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용을 삼킨 신 (2)
콰앙!
문이 부서져라 열리고.
크루엘이 잔뜩 성이 나 붉어진 몸으로 키르단 황궁 알현실을 가로질렀다.
“이런 미친놈들! 미친 폐하! 어떻게 날 빼고 그런 결정을!”
꾸물꾸물 움직이는 몸이 이리저리 늘어났다가 성게처럼 가시가 돋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알현실을 지나, 집무실에 도착한 크루엘의 시야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들어왔다.
아시스와 베요네타.
아시스는 거대한 도끼창을 팔짱에 낀 채.
베요네타는 원래 이현의 자리인 상석에 앉은 상태.
묘한 우월감에 젖은 것 같은 눈빛이었다.
아마 직접 이현에게 명령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왔군요.”
당당한 표정.
크루엘의 몸이 길게 일어섰다.
“폐하를 놈들의 진영에 혼자 보냈다는 게 사실이냐!”
기사보다는 연구자를 자처하며, 가급적 흥분하지 않고 차분함을 모토로 하는 크루엘이었으나…….
이번 일에서만큼은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베요네타가 정말로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기사단을 모집할 생각마저 했다.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왔으나… 이렇게 태연한 모습을 보니 의심이 다시 고개를 들며 분노를 자극했다.
그래도 일단 이유는 들어보자고 생각했는데…….
“그래요. 혼자 보내드렸습니다.”
베요네타가 태연한 표정으로 하는 말에 다시 화가 치밀었다.
크루엘의 몸이 천장까지 닿을 만큼 커졌다. 붉게 끓어오르는 몸은 지옥의 강물을 연상시켰다.
“무슨 짓거리냐! 삼백 년 만에 돌아오신 폐하다! 폐하께서 위해라도 당하시면 네가 책임질 수 있나!”
“크루엘, 폐하께서는 ‘날 믿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군대는 동원하지 않겠다, 명령이다’라고도 하셨고요.”
베요네타가 눈을 내리깔고 차를 들었다.
“그렇다면 저희는 폐하의 명령을 지키며…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어처구니없는 망언이군. 반박할 가치도 못 느끼겠다. 당장 폐하가 어디 가셨는지 말해. 베요네타, 넌 알고 있겠지?”
베요네타의 벌레들은 지금 눈을 대신해 빈이를 납치한 자들을 쫓고 있다.
당연히 이현에게도 벌레들이 붙었을 것이다. 베요네타가 끄덕였다.
“물론 전 폐하의 위치를 압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알려줄 순 없군요.”
“왜지?”
차를 한 모금 마신 베요네타가 찻잔을 우아하게 내려놓고는 말했다.
“제가 알려주면 당신은 곧장 폐하를 찾으러 가겠죠. 그건 폐하의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잠시 그녀를 쏘아보던 크루엘의 몸이 파랗게 돌아왔다.
“지금 넌 전처럼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고 있어.”
이현이 키르단을 떠난 후… 크루엘은 제국을 지키고, 더욱 발전시키고자 노력했다.
새로운 방어 마법을 개발하고, 여러 신문물을 도입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이 마찰을 일으킨 것이 바로 베요네타였다.
-지금 당신은 폐하께서 남기신 제국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네 말은 제국이 그대로 썩어가도록 내버려 두자는 뜻이다!
다툼은 항상 그런 말들로 귀결됐다.
크루엘이 보기에 베요네타의 충성은 방임이자 무책임이었다.
고인물은 썩기 마련.
더욱이 나라란 하나의 생명과도 같아… 설령 손대지 않더라도 스스로 약동하며 변화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를 그대로 보전하자는 말은 무관심보다 나쁘다.
베요네타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자신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크루엘은 도저히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비록 그녀가 돌아온 폐하를 따라 여러 공을 세웠으나… 감정은 응어리로 남았다.
그 응어리가 또다시 눈앞에서 나타난 일관된 행동에 폭발했다.
크루엘은 싸늘하게 말했다.
“내게 네 행동은 다르게 해석되는군. 너, 황좌를 원하는 거 아니냐?”
여유롭던 베요네타의 얼굴에 금이 갔다.
부부부…….
그녀의 머리카락과 망토가 수많은 벌레로 갈라졌다가 합쳐지기를 반복했다.
