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한 초월자는 딸바보-120화 (120/150)

120화. 라면 먹고 가자 (1)

모든 성단과 성좌가 외신들을 두려워했다.

모든 외신이 ‘끝없이 탐식하는 공허’와 비슷한 힘을 지녔다면 당연히 두려워해야 마땅할 것이다.

만약 공허 녀석이 지구에 온다면, 지금 성단들이 전부 힘을 합쳐야 대응이 가능할 수준이겠지.

그 당시에는 ‘우리가 한 은하 전체와 싸우나?’ 싶은 기분이었으니…….

“크루엘 님의 표현을 빌리면… 성좌들은 기생충이고, 외신들은 외부의 바이러스입니다. 외부의 바이러스로 인해 숙주가 죽으면 성좌들도 죽지만… 기생충들만으로는 그걸 막을 수 없겠죠.”

베요네타가 말을 받았다.

“백신… 저희가 필요하고요. 물론 백신만으로는 버거울 수 있으니, 별것 아니어도 기생충의 힘도 필요하겠지요.”

“그 눈깔 괴물이 공허 놈과 비슷하지는 않기를 바라야지.”

가장 강력한 죽음의 기사단이 아낙톤과 함께 사라진 상태다.

제국의 전력 절반이 사라진 수준.

지금 외신과 싸우면… 지구는커녕 키르단 제국을 지키는 것만도 벅찰지도 모른다.

‘아닌가? 우리 녀석들도 강해졌으니 잘해낼지도?’

어쨌든 전력은 있으면 있을수록 좋다.

성좌라는 것들이 기분 나쁘기는 해도 아직은 필요한 것이다.

“아낙톤이 돌아와 주면 좋을 텐데.”

“아. 그리고…….”

힐데가 치맛자락에서 뭘 주섬주섬 꺼냈다.

“지구에서 보내온 서류입니다. 제가 대강 훑어보니, 지구에 주둔 기지 설치와 협정 방향에 관한 내용이더군요.”

“어, 그래? 그럼 힐데가…….”

외눈 안경이 번쩍 빛났다.

“폐하께서 꼭 검토해주셔야 할 내용입니다.”

“…….”

* * *

어두운 밤.

금이 간 핸드폰의 검은 화면에 하회탈이 비쳤다.

장갑을 낀 손이 화면을 툭 터치했다.

손가락이 큐튜브를 클릭해 슥슥 넘기다… 뉴스 하나의 위에서 문뜩 멈췄다.

툭.

-…최근 들어 아인들의 사회 활동이 활발해지며 이에 따른 갈등도 늘어나고 있는데요. 이 현상에 대해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말끔한 흰 정장을 입은 아나운서가 노년의 교수를 바라봤다.

-네, 기본적으로는 예전 이민자 문제와 비슷하다, 그렇게 보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나 불법 체류자들 말씀이시죠?

-네에.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아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느냐는 거겠죠.

-마왕 이현 님의 군대가 강원도에 주둔하면서 그들의 가족들도 함께 오게 됐는데요. 이 일이 아인들의 사회화에 도움이 될까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죠. 마왕님의 딸도 아인이잖아요?

빠직.

핸드폰이 손아귀 힘을 못 견디고 부서졌다.

“아.”

명우는 알루미늄 캔처럼 찌그러진 핸드폰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깨진 액정은 더 이상 아무것도 비추지 못했다.

“새로 사야겠군.”

덤덤히 말한 명우가 일어났다.

어둠이 내린 옥상에 바람이 불며 판초우의를 휘날렸다.

흐느끼는 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사…살려주세요.”

명우는 몸을 돌렸다.

팔이 뒤로 묶인 리저드맨이 흐느끼고 있었다.

2미터가 넘는 거구에 빠른 재생력과 순발력을 지닌 괴물이 바로 리저드맨이다.

그런 괴물을 무력하게 제압해놓은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지닐 만도 했건만… 명우의 시선은 한없이 싸늘했다.

그가 마체테를 꺼내 들었다. 불길한 보랏빛이 감돌았다.

리저드맨이 겁에 질려 꿈틀거렸다.

“이, 이러지 마세요. 전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제국의 물건을 팔러 왔을 뿐이에요! 뭔가 착각하신 겁니다!”

