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악몽의 눈 (3)
“죄송합니다.”
지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선 곳은 이현의 집 거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앞에 선 이현이 그녀를 만류했다.
“아냐. 그쪽이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다는 건 알아.”
갑자기 S급 헌터가 훼까닥 돌아서 미친 짓을 벌이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는 어려웠겠지.
게다가 이번 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제국이 아닌 협회다.
연구소가 파괴된 재산적 피해에, 대한민국의 S급 헌터가 사이코가 되었다는 불명예도 떠안게 되었으니.
그녀가 주말에도 열심히 일한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본 이현의 입장에서는 인간적으로 탓을 하기 힘들었다.
“뭐… 어떻게든 해결하면 되는 일이지.”
지애가 고개를 들었다.
“죽이실… 건가요?”
“글쎄. 한국에서도 살인범을 그 자리에서 죽이지는 않잖아?”
심신미약이나… 성좌에게 조종당할 가능성도 고려하면 다짜고짜 죽일 수는 없다.
이 일은 제국과 지구의 외교 문제이기도 하니까.
적법한 재판 절차를 거쳐야겠지.
‘그게 가능하려나.’
이현이 느꼈던 명우는 잡히느니 죽을 녀석이었다.
쉽게 잡혀주지도 않을 테고, 반항하다가 사고로 죽을 가능성도 있다.
미국에서도 경찰에게 일부러 달려들어 자살하는 인간들이 있는데… 명우도 그러려고 하지 않을까?
“아무튼 우리는 생포할 예정이야. 이번 일은 합동 작전이니까 그쪽도 다짜고짜 죽이면 안 된다?”
“그건 걱정 마시오.”
과자를 까먹으며 먹필도사가 대답했다.
“그와는 면식도 있고… 함께 싸운 동료요. 우리도 그를 해하기는 싫소.”
이현의 눈에 불이 들어왔다.
“그렇군. 근데… 넌 왜 와서 우리 빈이의 소중한 그레놀라젤리를 함부로 축내지? 맞을래?”
네깟 놈 주둥이에 처넣기 위해 신중히 고르고 고른 것이 아니거늘….
먹필도사가 움찔하고는 과자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아빠!”
갑자기 빈이가 나와 허리에 손을 얹었다.
“간식 나눠 먹어야 해! 그래야 착한 어른이야.”
아차.
이현은 과자 봉투를 열어 젤리를 먹필도사의 손에 쥐여주고는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많이 먹어.”
“…….”
* * *
쿠르르릉…….
구름 사이를 가로지른 번개의 빛이 한순간 폐허를 비췄다.
북한의 평양에 있는 산부인과.
멸망급 게이트를 막지 못하고 멸망한 북한의 현 상태를 압축해 보여주듯 처참한 형태였다.
외벽이 탈락해 철골이 빠져나오고, 그 사이를 담쟁이가 기어올랐다. 아스팔트를 깨고 자란 수풀과 나무들이 무성히 건물을 감쌌다.
현재 중국은 북한의 절반을 무력으로 점령해 실질적 지배를 주장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사할린과 가까운 곳의 괴물들만 정리하고 폐허를 청소했을 뿐, 아직 평양까지 손을 뻗지는 못했다.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넘쳐나는 북한 땅에서도 강력한 괴물이 그곳에 살고 있다는 소문 탓이었다.
단순히 소문이면 모르나, 실제로 그곳을 찾아간 중국의 헌터들이 급을 가리지 않고 연락이 두절된 탓에…….
지금 평양은 체르노빌보다 더한 마굴로 평가받았다.
그곳이 바로 명우의 아지트였다.
“미안.”
명우는 꾸벅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항상 쓰고 다니던 하회탈도 벗어 얼굴을 드러낸 상태.
그의 눈에 책상에 놓인 가족사진이 보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가족들과 다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지금, 유일하게 남은 가족사진.
명우는 그들 하나하나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보고싶네.”
아랫입술을 질끈 물고, 울렁이는 가슴을 가라앉히기를 몇 번.
“참아보려고 했어. 몇 번이고, 몇 번이나…….”
뚝.
끝내 가라앉히지 못한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근데 안 되겠어. 협회 사람들도 내 말을 안 들어. 그들이 필요하대. 평화롭게 같이 살아야 한대.”
주먹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난 노력했어. 막으려고 무엇이든 해봤어. 그런데도 내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더라.”
