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폭풍에 대비하라
“아빠!”
풀밭에서 뛰어나온 빈이가 뭘 번쩍 치켜들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배추흰나비 애벌레다.
“뻘레!”
빈이는 얼굴이며 치마까지 온통 흙투성이였지만… 원래 애들은 자연에서 뒹굴며 커야 건강해지는 법. 이현은 헤벌쭉 웃었다.
“어이구, 우리 빈이 벌레 잡았어요!”
“웅!”
끄덕인 빈이가 벌레를 입으로 가져갔다. 이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뜨악!”
기괴한 소리에 빈이가 움찔하더니 아빠를 쳐다봤다. 이현이 재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지지야! 지지!”
빈이가 아빠와 벌레를 번갈아보다가 말했다.
“벌레. 단백질 만타!”
그건… 사실이지.
진짜 먹더라도 몸에 지장은 없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현은 황급히 다가가 벌레를 빼앗았다.
즉시 빈이가 울먹거렸다.
빈이의 입장에서는 제 먹거리를 빼앗긴 셈. 서운하고 억울한 것이다.
“후에이이잉…….”
“비, 빈아. 벌레는 몸에 안 좋아. 독도 들어있을 수 있고.”
“독?”
갸웃한다.
그러고 보니… 독이 뭔지는 안 가르쳐줬던가.
“어… 독은 몸에 안 좋은 거야. 아야 해요. 빈이 속 아야.”
빤히 보던 빈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야 시러.”
“그렇지? 우리 빈이, 배고픈가? 아빠랑 고기 먹으러 갈까?”
“꼬기 조아.”
빈이가 양팔을 들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손을 내렸다.
이현은 깜짝 놀라 보았다.
“빈이 왜? 아빠한테 안기기 싫어?”
고개를 내저은 빈이가 새치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빈이 걸어가. 빈이 공주니까.”
아무래도 최근 키르단 제국을 자주 왔다갔다했더니, 힐데에게서 뭔가 교육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 할멈은 너무 엄격하단 말이야.’
아이에게는 아이에게 걸맞은 태도가 있는 법인데…….
이현은 쪼그려 앉아 빈이와 눈을 맞췄다.
“괜찮아. 공주님들도 어렸을 때는 다 아빠한테 안겼어.”
“구래?”
“그럼그럼.”
“그럼 안아됴.”
다시 양팔을 벌리는 빈이를 안고 몸을 돌리는데…….
“힉.”
빈이가 숨을 죽이더니 이현의 가슴에 코를 묻었다.
붉은 스웨터를 입은 뚱뚱한 남자가 막 옆을 지나치는 중이었다.
“이런…….”
이현의 얼굴도 굳었다.
빈이는 납치 사건을 악몽으로 기억했다. 아이들에게는 흔히 있는 기억 회피라고 했다. 지나치게 강한 충격을 받았을 때 정신의 보호를 위해 기억 자체를 왜곡하거나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타클로스에 대해 트라우마가 남았는지, 빈이는 빨간 옷만 입은 사람을 봐도 흠칫흠칫 떨었다.
이마저 두 달이 지나면서 완화된 것이다.
처음에는 다짜고짜 울음을 터트렸다.
남들은 선물을 주고받으며 기대하고 즐거워하는 날에 트라우마가 남다니…….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우…….”
이현은 빈이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아.”
유년기의 기억은 무의식에 깊이 남는다고 한다. 이 상처가 빈이의 무의식에 남게 된다면 괴로운 일이겠지만…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덮어줄 수 있다.
앞으로 트라우마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행복하고 좋은 기억만 남겨주면 될 일.
“자, 밥 먹으러 가자.”
“혹시 마왕, 이현 님?”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막 지나치던 붉은 옷의 남자가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오… 시, 실물… 혹시 싸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사진도 좀 찍고…….”
“아, 그게…….”
하필 이럴 때.
이현이 빈이를 보자, 빈이가 고개를 들더니 남자를 빤히 살폈다. 전에는 붉은 옷을 입은 사람과는 눈도 못 마주쳤는데…….
빈이의 몸에서 차츰 떨림이 잦아들었다.
너무나 대견해서 가슴이 복받쳤다.
