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제국의 공주님 (2)
“크크크… 성공이군.”
“후후… 그렇군요.”
두 남녀가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정말 여기로 올까?”
남자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로서는 그녀가 세운 계획이 영 못미더웠던 탓.
그러나 여인은 확신을 지니고 말했다.
“물론입니다. 아이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끌리는 법이니까요.”
“그런가……?”
그때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멀지만… 초인적인 청각으로 집중하고 있던 둘에게 듣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빠. 오디쬬?”
남자는 급히 입을 막고 숨을 참았다. 그 모습에 여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까지는 안 하셔도 될 텐데요.”
“쉿!”
“아빠아!”
도도도도.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발소리가 우뚝 멈췄다.
“…화짤표!”
멈췄던 걸음이 다시 움직였다.
타박타박. 뭐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발소리에 섞였다.
“화짤표다.”
이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익….
불이 꺼진 방에 작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빵?”
그 순간, 방에 불이 들어왔다.
팟!
“오아아아……!”
빈이의 눈이 커졌다. 붉은 눈 가득 담긴 것은 다름 아닌 드레스.
프릴이 달린 것부터 고딕 스타일까지 없는 게 없다. 드레스가 가득 걸린 옷걸이가 뱀처럼 방을 돌고 있는데…….
반대편의 유리장에는 거기에 맞는 장신구와 보석이 한가득.
“호아아아아!”
빈이가 은하수가 담긴 듯 반짝이는 눈으로 드레스들을 보는데…….
파란 드레스를 입고 날개가 달린 요정이 별안간 나타났다.
동화에 빠져든 것 같은 광경.
“빈이, 맞아요?”
빈이가 넋이 나간 얼굴로 끄덕였다.
“네에…….”
요정이 손에 든 별 모양 지팡이를 휘두르며 말했다.
“나는 마법의 파랑 요정이에요.”
마법의 파랑 요정!
그것은 빈이가 보는 동화책에 두 번이나 나오는 존재로… 특별한 마법을 통해 평범한 소녀도 공주로 변신시켜주는 힘을 지녔다.
빈이는 가슴으로 작은 두 손을 모으고 입술을 오므렸다.
“우리 빈이가 아빠 말도 잘 듣고 열심히 노력해서, 빈이를 진짜 공주님으로 만들어주려고 왔어요.”
“딘짜?”
요정이 웃으며 끄덕였다.
“여기 있는 선물은 우리 빈이가 전부 가져도 돼요.”
“오아아!”
잔뜩 흥분했는지 호흡까지 가빠지고 얼굴이 빨개졌다.
“얍.”
요정의 지팡이에서 파랗게 반짝이는 가루가 빈이에게 쏟아졌다. 빈이가 양팔을 벌리고 가루를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노력했다.
그때 뒤에서 이현이 나타났다.
“우리 빈이, 아빠 찾았어?”
“아빠!”
와락 아빠의 다리에 안긴 빈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요정! 죠떠!”
이현이 짐짓 놀란 척하며 빈이를 안았다.
“세상에! 그랬어어?”
물론… 모두 연기로… 이것은 전부 빈이를 위해 이현과 힐데가 준비한 이벤트.
원래는 그냥 전부 갖다주려고 했으나, 어렸을 때 원하는 것을 너무 쉽게 얻는 경험은 별로 좋지 않다는 힐데의 조언 때문에 약간의 이벤트를 첨가한 것이다.
“우리 빈이는 좋겠네!”
“쩌거! 쩌거!”
벌써 입고 싶어서 빈이가 아빠의 바지를 잡아당겼다.
이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뒤로 손짓했다. 시녀들이 스르륵 다가왔다.
“그래, 우리 빈이 옷 입자.”
“빠리! 빠리!”
저러다 입에서 불이라도 뿜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흥분한 상황.
‘드레스가 그렇게 좋나?’
하긴… 여기 준비된 것은 싸구려 원단으로 만든 가짜가 아니라 진짜 드레스다. 하나하나가 장인의 손길이 들어간 100% 수제품.
아기의 눈에도 예뻐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빠! 짠!”
어느새 드레스를 입고 목걸이까지 한 빈이가 몸을 빙글 돌렸다.
“아유, 이뻐! 우리 빈이 엄청 예쁘네! 그거 입을 거야?”
