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돌잔치 (1)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살아남았다.
지구에 존재하는 무수한 단말과 별개로 외우주로 사출된 위성 속에서.
원래의 힘에 비하면 찌꺼기나 다름없는, 정보의 단말에 불과했으나…….
그럼에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아무리 마왕이라도 외우주까지 탐색 범위를 넓히지는 못할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 만일을 대비해 사출시켜 놓은 단말이라 카오스 성단의 누구도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
외우주로 사출한 단말은 모두 다섯.
만약에 사출 흔적을 발견해 경로를 추적하더라도, 이미 너무 멀어져 추적을 포기할 확률이 88.7%.
게다가 이미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미리 지정해두었던 차원에 거의 도달한 상태였다.
생명이 넘쳐나고 문명도 어느 정도 발달한 차원.
그중 하나라도 도달해 문명을 뿌리고 힘을 흡수하면 언제든 재기할 수 있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으나… 그는 불멸, 불사인 성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의식이 새로운 차원의 존재를 느꼈다.
쿠구구구…….
대기권에 접어들었는지, 몸이 마찰열에 의한 불길에 휩싸여 떨어졌다.
좋은 일이었다. 관측해두었던 대로 지구와 대기 조성이 비슷하다는 뜻이니.
외부 카메라에 불이 들어왔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드러났다. 구름을 뚫고 한동안 내려가자, 인공적인 풍경이 나타났다.
세부적인 면에서는 지구와 큰 차이가 나지만, 정밀하게 계획된 도시 구획.
-위험 존재 감지. 등급 측정 불능.
도시에서 올라온 새카만 연기가 단말을 그을렸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카메라가 이리저리 돌아갔다.
연기가 사라진 순간, 구름을 뚫고 내려온 붉은 촉수들이 보였다. 촉수들이 지상에 박힐 때마다 땅이 거세게 울렸다.
카메라를 위로 올리자… 구름 위로 흉측하고 거대한 그림자가 드러났다.
도시가 무언가에 의해 침략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착륙을 멈출 방법이 없었다.
쿠웅!
도로 한가운데에 단말이 틀어박혔다. 초록색 피부를 지닌 인간과 비슷한 존재들이 아우성을 치며 도망가는 중.
그들의 뒤에서 촉수가 세로로 갈라졌다.
쩌억.
안에서 대형 트럭의 타이어같은 붉은 형체들이 뛰어내렸다. 타이어의 표면에서 톱날같은 가시가 돋아나더니 빠른 속도로 도로를 굴렀다.
발로 뛰며 도망가던 괴물들이 따라잡힌 것은 순식간.
콰지직!
도로를 깨부수며 펄쩍 뛰어오른 타이어가 그들을 깔아뭉갰다.
“으아아!”
“캬아악!”
톱날이 회전하며 피와 뼈를 찢고 깨부쉈다. 육신의 파편이 도망치던 동족에게 튀며 비명을 자아내지만, 금방 비명을 지른 이도 육편으로 화한다.
악몽의 화음을 연주하며 타이어가 질주했다.
찢어지고 부서진 피와 육신들이 스스로 날아올라 촉수에 빨려들었다. 그 안에 깃든 영혼과 한 줌의 마력까지 남김없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감탄할 정도로 기계적이고 효율적인 학살의 현장.
그때 타이어 하나가 급격히 방향을 꺾더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게 달려들었다.
-포착됨. 회피 불가. 파괴.
콰르릉!
피와 살점이 엉겨 붙은 톱날이 몸을 찢어발기는 짧은 순간…….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시커멓게 물든 거대한 눈을 보았다.
단말에 담긴 그의 정보를 탐욕스레 흡수하며 눈이 웃었다.
-달콤하구나… 달콤하겠구나…….
* * *
무수히 쌓은 아티팩트가 키르단 제국 황궁의 천장에 닿을 것 같다.
꼭대기에 놓인 물건은 떨어질락 말락 아슬아슬한 상태.
이현이 이마를 짚었다.
“아니, 좀 과하지 않냐?”
빈이를 돌보는 데 집중하기 위해 돌잔치 준비는 부하들에게 위임했더니… 뭔가 크게 잘못된 느낌이다.
“누가 돌잡이를 이렇게 해.”
이 녀석들은 돌잡이를 뭐라고 생각한 걸까.
바자회랑 착각한 게 아닐까?