그 심한 트라우마를 벌써 극복해내려고 하는 것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괜찮을 것 같군요.”
붉은 남자가 다가오더니 빈이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
“정말 예쁘구나. 우리 애기 이름이 뭐니?”
“비니.”
“어이구, 목소리도 예쁘네. 아저씨가 사진 좀 찍어도 될까?”
“웅.”
“고마워.”
찰칵.
사진을 찍은 남자가 이현에게 웃었다. 넉살 좋은 남자였다.
“감사합니다.”
“뭘… 별것도 아닌데요.”
* * *
“그럼 다음 안건입니다.”
베요네타가 종이를 들며 @흘끔, 모인 이들의 면면을 @흘끔 살폈다.
힐데를 포함해 종말의 기사단장들과 부기사단장들, 백인대장들 대부분이 회의실에 모였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성좌의 단말은 177개째 파기 처리가 완료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단말의 파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방법으로 죽음을 피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복제한 몸은 컴퓨터 하나에 들어있다거나 구형 기기에 옮겨져 있는 식이라 파괴 자체는 쉬웠지만, 문제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자신조차 단말이 몇 개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찾는 입장에서는 끝도 없이 수색만 하는 꼴.
아시스가 손을 들었다.
“본인조차 몇 개인지 기억 못 한다면… 우리가 부순 단말이 마지막인 건 어떻게 알지?”
“크루엘 경이 단말을 연구해 전용 탐색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걸 지구 전체에 적용할 예정입니다.”
“오.”
제국에 대한 정보도 지녔고… 전자기기에 힘을 발휘한다는 특성상, 어떤 점에서는 가장 위험한 성좌가 바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확실히 제거하지 않으면 또 주군이,@주군과 빈이가 위험에 빠질 것이다.
베요네타의 눈에 살기가 스쳤다.
“제 벌레들을 이용하면 @일단 탐색이 된 후@후에 단말을 제거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아시스가 끄덕였다.
“그럼 놈은 베요네타에게 맡기지.”
“그리고… 올림푸스와 아스가르드를 포함한 여섯 성단들에서 동시에 회의를 요청해, 폐하께 허락을 구할 예정입니다. 아마 새로 영입한 차원의 관리 문제겠죠.”
나라들로 치면 국경이 달라진 문제이니… 올림푸스나 다른 성단에서 이야기가 들어오는 것도 당연했다.
“폐하께서는 황녀님을 돌보셔야 하니, 이 일은 우리가 주도해 처리하지.”
“네, 폐하께 허락은 맡아야겠지만요. 자, 이제 가장 중요한 안건입니다만.”
베요네타의 눈이 번쩍 빛났다.
“제가 전해들은 정보에 의하면, 지구에는 돌잔치라고 하여… 태어난 지 일 년이 된 아기들을 위해 여는 행사가 있다고 하더군요.”
분위기가 바뀌었다.
“공교롭게도… 저희 키르단에도 아이들의 탄생 일 년을 축하하는 ‘벨’이 있으니… 국가 행사로 이를 개최함이 어떨까 합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극히 당연한 의견이군.”
“이번에 큰일이 있었으니… 분위기도 환기시킬 겸 큰 행사를 여는 것도 좋겠지!”
‘탈환 전쟁’이라 명명된 이번 전쟁에서 키르단 제국에서도 사망자가 몇 나왔다.
모두 기사가 아닌 일반인들로, 아홉 중 노약자가 셋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적이 감히 황궁에 침입해 황녀를 납치한 것이 전쟁의 시발점이다 보니… 세간에서는 황궁의 무능을 통렬히 지적하는 의견도 돌았다.
이런 상황이니, 국가 규모로 좋은 일이 생기면 가라앉은 분위기도 띄울 수 있다는 것이다.
“황녀님께서 건재하시다는 사실을 보여줄 필요도 있으니… 아주 좋은 의견이네.”
“크흠.”
베요네타가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제가 또 알아보니… ‘돌잔치’에는 ‘돌잡이’라는 행사가 있다더군요.”
“돌잡이?”
“그게 뭐지?”
크리스털 하나가 책상 위로 올라왔다. 미리 준비한 자료 화면이 크리스털을 통해 떠올랐다.