“말을 가리시지요.”
터엉!
그때 아시스의 창이 바닥을 찍었다. 괘종 같은 영롱한 공명음이 울렸다.
“자자, 두 분. 그만하지요. 우리끼리 해석의 문제로 싸우라고 폐하께서 명령을 내리신 건 아닐 텐데요?”
크루엘이 홱 몸을 돌렸다.
“그래, 나도 소모뿐인 말다툼으로 낭비할 시간은 없다.”
그의 앞을 아시스의 할버드가 가로막았다. 붉게 물든 물방울이 아시스를 향해 데굴, 굴렀다.
“실망이군. 너도 베요네타에게 동의하는 거였냐?”
크루엘의 몸이 부글부글 끓었다.
진즉에 눈치채야 했다.
아시스가 완전무장을 하고 이 방에 있는 이유.
다름 아닌 크루엘을 막기 위해서였다.
네 기사단의 힘은 아낙톤을 제외하면 서로 비등한 수준.
그러나 각자 전문 분야가 있으며… 아시스의 힘은 방어와 차단에 치중되어 있다. 그의 힘이라면 크루엘이 이 방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능하다.
아마도 전권을 위임받은 베요네타가 크루엘의 행동을 막기 위해 일부러 부른 것일 터.
이 방에 들어온 순간 이미 함정에 빠진 것이다.
아시스가 끄덕였다.
“저는 폐하의 명령을 따릅니다. 폐하께서는 저희에게 군대를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최우선이고 절대적인 명령이죠.”
“그 명령 때문에 폐하와 황녀님이 위해를 입으셔도?”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절대적입니다.”
크루엘의 몸이 끓으며 솟구쳤다.
“미쳤군! 둘 다 미친 거야!”
제국을 이끌어야 하는 네 기사단장 중 둘이 미쳤다니!
크루엘은 자리에 없는 아낙톤이 간절해졌다.
그라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베요네타가 조소했다.
“당신이 충성이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겠죠.”
기가 막힐 뿐.
더 말을 섞기도 싫어져 크루엘은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러자 아시스가 창을 내렸다.
“두 분, 우선 진정하시죠. 우리가 싸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두 분 모두… 폐하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도 뜻을 관철할 방법이 있을 텐데요.”
푸근한 미소를 짓는 사자의 얼굴에 두 남녀의 시선이 꽂혔다.
“무슨 뜻이죠?”
“이해가 안 가는군.”
아시스가 손가락을 들었다.
“폐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혼자 가겠다. 니들은 멋대로 기사단 움직이지 마라’.”
“그러셨죠.”
미소가 번갈아 남녀를 바라보았다.
“요컨데… ‘멋대로 기사단을 움직이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 * *
키르단 제국의 수도에서도 번화가의 중심부에 자리를 잡은 술집 황금주정은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 그리고 여행의 추억에 젖은 사람들로 언제나 붐볐다.
하지만 의외로 사건 사고는 잘 일어나지 않았는데, 황금주정의 단골들 중에 종말의 기사단원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제국민들도 인지한 탓이었다.
“그 기사단원들이 말하는 걸 똑똑히 들었다니까.”
아직 환한 대낮임에도, 이미 반쯤 술에 의식이 먹힌 남자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앞의 남자가 훌륭한 친구임을 대변하듯 똑같이 꼬부라진 혀로 말을 받았다.
“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감히 누가 황궁을 뚫고 황녀님을 납치해!”
“그런 겁 없는 놈이 어디 있냐 싶어도 세상은 넓잖아. 듣기로는 말이야, 외부의 괴물이라더군.”
쿵!
맥주잔이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
“괴물이 뭐 하러 갓난아기인 황녀님을 납치하냐고.”
“그건 나도 모르지. 이건 좀 거시기하지만… 잡아먹으려는 게 아닐까?”
“뭐야?! 뭐 그런 미친 괴물이…….”
천장으로 눈이 굴렀다.
“있을 수 있지.”
“있을 수는 있지, 응.”
“아니, 근데 그런 일이 생겼는데 왜 기사단이 움직이지 않나?”
“듣자 하니 폐하께서 ‘너희들이 다치는 걸 원치 않는다’고 말하셨다더군….”
“허어……!”