“괴물은 죽어.”

“으, 으아아!”

마체테가 한순간 달빛을 번쩍 반사했다.

촤악!

옥상에 붉은 피가 번졌다.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색이다.

“큭, 크크큭…….”

그는 다시 몸을 돌렸다.

저 멀리… 그가 선 곳과 달리 화려한 야경의 가운데를 차지한 전광판.

그곳에 빈이를 안은 이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인을 대한민국 사회에 받아들인다… 무척 훌륭하고 인도적인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들에게 피해를 받았던 사람들은?

전복된 차에서 도시락처럼 꺼내져 씹어 먹혀야 했던 가족들과… 그 광경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자신의 슬픔과 증오는?

약자들은 그냥 당했던 것을 잊고 평화롭게 찌그러져 있으라는 소린가?

그렇다면 나는 그 면상에 침을 뱉고 개소리 말라고 외치겠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아무것도 잊히게 두지 않겠다!

그들이 모든 걸 잊고 평화로 나아가겠다면, 나는 그 토대에 피바다가 있었음을 알리는 존재가 되리라.

사회가 그들을 쉽게 용서하지 않음을 보여주겠다.

물론 세상에는 나쁜 아인과 착한 아인이 있다.

마왕, 형님의 군대도 착한 자들일 것이고 실질적으로 이 세상에도 그들의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선함과 악함의 구분을 하는 순간, 증오의 고삐를 늦추게 된다.

명우는 그것만은 결코 할 수 없었다.

증오의 고삐를 늦추고 혼자만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눈앞에서 죽어가던 부모님과 여동생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았기에.

“죄송합니다.”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사과를 남긴 명우가 옥상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판초우의가 휘날리며 그의 몸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수십 대의 커다란 크레인이 자재를 나르는 공사 현장.

그 밑으로 도넛을 세워놓은 것 같은 구조물이 보였다.

10층 건물만큼 커다란 크기.

화강암을 닮은 재질인데, 햇빛을 받으면 묘하게 반짝였다.

번쩍!

도넛의 중앙에서 빛이 터지더니 구멍을 꽉 채울 만큼 벌어졌다.

게이트가 열리고, 안에서 배의 선미가 불쑥 튀어나왔다.

땅에서 1미터쯤 떠오른 배가 천천히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사람들이 앞에서 형광봉을 흔들며 위치를 조정했다.

선미에서 이현의 얼굴이 난간 밖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오, 넓네.”

강원도의 ‘제국 주둔 기지’ 건설부지.

이래 봬도 황제랍시고 한번 살펴볼 겸 구경을 나왔는데… 만들어지는 모양이 제법 그럴듯하다.

이현이 난간을 밟고 뛰어내렸다.

“우악!”

“사람이 뛰어내렸다!”

“자살인가?!”

왠지 미안해 보이는 비명들을 뒤로 하고 걸어가는데… 정장을 입은 남자가 허겁지겁 뛰어왔다.

“마왕님?”

“응? 아, 난데.”

남자가 안전모를 가슴에 대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건설 총책임자인 한경태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집중되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이현이 얼른 그를 일으켰다.

“아니, 뭐 무릎까지. 민주주의 사회에서.”

“예? 이게 예법 아닌가요?”

“…누가?”

경태가 고개를 돌리니 거기 서 있던 아인 인부들이 눈을 피했다.

장난을 좀 친 모양이군.

“됐어. 공사는 잘돼가나?”

“아, 예! 제국에서 이동 수단을 지원해주신 덕에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보시면 저쪽 큰 건물이 막사 부지이고, 이쪽 길로 가시면 레크리에이션 센터 및 마트, 영화관 등이 밀집된 쇼핑 구역이 만들어질 예정입니다.”

“으음~ 그렇군.”

부대 내에 마트나 영화관 같은 시설이 전부 있고 그게 다 공짜면, 폐하께서 원하시는 교류는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견도 있었지만.

어차피 부대가 세워지는 곳이 강원도라 이동도 힘들고.

다짜고짜 사람들과 친해지라고 명령해서 친해질 수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습자지에 물방울 떨어뜨리듯이 조금씩 교류를 해나가는 것이다.

“폐하!”

한창 흐뭇하게 구경하고 있는데, 익숙한 조르그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질병 기사단의 천부장인 제노였다.