그때, 그를 둘러싼 수많은 모니터 중 하나에 불이 켜졌다.
동작 감지 센서가 침입자를 감지한 것이다. 모니터로 고개를 돌린 명우는 시커먼 그림자와 눈이 마주쳤다.
“정말 보고 싶어.”
가족사진을 들어 올린 명우가 속삭였다.
“결과가 어떻든… 만날 수 있을 거야.”
명우는 사진을 액자에서 빼 가슴에 넣었다.
명우는 조용히 옥상으로 올라갔다.
본래 이곳에는 침입자를 막기 위한 수많은 방범 장치와 함정이 배치되어 있다.
B급 정도의 헌터라면 쉽게 죽일 수 있는 수준의 함정들이다.
그러나 지금 온 자는 그런 것으로는 막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쿠궁!
폐허가 울렸다. 함정이 작동한 것이다.
‘1층.’
지잉… 위이잉!
콰앙!
‘2층.’
함정의 배치도는 머릿속에 훤히 들어 있다. 소리와 진동만으로 침입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함정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기습도 할 수 있겠지만… 명우는 그냥 옥상에 서서 조용히 기다렸다.
이윽고 옥상의 철문이 열렸다.
끼익…….
보름달이 뜬 맑은 밤하늘 아래.
두 남자가 마주 섰다.
“뭐야. 여기는 함정 없냐?”
이현이 어깨의 먼지를 툭툭 털며 걸어 나왔다.
상처는커녕 옷에 솔기 하나 뜯어지지 않은 모습.
‘당연한가…….’
아무리 대단한 아티팩트로 함정을 만들었어도 이현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멸망급 게이트의 보스를 혼자서 상처 없이 물리친 자이니…….
명우는 조용히 웃었다.
“직접 오실 줄은 몰랐군요.”
“아니. 네 다른 아지트들에는 부하들을 보냈어. 내가 ‘당첨’을 뽑은 거지.”
바닥에 놓인 맥주캔을 이현이 걷어찼다.
깡.
“그래… 뭔 짓이냐? 미쳤냐?”
하회탈 아래에서 쓴웃음이 번졌다.
미쳤다라. 차라리 그랬다면 마음은 편하지 않았을까?
“네, 오래전에 미쳤죠.”
명우가 막대 같은 것을 들어 올렸다. 막대기 위에는 빨갛고 둥그런 버튼이 있었는데, 명우가 그곳에 엄지를 올렸다. 이현의 얼굴이 굳었다.
“너 그거 설마.”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죠.”
삑.
이현이 서 있던 자리가 폭발했다.
콰콰아앙!
폭연이 솟구쳐 달을 가렸다. 붉은빛이 번지며 고요하던 밤을 진동과 폭음이 뒤흔들었다.
잠을 자던 새들이 놀라 날아올랐다.
빛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는 폭연 속에서, 명우의 몸이 긴 포물선을 그리며 빠져나왔다. 판초우의가 새카만 연기를 내뱉으며 펄럭였다.
타악!
덤블링을 하며 착지한 명우가 아지트를 주시했다.
‘이 정도로는 어림없겠지.’
쾅! 콰앙!
쿠르르르…….
아지트가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키더니 땅이 꺼지듯 무너졌다.
그런데 폭연의 중앙으로 갑자기 연기와 불꽃이 회오리치며 빨려들어 갔다.
청소하듯 연기를 흡입한 새카만 구멍이 작은 불꽃을 터트린 후 사라졌다.
그 위에 이현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 둥실 떴다.
“야야. 사람 다치면 어쩌려고!”
“이 반경 십 킬로미터 내에 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들린 총이 연속으로 불을 뿜었다.
홱 고개를 젖혀 첫 번째 총알을 피한 이현이 손바닥으로 다른 총알을 파리 잡듯이 후려쳤다.
총알이 맥없이 꺾여 폐허에 바람 멍을 냈다.
“뭐 하자는 건데.”
이현의 몸이 날아온다고 느낀 순간, 바로 앞에 섰다. 피하려는 명우의 저격총을 이현이 붙잡았다.
끼익.
총구가 엿가락처럼 휘었다.
“후.”
총을 놓고 뒤로 뛴 명우가 쌍권총을 꺼내 난사했다.
원래 권총이라는 것은 한 손에 쥐고 정조준해서 쏴도 맞추기가 힘들다. 양손에 권총을 들고 쏘는 것은 영화에나 나오는 비현실적인 기술.
