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약속과 다짐
제우스가 씩 웃었다.
“우리가 레비아탄을 구출해 이현에게 돌려주면 올림푸스는 신의를 지키는 성단으로 이름이 높아지겠지!”
아레스가 검에 묻은 피를 망토에 닦으며 그를 흘끔 보았다.
“그런데 이현이 놈들을 이긴다고는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운명의 세 여신이 알려줬다.”
운명의 세 여신이라고 하면… 미래와 운명을 내다보는 힘을 지닌 여신들.
그 강력한 힘을 발동하려면 셋이 항상 함께 모여있어야 한다는 제약이 있는데… 막상 셋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아 항상 저기압인 성좌들이었다.
“그 꼰대들이요? 아니… 복비 어마어마하게 받아 처먹었을 텐데 뭐 주셨습니까?”
“그것들 화신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
“예? 화신이 있었어요?”
아테나가 한심하다는 듯 아레스를 보았다.
“그거 모른 건 당신뿐일걸.”
“…….”
괜히 말 꺼냈다가 본전도 못 건졌다. 아레스는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아버지라면… 당연히 우리가 레비아탄 먹자고 할 줄 알았는데.”
“…네가 그러니 주신 못하는 거다.”
제우스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근엄하게 말했다.
“이번에 마왕은 카오스를 공격하기 전에 놈들의 차원을 먼저 부쉈다. 그렇게 해서 차원을 잃으면 설령 레비아탄을 먹어도 힘의 상승이 크지 않겠지. 마왕과도 싸워야 할 테고, 다른 성단 놈들도 좋다고 달려들 텐데… 그거 다 상대하다가 ‘시스템’이 깨지면?”
아테나가 대신 대답했다.
“외신들의 맛집이 열리게 되겠죠.”
“그 외신이라는 것들이 그만큼 강합니까?”
전투의 신으로서 아레스는 외신이라는 존재를 경계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본 적도, 칼을 맞댄 적도 없는 상대를 뭐 그렇게까지 경계한단 말인가?
제우스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외신들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성좌들도 서로 다르잖아요?”
뚜벅뚜벅 빈이에게 다가가며 제우스가 말했다.
“멍청한 놈아. 너는 여자들을 성격이나 생긴 게 다르다고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할 셈이냐? 비유나 관용적 표현이라면 모를까… 어찌 됐든 간에 성좌들이 인간이라고 치면 다 같은 인간 여자란 말이다.”
번개를 치켜든 제우스가 수염을 한 번 쓰다듬었다.
“그런데 외신이란 것들은 인간도 아니고 어디 뭐냐… 수컷 황소 같은 거란 말이지. 둘이 교미가 되겠냐?”
난봉꾼으로 유명한 신다운 비유다… 아테나도 아레스도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입 밖으로 낼 만큼 용기가 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묘하게 납득이 가는 설명이기도 했고.
‘근데 아버지는 황소로 변해서 관계를 맺지 않았나?’
꽈르릉!
제우스가 던진 번개가 빈이가 들어간 유리관의 아래를 때렸다. 기계가 박살 나며 유리관에도 금이 가더니 연초록색의 물이 샜다.
콸콸콸…….
“흠.”
해체된 유리관에서 아테나가 조심스럽게 빈이를 안아 들었다.
축 늘어진 모습에서는 마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엄청나게 강해져 있던 무사시와 할리우드의 상태를 생각해보면… 이미 힘이 빨려 죽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제우스가 걱정스레 그 모습을 보았다.
“아이는?”
“그게…….”
그때, 또 다른 게이트가 바로 옆에서 열렸다.
아테나가 얼른 물러나 창을 빼 들고 경계하는데…….
“응?”
게이트에서 이현이 나타났다. 한 손에는 잔뜩 찌그러진 주사위 같은 것을 들었다. 제우스가 눈을 부릅떴다.
‘저, 저건 메타트론의… 시체? 설마 혼자 셋 다 죽였단 말인가?’
설령 혼자가 아니었더라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만한 힘을 그의 세력이 갖췄단 의미이니.
이현도 예상치 못한 성좌들의 존재에 한쪽 눈썹을 올렸다.