“어? 네가 왜 여기 와 있냐?”

“일단은 주둔군 담당이라 안 캅니까.”

“어어, 그래. 수고한다. 근데 웬일?”

“그게 말입니더.”

제노가 발톱으로 두꺼운 갑피를 벅벅 긁었다. 꽤 곤란한 눈치다.

“실은… 실종 사건이 좀 있어서요.”

“실종?”

“아직 확정은 아입니더. 근디 보고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비인가 루트로 나간 민간인 몇이 있었는데, 연락이 안 됩니더.”

당연한 얘기지만 제국에도 범죄자는 있다.

불법적인 약이나 물품을 판매하는 자들… 그런 자들에게 이번 일은 새로운 상로의 개척으로 보일 것이다.

“비인가 루트라면 어떤 거야?”

“인부들 가족이나 기사단 가족입니더. 하… 금마들 규칙 지키라니까 한 귀로 흘렸다 아입니꺼. 감시 뚫고 몰래 나간 모양입니더.”

공사 중인 사람들과 그들을 호위하러 온 기사단은 몇 주째 지구에 체류 중이다.

그들을 가족들이 보러 올 수 있게 허락해주었더니 몰래 구경이라도 나간 모양이었다.

“파악한 게 언제쯤인데?”

“이틀 됐슴니더.”

“그래?”

그렇다면 이건 제국만의 일이 아니다.

그자들이 단순히 관광하러 나간 거라면 다행이지만… 마약이라도 팔거나 하면 문제가 커진다.

제국 전체의 명예가 실추되는 일.

아인들의 이미지도 안 좋아질 테고.

이현은 즉시 유지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마왕님. 무슨 일이시죠?

“어, 부탁할 게 있어서. 잠깐 만날 수 있을까?”

-네, 어디로 가면 될까요?

묻는 목소리에 오늘이 토요일임이 생각이 났다. 이런 민폐가.

“음~ 아냐. 내가 가지. 그게 빠르니까. 집 어디야?”

-…….

묘한 침묵이 들려왔다. 이현은 핸드폰이 꺼졌나, 싶어 한 번 화면을 보았다.

멀쩡히 연결되어 있는데.

“여보세요?”

-아, 예! 아닙니다! 주, 주소 불러드릴게요. 서울시 서초구 동광로 18길…….

한참 말하던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얼마쯤 걸리시나요?

“글쎄… 한 삼십 분?”

여기서 대충 구경하는데 이십 분. 뛰어가는데 십 분이 아닐까.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런데 혹시 한 시간 뒤에… 아니, 한 시간 반 뒤에 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주말에도 일하는 중이었다니, 탈모가 걱정되는 일정이다.

하긴… 그녀는 헌터협회의 이사. 바쁘지 않다면 더 이상하다.

괜히 더 바쁘게 한 것 같아 미안함을 느끼며 이현이 끄덕였다.

“어어, 편한 대로 해.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그럼 도착 전에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아, 그래. 그럼 이따…….”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겼다.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기세다.

“많이 바쁜가 보네……?”

* * *

지애는 바빴다.

샴푸를 쭉 짜 머리에 바른 그녀가 빠른 손놀림으로 거품을 내며 거울을 보았다.

화장기 없는 푸석푸석한 피부에 다크 서클… 걸친 건 뜯어진 셔츠에 추리닝.

돈을 못 버는 게 아닌 그녀지만, 옷을 살 생각을 안 하고 살다 보니 집에서 편하게 입는 옷들은 죄다 이 모양이다.

‘이 꼴을 이현님께 보일 뻔했잖아!’

열성적으로 머리를 문지르던 손이 문득 멈췄다.

“근데 왜 집으로……?”

무슨 중요한 할 말이라 하필 집일까?

혹시… 사적인 일?

거울 속에서 지애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아니, 그럴 리가.’

무슨 접점이 있었다고. 상식적으로 그럴 리가 없지.

하지만 이현님은 저 상식 밖의 세계에서 온 분이니 다른 상식을 지녔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일단 집부터 찾아가는 것이 예의라던가…….

“…일단 씻자.”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지애는 달아오른 얼굴을 두드리고 샤워를 시작했다.

머릿속으로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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