그러나 그가 쏜 총알은 전부 이현의 미간과 눈, 명치를 정확히 노렸다.
매일 쉬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연습하며 실전에서도 반복한 결과.
이현이 피하지 않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눈에 부딪힌 총알이 납작하게 찌그러졌다.
마력이 실린 총알인데도!
‘역시 안 통하나?’
얼굴을 노린 왼손 잽이 날아들었다.
급히 팔을 교차해 막는데… 명치에 오른 주먹이 작렬했다.
왼손 잽은 페이크. 진짜는 라이트 스트레이트였던 것이다.
“커헉!”
강자는 그 힘에 자만해 단련을 게을리하기 마련인데… 이현은 달랐다.
그 기술도 이미 입신의 경지. 아마 신체 능력이 비슷했더라도 승리를 장담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명우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에서 떨어진 권총이 바닥을 굴렀다.
“네가 죽인 리자드맨은 부케라는 녀석이다.”
빠직!
이현의 발이 권총을 밟았다.
“취미는 요리고 자기가 한 요리를 남에게 대접하는 걸 좋아했다더군. 릴토, 바나셋이라는 두 부부가 20년 만에 어렵게 낳은 외동아들이었어. 장차 황궁에도 요리를 납품하고 싶어 했지.”
복부를 한 대 맞은 것만으로 내장이 진탕된 듯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입안에서는 쇠 냄새가 번졌다.
내출혈. 내장 어딘가가 파열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그의 몸은 기이한 명정 상태에 들어가…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움직여! 움직여!’
명우의 손이 바닥을 긁었다.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가 그의 머리를 눌렀다.
“네가 죽인 ‘사람’의 무게다. 왜 죽였냐?”
말을 거는 건 좋다. 몸을 회복할 시간을 벌 수 있으니. 명우는 배를 잡고 호흡을 정돈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이렇게 쉽게는 아니었다.
“방송을…….”
“뭐?”
“방송을 보셨을 텐데요? 할 말은 거기서 다 했습니다.”
퍼엉!
빛이 번쩍이더니 연기가 폭발했다.
이현이 크게 입김을 불었다.
“후!”
연막탄의 연기가 폭풍에 휩쓸린 것처럼 흩어졌다. 틈을 봐 도망치려던 명우의 몸도 바람에 휩쓸려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이현의 발이 넘어진 그의 가슴을 밟았다.
“죽이려면 진즉에 죽였어. 포기해.”
가볍게 밟고 있었지만… 무게나 힘 이상의 압력이 명우를 짓눌렀다. 그러나 명우의 눈에서는 오히려 불꽃이 터졌다.
“포기하란 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하죠! 빈이가 죽었어도 쉽게 포기할 수 있었습니까?!”
피를 토하는 외침에 이현의 발에서 힘이 약해졌다.
“제 가족을 죽인 게 리자드맨들입니다. 전 그들을 보기만 해도 토할 것 같아요! 그날의 기억이, 고통이 다시 떠오른단 말입니다!”
그의 발을 붙잡은 명우가 숨을 몰아쉬고 외쳤다.
“그런데 저더러 리자드맨들의 행복을 위해… 내 고통을 참으라고요? 포기 못해요! 못한다고요!”
“너… 이 등신이.”
그 순간 명우는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학교 폭력을 당한 중학생이 보였다.
퇴근길에 강간당한 여성이 흐느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가, 연인을 강도에게 살해당한 군인이 울부짖었다.
온 세상의 복수를 원하는 자들… 무력한 이들의 시선과 원망이 느껴졌다.
더 이상 당하고만 살고 싶지 않다, 복수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명우가 나온 큐튜브를 보며 공감하고 동경하며 경애했다.
복수심… 분노가 몸에 흘러들었다.
‘그래… 받은 대로 돌려줘야 해. 약자로서 핍박받고 빼앗기는 그 기분을 고스란히 느껴 봐야 한다!’
무력하던 몸에 힘이 차올랐다.
마력과 비슷하지만 다른 기묘한 힘.
그러나 힘의 존재를 깨달은 순간 명우는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 수 있었다.
“으아아!”
붉은 글자들이 명우의 몸을 휘감았다. 폭발하는 듯한 기세에 이현의 발이 물러났다.
“크, 으윽!”
둥실 떠오른 명우의 몸이 붉은 오라를 휘감고 섰다.
“포기하고 사는… 그런 부조리한 세상에서… 난 살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