이렇게 많은 물건을 쌓아둔 것도 기가 막힐 지경이다. 뭐 하나를 잘못 빼면 젠가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다.
크루엘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폐하. 황녀님… 아니, 공주님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대한 행사 아닙니까? 폐하께서는 항상 공주님께서 재능이 너무 많아 곤란하다고 하셨잖아요?”
“응? 아, 그렇지.”
“예를 들어 과학자라고 해도… 생물학, 물리학, 기상학 등 다양하고… 마법사도 흑마법, 백마법, 얼음 마법 등 다양한데… 거기서 또 세부적으로 나누면 끝이 없죠.”
얼음 마법이라고 해도 범위 마법과 표적 마법이 따로 있고… 거기서 또 아이스 애로우를 집중적으로 연마하는 녀석이 있다.
쌓인 물건들 사이에 ‘미세 룬마법서’라거나 ‘마안 개발 초기’ 같은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설득력이… 있어!’
“그런 다방면의 재능을 고려하면서… 나름대로 추리고 추린 겁니다.”
“으음… 그렇군!”
이현은 크루엘의 어깨에 손을 척 얹었다.
“고생했다! 역시 종말의 기사단장!”
“훗, 별것 아니죠. 아, 그리고… 이번 파티에도 올림푸스랑 아스가르드에서 성좌란 것들이 참가하고 싶다는데요?”
“축하해주는 사람이 많으면 좋지. 오라 그래.”
올림푸스의 경우 빈이를 구하러 가준 놈들이기도 하다.
위치를 알면서도 진즉에 안 간 것은 상당히 짜증 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란 꼴이겠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 카오스 성단의 자료에 따르면 지구에 게이트를 여는 건 그놈들이잖아요?”
카오스 성단의 차원들을 손에 넣으며 당연히 그들의 정보도 손에 들어왔다.
그 결과… 올림푸스, 아스가르드를 포함한 다섯 개의 거대 성단이 지구에 무작위로 게이트를 여는 원흉임을 알아냈다.
카오스는 이 게이트의 통제권을 두고 그들과 대립하던 사이였다.
게이트를 게임처럼 조작하는 게 도대체 뭐가 이득인지까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이번에 더 깊이 파고들 기회가 되지 않겠냐?”
아레스라는 놈은 술이 들어가면 뭔가 술술 불 것 같고…….
여차하면 크루엘을 직접 방에라도 잠입시키면 그만이다.
“아무튼 놈들은 나한테 잘 보이고 싶은 것 같고, 빈이를 어떻게 할 생각도 없는 것 같으니 괜찮지 않겠냐? 여차하면 막으려고 이것도 조정했잖아?”
이현이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슬라임 같은 몸에서 물방울들이 그의 가슴을 향했다가 얼굴로 올라왔다.
“그만큼 불안정해지기도 했으니 조심해 주세요. 저희에게 좀 더 의지하시고요.”
“잔소리는. 너까지 힐데 닮아 가냐?”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이만큼 신경 써줄 때마다 가슴 깊이 고마웠다.
좋은 친구들을 뒀다.
“아, 그럼 마무리 좀 부탁한다. 난 빈이 잘 놀고 있나 가볼게.”
“네, 폐하!”
* * *
아스가르드의 주신 오딘은 자신의 왼쪽 눈을 지혜의 샘에 제물로 바치는 대가로 엄청난 지혜와 마법적인 지식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 왼쪽 눈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며…….
삶과 죽음의 모든 순간을 지켜볼 수 있다는 전설.
그것은 사실이기도, 사실이 아니기도 했다.
오딘은 안대를 자신의 왼쪽 눈에 덮고는 이마를 짚었다.
“역시 아카식 레코드를 계속 관찰하는 건 힘들군.”
그가 든 잔에 프레이야가 와인을 따르며 웃었다.
“처음에는 30초밖에 못 봤던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죠.”
“거인놈들을 다 죽이는 게 아니었어. 새로운 비프로스트도 안 보이고. 언제까지 올림푸스와 시스템이나 갖고 노나?”
벌컥벌컥 와인을 들이켠 오딘이 먼 곳을 바라봤다.
키르단 제국의 초대를 받고 황궁에 도착한 것이 바로 어제.
그들은 배정받은 방에서 황궁의 안뜰을 내려다보던 중이었다.