“아니!”
빈이가 다시 옷걸이로 가더니 다른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요거!”
“아유, 이뿌네!”
“…아냐.”
“응?”
거울을 보며 치맛자락을 이리저리 살피던 빈이가 옷걸이로 돌아갔다.
“따른 거.”
“…응?”
그렇게 갈아입은 드레스가 열두 벌이 넘어가자 이현은 뭔가… 심상치 않은 사태가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이현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빈아, 그것도 아주 예쁘고 잘 어울리는데.”
빈이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딴 거.”
빈이가 드레스룸을 나온 것은 그로부터 다섯 시간 뒤였다.
* * *
성인 남자 스무 명이 나란히 누워도 될 듯 커다란 식탁에 음식이 하나씩 쌓였다.
빈이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접시들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현이 가까이에 있던 스테이크를 포크로 쿡 찔렀다.
번쩍이는 은제 포크가 고기를 파고들자 붉은 육즙이 넘친다.
입안 가득 넣고 씹기를 좋아하는 빈이의 특성을 아는 이현이 일부러 고기를 크게 썰어 빈이의 입으로 가져갔다.
썰 때부터 이미 입을 벌리고 있던 빈이가 고기를 앙물었다.
우물우물.
호빵처럼 부푼 하얀 볼이 열심히 고기를 씹는다.
꿀꺽.
고기를 넘긴 빈이가 아빠를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마시쪄!”
“그으래? 다른 것두 먹어볼까?”
“웅!”
지켜보던 힐데와 시녀들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제국 육해공의 모든 진미를 준비한 보람이 있군요.”
생색이 되니 굳이 말하지 않았으나… 이현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밤을 새워 준비한 음식이었다.
공수부터 메뉴의 선정까지 하나하나 신경 쓰지 않은 것이 없다.
야외에 마련된 테이블도 물론 다 음식의 풍미에 맞도록 고안한 것.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식사 시간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되게끔 혼을 다해 신경 썼는데…….
빈이의 웃음으로 그 노력이 보답받는 기분이라, 무척 흡족했다.
“어쩜 황녀님께서는 식사도 저리 예쁘게 하실까요?”
“폐하를 닮아선지 아직 어리신데도 정말 예쁘시네요.”
“웃는 것도 너무 예뻐요~”
힐데가 입술 위로 검지를 들었다.
“황녀님이 아니라 공주님입니다. 공주님께서 계신 자리에서는 조심하세요.”
“아, 넵!”
뭔가 이상하지만… 황녀… 아니, 공주님이 원하신다는데 별수 있나.
시녀들에게 주의를 준 힐데가 빈이에게 다가갔다.
“공주님, 마음에 드세요?”
양손에 야무지게 커다란 고기를 들고 뜯어먹던 빈이가 기름과 양념으로 번들거리는 입으로 환하게 웃었다.
“웅!”
“이런.”
힐데가 냅킨으로 빈이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공주님. 공주님은 식사도 예쁘게 하셔야지요?”
“아, 마따!”
빈이가 허릴 곧추세우고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예의범절의 개념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 빈이로서는 큐튜브로 본 공주님 흉내를 어설프게 겉으로 따라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모습에 힐데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마녀 힐데라고 불리던 저 할멈이!’
이현은 빈이의 매력이 지닌 파괴력에 내심 감탄했다.
“아이구, 우리 공주님 잘하시네요. 입에도 안 묻히고 예쁘게 잘 드셔야 해요?”
“웅! 빈이 안 무텨!”
“대견하셔라.”
머리를 쓰다듬어준 힐데를 이현이 눈짓으로 불렀다.
“힐데. 어제 이야기 말이야.”
“아… ‘끈’ 말씀이시군요?”
영혼의 끈.
힐데는 영혼의 눈을 발동해 이현과 빈이를 보았다. 석양을 실로 자아낸 듯, 옅은 주홍빛의 실이 이현의 가슴에서 빈이의 가슴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예에, 똑똑히 보이네요.”
이현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건 혈육에게만 보이는 거잖아?”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정서적인 교감이 오래되고 깊은 경우에도 생기지요. 부부, 연인의 경우처럼요. 실은 폐하와 아낙톤 님도 옅지만 연결되어 있으셔서 다들…….”
“…그래서 다들 안 믿어줬군.”