아기들이 연필이며 자동차를 고르는 영상이었다.
“이런 느낌으로… 앞에 물건을 놓고 고르는 것입니다. 연필을 들면 문필가가, 칼을 들면 요리사가 된다… 뭐 그렇게 미래를 점치는 행사라더군요.”
“호오……!”
“황녀님의 미래를 점친다… 그렇다면 앞에 놓을 물건도 신중히 골라야겠군.”
“그렇습니다.”
크리스탈이 꺼지고 베요네타의 눈이 대신 번뜩였다.
“황녀님의 미래를 결정하는 커다란 행사… 어떤 주술적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물건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황녀님의 손이 직접 닿으니 위험해서도 안 되고요.”
과연… 가장 중요한 안건이라는 말이 납득이 가는 말이었다.
그저 좋은 물건만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황녀가 직접 물건을 만진다는 것은… 그만큼 테러의 위협도 커진다는 의미.
제국민 중에 그런 놈이 존재할까, 싶지만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제국의 전력을 동원해야겠군……!”
* * *
“아니, 그럴 것까지 있나?”
이현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의 앞에는 헌터 협회의 유지애 이사와… 현 유엔 사무총장인 안드레가 앉아 있었다.
안드레가 깍지 낀 손을 탁자에 올려놓고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필요한 일입니다. 현재 세계의 헌터는 지극히 부족하라. ‘빌런’들의 발생률도 많이 높아져서 치안에 공백이 크고요.”
“빌런?”
그건 또 뭐냐.
지애가 재빠르게 눈치채고 설명을 가미했다.
“빌런이라는 건 마력을 휘두르는 범죄자들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코믹스의 용어에서 따왔죠.”
“범죄자가 그냥 범죄자지 뭐 또 따로 분류를…….”
쓸데없는 이름을 붙여주면 멋모르는 녀석들이 그걸 멋있다고 생각해 따라하기 마련.
이현이 보기에는 오히려 안 좋은 대응이었다. 안드레가 쓰게 웃었다.
“저희가 붙인 게 아닙니다만, 대중적이@대중적으로 된 용어라… 어쨌건 현재 한국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괴물들뿐만 아니라 빌런들도 헌터들이 잡으러 다니다 보니 게이트에 대한 대응이 늦어지고, 피로도 높아지는 악순환이 벌어지는 형국입니다.”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현님의 군대가 필요한 겁니다.”
“아니…….”
식탁 밑에서 발등으로 발끝으로 긁으며, 이현이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나라 군대에 치안을 맡겨서 안심이 되겄어? 특히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그런 일 했다가 피 많이 봤다고.”
명성황후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이현님이시니 믿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렇게 말하면 도루묵이지. 그리고 보통 이런 얘기를 개인적으로 하나?”
“공식적으로 서한을 주고받기에 앞서,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비공식적 만남이라 해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둔하시는 데 드는 비용의 70%는 저희가 맡고, 편의 또한 제공하겠습니다.”
“얼마나 들 줄 알고?”
이현은 다시 턱을 긁적였다.
‘하긴… 어차피 필요했기는 하지.’
어차피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놈을 완전히 잡으려면 이 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치안에 간섭할 수밖에 없다.
대뜸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 컴퓨터를 부숴대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테니 그럴 만한 명분이 필요하고.
물론 찍 소리 못하게 찍어 누를 만한 힘이 이현에게는 있지만… 지구는 어쨌건 그가 태어난 나라이고, 지켜야 할 대상이었다.
힘에 의한 지배는 발전을 저해하고 언제고 반발을 일으킬 뿐이다.
앞으로 빈이가 살아갈 세상을 아포칼립스로 인도하고 싶지는 않았다.
안드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미 미국, 중국을 포함해 30개국에서 협의가 된 사항입니다. 우선적으로 협의된 나라부터 주둔시키고 차차 넓혀나가는 건 어떨까요?”
항상 생각하던 지구와 키르단의 문화 교류.
빈이가 차별이나 멸시를 받지 않고 살려면 이종족에 지구인들이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잠시 생각하던 이현이 말했다.
“기사… 아니, 군인뿐만이 아니라 그들 가족도 함께 와서 머물 곳이 필요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