마침 안뜰에서는 이현이 황궁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물론 우연이 아니다.
‘눈’으로 그의 위치를 확인하고 일부러 나왔던 것이다.
이 눈 덕에 오딘은 카오스 성단과 이현의 전투에서 이현이 승리할 것을 예상했고…….
승리 선언이 내려지기 전, 발 빠르게 움직여 카오스가 지배하던 차원들을 공격하고 그들에 대한 정보를 키르단에 제공했다.
빠르게 행동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지금, 그에게서 느껴지는 강대한 힘에 절로 몸이 떨렸다.
“마왕은 어떻게 저런 힘을 손에 넣었지?”
아무리 아카식 레코드를 보아도 이현이 한낱 인간이었음은 분명했다.
출발지는 분명 똑같았다. 그런데 중간에 이현이 게이트에 빨려 들어가며, 그 이후의 기록을 아카식 레코드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저 모든 걸 무효로 하는 힘도… 역시 아카식 레코드와 연결되는 새로운 비프로스트를 아는 거야. 틀림없어.”
프레이야가 그의 어깨를 짚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조급할 것 없어요. 그가 아직 올림푸스의 편을 드는 건 아니잖아요? 여기까지 초대했으니… 그의 비프로스트에 대한 정보를 약간이라도 얻을 수 있겠죠. 그리고…….”
오딘의 자신의 안대를 짚었다.
“정보를 얻으면, 아카식 레코드에 두고 온 내 눈으로 새 비프로스트를 찾는 것도 수월해지겠지.”
“꼭 그를 우리 성단에 들이지는 않아도 돼요. 올림푸스가 그를 얻는 걸 견제하고, 우린 정보만 얻더라도… 훨씬 위에 서는 거죠.”
“더 조급해지는 것 같군.”
그때 이현이 그들을 돌아봤다.
기척을 숨기고 있었는데…….
오딘과 프레이야가 깜짝 놀라 어색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
이현이 피식 웃더니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오딘이 슬며시 물러나 커튼을 쳤다.
“또 눈 마주치면 뻘쭘하니까 딴 일이나 하자.”
“네, 그러죠.”
* * *
“하여간 이상한 놈들이야.”
이현은 중얼거리며 안뜰을 가로질렀다.
힐데의 말로는 어제 와서 한 번도 방 밖으로 나오지 않고 주는 것만 받아먹었다나.
음흉한 건지, 음침한 건지…….
말로만 듣던 히키코모리인 모양이었다.
‘우리 빈이랑 어울리게 하면 안 되겠어…….’
히키코모리들은 잘 씻지도 않고 사회성도 안 좋다는데… 저놈들도 성단이라는 곳에서 하루 종일 안 나오고 머물잖아?
사회성이 안 좋아질 만도 하지.
“쯔쯔…….”
힘만 좋으면 뭐 하나? 성격이 저 모양인데…….
반면 우리 빈이는…….
“꺄하아!”
청명한 하늘에 어울리는 맑은 웃음에 흐르는 개울도 미소 짓는 듯하다.
반투명한 몸을 가진 엘리멘탈족 등 다양한 아인의 아이들.
이번 행사를 기념하러 온 귀족들과 기사단의 아이들이다.
그 사이에서 빈이는 독보적으로 밝고 활기찼다.
한 아이와는 벌써 많이 친해졌는지… 서로의 볼에 색깔이 있는 흙을 발라주며 꺄르르 웃는 중.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따스해지고 흐뭇한 미소가 차올랐다.
“우리 빈이, 잘 놀고 있었어?”
“아뺘!”
발딱 일어나던 빈이가 중심을 못 잡고 고꾸라졌다.
한 손을 뒤로 숨기고 일어나려니 그럴 수밖에.
이현이 얼른 부축하자 빈이가 배시시 웃었다.
“아뺘아뺘!”
“응응.”
말투를 따라 하며 끄덕이자 빈이가 뒤로 숨기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선물.”
“허억!”
우리 빈이… 노느라 바쁜 와중에도 아빠를 생각해서 선물도 다 준비하고…….
감동에 젖은 이현의 눈앞에 빈이가 손바닥을 폈다.
벌레가 흙에 뭉쳐 우글거리는 둥그런 뭉치.
빈이가 순수하고 맑은 미소로 말했다.
“냠냠.”
이현의 미소에 금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