이현이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가… 애틋한 시선을 빈이에게 보냈다.
“그래, 빈이가 어쨌건… 날 정말 아버지라고 믿고 의지한단 말이지?”
“아버지나 다름없다는 뜻이지요.”
“그래… 그렇군.”
푸근한 미소가 이현의 얼굴에 번졌다.
그 얼굴을 보던 힐데도 따스하게 웃었다.
“똑같은 줄 알았더니… 달라지셨군요, 폐하.”
“응?”
“전에는 어딘지 공허하고 외로워 보이셨죠. 잘 웃지도 않으셨고요. 심심해 보이신달까…….”
“내가… 그랬나?”
이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먼 곳을 보았다.
그러나 힐데는 똑똑히 기억했다.
-할멈.
-할멈이 아니라 시녀장입니다.
-할멈, 그… 트리타툼이라는 채소말이야. 매운 향신료랑 잘 섞어서 버무리면 맛있을 것 같은데… 좀 구해다 줄 수 있나?
트리타툼은 귀족들이 샐러드를 해 먹는 물기 많은 이파리 채소. 그걸 매운 향신료와 버무린다는 발상이 독특하면서 이상했는데…….
이현이 그 말을 꺼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간에 이현의 방에 불이 켜져 있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엿보니.
-젠장! 김치 맛이 날 줄 알았는데!
땅을 내리치며 탄식하는 이현의 모습을 보게 됐다.
이현은 지구의 음식 맛을 연구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고 몇십 년.
어느 순간부터 이현은 윌슨을 끌어안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일이 잦아졌고…….
정사도 게을리 보았다.
가끔 옥좌에 앉을 때도 그 공허한 표정을 보면 아무도 말 걸 수가 없을 지경.
-폐하. 그냥 한 번 지구 갔다 오시죠?
아낙톤이 총대를 메고 말을 했을 때, 환해지던 얼굴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구에 갔다 와… 딸까지 생긴 지금 이현의 얼굴에서는 반짝거리는 생기가 맴돌았다.
고향의 덕인지, 빈이의 덕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현은 분명 달라졌다.
“폐하께서 행복해지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형니이임!”
따스하던 분위기를 굵은 외침이 산산조각으로 깨트렸다.
힐데의 이마에 힘줄이 돋고.
막 고기를 먹으려던 빈이는 고기를 툭 떨어트리고 울먹거렸다.
“흐, 흐에에…….”
얼른 빈이에게 다른 고기를 쥐여준 이현이 말했다.
“공주님은 의젓해서 안 우는데?”
“우… 아웅.”
빈이가 고기를 물고 훌쩍거렸다.
헐레벌떡 달려온 길가메시가 다시 우렁차게 이현을 불렀다.
“형님!”
“시끄러! 귀청 떨어지겠다!”
쿵! 쿵! 쿵!
땅이 파일 만큼 격한 뜀박질로 다가온 길가메시가 말했다.
“형님! 여자들 좀 말려주시오!”
“응? 뭔… 아.”
힐데와 이현이 눈빛을 교환했다.
길가메시가 웨어울프걸을 스토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현은 일부러 여성들을 모집해 길가메시 결혼 보내기 작전을 펼쳤다.
모집 종족은 모두 웨어울프걸과 비슷한 수인족.
아무나 그를 꼬시면 집과 땅을 주겠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전부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새 길가메시를 따라온 수인족 여성들이 뒤에서 안절부절못하고 바라보았다.
길가메시가 눈썹을 모으고 말했다.
“아니, 밤부터 아침까지 계속 들락거리는데, 아주 귀찮아 죽겠소! 저 여자들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요?”
“보니까 괜찮은데 사귀지 그래?”
길가메시의 눈빛이 돌변했다.
“형님. 이 사나이 길가메시, 여신님을 두고 한눈파는 그런 남자 아니오.”
아주 단호하다.
‘그냥 털 난 여자가 좋은 게 아니었나 보네?’
이상 성욕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생각이 건전하다.
하긴… 의외로 마초들이 순정남이 많다고 하던가.
길가메시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만큼 날 불끈불끈하게 하는 여신이 없소.”
“…….”
역시 위험한 게 아닐까.
힐데가 이현에게 속삭였다.
“다른 여성들을 물색해 보지요.”
“응,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