제국을 몇 번이나 위기에서 구하고도… 수백 년 만에 돌아와 여전히 몸을 던지셨단 말인가……!
그 숭고함에 절로 숙연해졌다.
“네놈 말이 사실이면, 우리 전직 기사단원님들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그렇지? 내가 그 말을 하고 싶었단 말이야.”
건국 황제, 대제 이현의 이야기를 모르면 제국민이 아니다.
하물며 전직 기사단원인 그들에게 이현의 존재는 단순한 신화가 아닌, 자긍심의 일부.
지금 기록으로 남은 황제의 이야기는…….
달을 샌드백으로 삼아 크레이터를 늘렸다던가….
저 차원 어딘가에 존재하는, 세상을 무한히 압축하는 검은 구멍을 쓰레기통으로 쓰고 있다던가…….
삼 단 변신을 한다든가… 뭐 이것저것 황당한 소리들도 많았으나.
일부 제국민들은 과장되고 부풀려졌다고 생각하는 황제의 신화를 그들은 진심으로 믿었다.
두 남자가 잔을 부딪쳤다.
“오늘 당장 가서 입대 신청을 하자고!”
“그래, 그래야겠어! 일단… 한 잔만 더 하고!”
그들의 말을 우연찮게 들은 마구간지기가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마구간에 앉았다.
그는 ‘백 년 전쟁’에도 참가하지 않았고, ‘판데모니움’이나 ‘천상의 탑’과도 싸운 적도 없었다. 황제를 직접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지긋지긋하게 들은 역사와 제국 곳곳에 세워진 거대 동상을 보며 기사로서의 꿈을 키웠고… 지금도 남몰래 검술과 마력을 연마해왔다.
‘황녀님을 내가 구출하면… 기사로서 완벽한 시작이 아닌가?’
“어이, 이봐! 말 맡긴다니까!”
상인의 호위무사가 그에게 버럭 승질을 냈다. 마구간지기가 벌떡 일어났다.
“아이쿠, 죄송합니다! 고삐 이리 주시면 됩니다.”
“나 참… 우린 바쁘단 말이다.”
호위무사가 찬 검을 흘긋 보고 마구간지기가 물었다.
“황궁의 일 때문에 오셨나요?”
“응? 황궁의 일이라니?”
그가 사실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마구간지기의 입이 트였다.
“아니, 글쎄 말이죠. 어떤 미친 괴물이 황궁에 침입해서 황녀님을 납치했다네요. 잡아먹으려고요.”
“뭐야?!”
놀란 호위무사가 황금주정의 2층에서 휴식 중이던 고용주에게 달려갔다.
“주군, 황녀님이 괴물에게 납치됐다는 소식 들으셨습니까?”
“황녀님을?”
“예, 그놈이 황녀님을 잡아먹으려고 한답니다.”
“허어……!”
상인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품에서 그분을 처음 본 날을 잊지 못하네. 우리가 깔려 있던 잔해를 들고… 마치 본인이 구원받은 듯 웃고 계셨지.”
이미 몇 번이나 들은 얘기였으나 호위는 다시금 감명 깊은 듯 끄덕였다.
그 후로 삼백하고도 오십 년…….
상인의 길을 걸으며 남몰래 뒤로는 제단을 세워 부랑아들과 걸인들을 도왔다.
모두 은혜를 갚기 위함이었으나, 부족하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던바.
호위가 두 손을 모으고 끄덕였다.
“칠죄종이 이 나라를 침공했을 때 전 어머니를 잃었죠. 그때 악마들에게 잡아먹힐 뻔한 저를 거두어주신 분이 기사단장 아시스 님이었습니다.”
“대지에 머무는 폐하의 은총에 감사를…….”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군. 자네는 내려가서 페릴과 자나크를 불러주게. 지부들에 도움을 구해야겠어. 미력하나마 폐하의 은혜에 갚아야지!”
호위는 즉시 내려가 동료들에게 주인의 명령을 전파했다.
이유를 들은 동료들은 분개하며 파발용 와이번에 올라탔다.
“그런 일이라면 주군께서 말하지 않더라도 해야지!”
“폐하를 도와 황녀님을 되찾세!”
수도에서 지방으로… 제국 전역에 하나의 불꽃이 번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