“당신들은…….”
말을 하다 말고, 이현의 눈이 아테나의 품으로 향했다. 순간 그가 날카롭게 눈을 떴다.
이윽고 피어오르는 어마어마한 살기.
무슨 오해를 했는지 뻔했다.
제우스가 얼른 무사시와 할리우드의 시체를 가리켰다.
“우리가 이 아이를 구하러 온 것이네! 보게!”
“그래……?”
시체들에서 아레스로 눈길을 돌린 이현이 끄덕였다.
“하긴 계략을 짤 거면 저 바보는 안 데려왔겠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였지만 아테나와 제우스에게는 분명히 들렸다. 두 성좌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레스가 바보라 다행이군!’
‘아레스가 바보라 다행이야!’
* * *
이현은 아테나에게서 빈이를 넘겨받은 즉시 제국으로 복귀했다.
위치를 전달받은 시점에 이미 제국에 의료진을 준비시켜 놓았다. 제국의 의료진들뿐만이 아니라, 지애에게 연락해 협회에 소속된 의사들까지 부른 상황.
“여기!”
도착하기 무섭게 일사천리로 의료진들이 빈이에게 달라붙어 병실로 데려갔다.
처음 봤을 때부터 파리하던 얼굴이 병상에 눕자 시체처럼 창백하게 보였다.
햇살처럼 그렇게 밝게 웃던 아이였는데…….
“괜찮겠나?”
지구에서 온 의사가 마스크를 쓴 얼굴로 말했다.
“우선 외상이나 큰 장기 손상은 없어 보입니다.”
멀쩡하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나도 들어가지.”
성큼 발을 내딛는 이현의 가슴을 크루엘의 촉수가 짚었다.
철퍽.
“마음은 십분 이해합니다만, 오히려 의사들이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정론이었다. 이현은 진료실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단단히 깍지 낀 양손이 머리를 받쳤다.
“젠장.”
세상에서 제일 무능력한 아빠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무능력하지 않다고 누구에게 항변할 수 있을까.
그의 어깨에 크루엘이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폐하, 저도 들어가 보겠습니다. 마법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그래.”
크루엘은 연구자이며 동시에 의사이기도 하다. 오히려 이런 일에 있어서는 다른 의사보다 나을 수도 있었다.
“폐하.”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힐데의 얼굴이 보였다. 주름진 눈가가 축축했다.
“황녀님을 구해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일단은.”
움찔.
몸을 떤 힐데가 이현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옆에서 함께 기다려도… 결례가 되지 않을까요?”
“…그래.”
한 시간이 열흘처럼 흘렀다.
까마득한 암흑 속에서 물도, 공기도 없이 방치된 것 같았다.
게이트를 잘못 타서 심우주의 어둠으로 날려졌을 때도, 블랙홀에 빨려 들어갔을 때도 이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두려움은 차갑고 끈적했다.
“폐하.”
갑자기 힐데가 손을 잡아서 보니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고 있었다.
“아.”
“괜찮습니다. 황녀님께서는 폐하를 닮아 강하신 분이잖아요? 분명 무사하실 겁니다.”
힐데도 빈이를 납치당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많이 고통받았을 터.
게다가 외적으로 나이가 더 들어 보일 뿐… 실제로는 이현의 나이가 더 많다.
위로를 받는 상황이 부끄러우면서 미안했다.
한심한 노릇이다.
“…그래.”
그때, 진료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지구의 의사와 키르단의 의사가 동시에 걸어 나왔다.
둘 다 심각한 얼굴이었다.
이현은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됐지?”
의사들이 서로 마주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누가 먼저 말을 할지 정하는 듯했다.
키르단의 의사가 먼저 나왔다.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마력과 영혼 모두 안정적입니다. 처음 오셨을 때는 마력이 거의 고갈된 상태셨지만, 지금은 빠르게 주변 마력을 흡수하며 몸을 회복하고 계십니다.”
뒤를 이어 지구의 의사가 말했다.
“바이탈 사인과 호흡도 안정적이고, CT 촬영 결과 내부도 일단 지장이 없으십니다. 뇌파도 안정적이고요. 다만…….”
