 결말을 바랐다면 애초에 그를 도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피에는 피입니다. 죽음에는 죽음이고. 내가 죽인 목숨을 내 목숨으로 치르겠다는 말입니다!”
“시끄러. 네가 공화당 의원이냐? 네 잘못에 네 멋대로 값 매기지 마. 그걸 결정하는 건 다른 사람들이지 네가 아니야.”
“무슨…….”
그때 아시스가 크리스털을 그의 가슴에 붙였다.
키잉!
보석이 빛나며 얼음덩어리 같은 다면체가 명우를 순식간에 감쌌다. 매서운 한기가 몸을 감싸며 명우의 의식을 흐리게 만들었다.
“제길… 난, 살고 싶지… 않아…….”
살아갈 자격 따위 없는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의식을 잃기 전, 명우는 오랫동안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 * *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시스가 이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현은 잠든 명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우습게도, 평온한 얼굴의 그는 그냥 이십 대 초반의 청년처럼 보였다.
그렇게 악에 받쳐 있던 녀석이 이런 얼굴이라니…….
“이자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너희들까지 왜 그래? 당연히 법대로 해야지.”
일단 제국에서 심판을 받은 후, 지구에서도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때 먹구름 사이에서 번개가 바로 옆으로 내리쳤다.
콰르릉!
막대한 에너지에 공기가 출렁였다. 번개줄기 사이에서 제우스와 아레스, 헤르메스가 걸어 나왔다.
심각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마왕.”
“니들이 여긴 웬일이야?”
제우스가 명우를 바라봤다.
“그자가 새로 탄생한 성좌요?”
명우는 싸움 중간에 별안간 성좌의 힘을 깨우쳤다.
어떤 원리인지까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느끼기로는 뭔가와 연결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신을 인간의 법으로 심판할 수는 없는 법. 그를 올림푸스의 재판장에 올리려고 하오.”
이현이 팔짱을 끼고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놈은 우리 제국민을 헤쳤어. 심판을 해도 내가 먼저다.”
“물론 그것은 이해하는 바요. 제국의 심판이 끝난 후 우리에게 넘겨달라는 뜻이오.”
“생각해보지.”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오.”
“뭔?”
헤르메스가 양피지를 내밀었다. 이현이 양피지를 펼치자, 안에서 광막한 우주의 풍경이 나타났다.
거대한 행성. 그 주위를 떠도는 운석으로 이루어진 끈.
“이건… 토성이네? 뭐야? 다큐냐?”
“계속 보시오.”
갑자기 뭔가 꿈틀거리는 것이 운석에서 나타났다. 흙 틈에서 고개를 내미는 지렁이 같다.
이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괴물이었다.
거대한 눈알을 중심으로 붉은 살점들이 뭉쳤고, 그 뒤로 수십 개의 촉수가 따랐다.
“이 녀석…….”
하데스가 봉인하고 있었던 괴물. 지금은 크루엘이 연구 중인 존재였다.
“외신의 사자… 우리는 그렇게 부르오.”
양피지에서 수십 마리의 괴물이 나타나 이동했다.
“이거… 설마 우리한테 오는 중인가?”
제우스가 끄덕였다.
“그렇소. 방금 전 발견했소.”
도움이 필요하다… 당연한 말이었다.
이 괴물은 싸워본 결과, 어지간한 성좌는 대항하기 힘들 만큼 강력했다. 아마 강화되지 않은 카오스 성단의 성좌들 정도라면 일 대 일도 벅찰 것이다.
그런 존재가 수십이다. 올림푸스와 아스가르드가 연합하더라도 전력을 써야 할 세력.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다른 세력의 힘을 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놈들을 물리치는 걸 도와달라는 뜻이오.”
“흐음… 그게 우리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데?”
옆에 서 있던 아테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지구는 그대의 땅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도와야지요!”
“아니, 아니지.”
물론 지구는 이현이 애착을 가진 땅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수십억의 생명이 사는 곳이고… 빈이를 아끼는 사람들도 많으니 지키고 싶은 마음은 당연히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굳이 이놈들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다.
군대를 써서 도와줬다가 이번 카오스 성단과의 싸움 때처럼 숟가락이나 얹고 생색낼지 어떻게 알아?
‘어디 똥줄 좀 타봐라.’
이현은 팔짱을 끼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내 나라는 키르단 제국이다. 뭐 지구가 내가 태어난 나라기는 한데… 저렇게 강한 놈들이랑 싸워서 손해 볼 만큼 애착이 있지는 않거든?”
올림푸스의 세 성좌가 조가비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이현 본인이 아니라는데 ‘아니야! 넌 지구를 좋아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카오스 성단과 싸우면서 우리도 손해가 컸거든.”
이건 사실이다. 실제로 죽은 자도 꽤 많고, 전후 처리도 아직 완벽히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국 전력에 크나큰 손실이 온 것은 아니지만.
“그, 그렇지만…….”
“뭐, 너희들도 우리를 도와줬으니 무기 정도는 지원해줄게.”
큰 개입은 하지 않겠다. 숟가락 정도는 얹어주겠다.
선을 긋자 제우스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했다.
“용건은 끝났나? 그럼 우린 간다. 방금 싸워서 피곤하거든.”
“자, 잠깐!”
제우스가 손을 내밀었다. 그가 흙빛이 된 얼굴로 말했다.
“도와주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겠소. 한 성좌의 주인으로서 약속하지.”
이현이 싱긋 웃었다.
“그래? 그럼 좀 들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