“다만?”
슬픔과 두려움이 섞인 얼굴로 망설이던 의사가 힘들게 입을 뗐다.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를 않고 계십니다.”
이현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뒤에서 누가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지만, 의사의 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의식이 안 돌아온다고?”
“정황이나 증상으로 유추해보았을 때는 심인성 장애인 체념증후군과 비슷합니다. 전쟁 중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은 아이들이 잠이 든 채 깨어나지 않는 병이죠.”
“영혼을 빼앗긴 건 아닌가?”
역시 올림푸스에서 무슨 수를 쓴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빼앗긴 영혼을 다시 찾으러 가면 그만이다. 당장이라도 몸을 돌리려는 이현을 키르단 의사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그건 아닙니다. 황녀님의 영혼은 멀쩡합니다. 마력만 빼앗기셨을 뿐이에요. 마력 고갈로 인한 일시적 의식 상실일 수도 있습니다.”
“우선 좀 더 경과를 지켜보고…….”
어째서 빈이를 살리지 못하느냐.
순간 일어난 분노는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왔다.
애초에 빈이를 그들에게 빼앗긴 것은 바로 이현 자신이었으니… 누굴 탓하겠나.
정당하지 못한 분노였다.
이현이 두 의사를 지나쳐 진료실로 들어갔다.
빈이를 둘러싸고 있던 의사들이 놀라 우르르 물러났다.
작은 가슴이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살아있어.’
안심과 동시에… 그럼에도 의식이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죄여왔다.
이현이 조심스레 빈이의 손을 잡는데, 따라온 의사가 말했다.
“폐하의 힘이 방패가 돼서 황녀님의 힘은 조금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황녀님께서도 스스로 저항하셨겠지만요.”
“그렇군.”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타나토스를 비롯해 성좌들이 사용한 힘은 이현 자신의 것과 비슷했다.
그들이 빈이의 안에 깃든 레비아탄의 힘을 흡수했다면, 불을 사용하거나 그들에게서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어야 했을 것이다.
“우리 빈이도… 노력했구나.”
이현의 손이 애틋하게 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자기 납치돼서 놀랐을 텐데도… 의연하게 제 몸을 지켰다는 것이 대견했다. 동시에 그런 상황까지 몰아넣은 못난 아버지라 미안했다.
“그럼 더 조치할 수 있는 건 없나?”
“…송구합니다.”
“아니, 최선을 다했으면 됐다. 고생했어.”
이현은 빈이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현대의학과 마법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끝났다면 남은 것은 빈이의 능력을 믿는 것과… 사랑을 베푸는 것뿐.
‘아빠가 옆에 있어.’
그의 힘이 빈이의 몸을 맴돌았다.
특별한 효과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아빠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을 뿐.
움찔.
그런데 빈이의 검지가 순간 움직였다.
“빈…아?”
모두가 숨죽여 빈이를 지켜보았다. 아버지의 부름에 응답하듯, 이번에는 작은 손이 이현의 검지를 쥐었다.
이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빈아!”
붉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가 천천히 들렸다. 초점 없는 눈이 멍하니 천장을 헤매다가 이현을 향했다.
겨울을 지나고 봄에 꽃이 피는 광경을 빠르게 재생한 것처럼… 하얀 얼굴에 생기가 돌며 미소를 띠었다.
“아…빠아…….”
“그래, 빈아! 아빠야!”
이현이 미소를 짓는데… 빈이가 별안간 울먹였다.
“무또오…….”
“응? 빈이, 뭐가? 아빠 있는데 뭐가 무서워?”
칭얼거리는 몸을 안자 빈이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훌쩍거렸다.
“꿈 무또오…….”
아무래도… 빈이는 그간 있었던 일을 악몽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이현은 빈이를 와락 안았다.
“아빠 여기 있잖아. 하나도 안 무서워. 무슨 일이 생기든 아빠가 지켜줄 거야.”
“딘짜……?”
“그럼!”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
이 자리에서 이현은 굳게 다짐했다.
“우리 빈이… 아빠가 하나도 안 무섭게 지켜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