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제국의 공주님 (1)
“오아아아!”
하늘을 나는 황금배 위에서, 빈이가 눈을 반짝이며 환성을 질렀다.
상아처럼 흰 첨탑과 높은 벽들…….
길조차 햇빛에 진주처럼 반짝인다.
키르단 제국의 황궁은 빈이가 그간 보아온 공주님이 사는 궁전과 비슷했다.
황궁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빨리 내려가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일부러 멀리서부터 오기를 잘했군.’
빈이에게 제국의 구경을 시켜주려고 했던 것인데… 옳은 선택이었다.
이현은 흡족하게 웃고는 운전수에게 손짓을 보냈다.
‘좀 더 한 바퀴 돌아.’
‘네, 폐하.’
마차가 황궁 위를 길게 선회하며 천천히 고도를 낮췄다.
빈이가 아빠를 홱 돌아봤다.
“꽁주님 사라?”
“아니. 우리 빈이가 여기 공주님인데.”
바람에 휘날리는 붉은 머리를 살며시 남겨주자 붉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빈이가?”
이현이 엄지로 자신의 가슴을 쿡 찔렀다.
“응, 아빠가 여기 왕이거든.”
빈이가 황궁을 보았다가… 다시 이현을 보았다. 갑자기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시로!”
“응?”
“아빠 왕 아냐!”
빈이가 내뱉은 말에 이현은 크게 당황했다.
“그럼… 우리 빈이가 공주 못 되는데?”
“시로! 빈이 공주!”
빈이는 공주를 하고 싶지만 아빠가 왕인 건 싫다고?
어리둥절해서 보는 사이 배가 착륙했다.
황궁의 초입.
이현은 빈이를 유모차에 앉히고 걸어갔다.
“어때? 아래에서 보니까 예쁘지?”
“웅!”
길의 양옆에서 은빛 창을 들고 도열해 있던 기사들이 창을 번쩍 들었다.
“황녀님께 경례!”
처척!
갑옷 소리가 매끄럽게 울리며 사열이 이루어졌다. 이현이 머쓱하게 웃었다.
“녀석들, 이런 거 하지 말라니까…….”
놀라지는 않았을까?
슬쩍 유모차 쪽을 보니…….
다행히 빈이는 이것저것 다 신기한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기사들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쪼기! 쪼기!”
유모차에서 통통한 손가락이 쏙 튀어나와 한쪽을 가리켰다.
보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닌 모양.
“그래그래, 가자.”
유모차를 끌고 돌아다니던 이현은 문득 네 개의 석상 앞에서 멈췄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석상들의 면면을 빈이도 알은체했다.
“베요네따!”
손가락이 차례로 석상들을 가리켰다.
“응응.”
“아시스! 크루에!”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갑옷을 입은 해골.
그냥 시체라기에는 생기가 느껴지고, 어쩐지 기품 있는 모습인데…….
“우리 빈이는 본 적 없는 삼촌이네.”
“웅.”
“이 사람은 아낙톤이야.”
“아나토!”
“여행 중이라 언제 올지 모르겠네.”
제국의 네 기사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기사.
그가 지닌 특별한 힘은 판타지 소설 주인공 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오면 든든할 텐데… 뭘 하고 있는 건지…….
‘고향에라도 갔으려나?’
그때 하얀 옷을 중년 여인이 아낙톤의 발치를 뚫고 나타났다. 반투명한 채 하늘거리는 몸이 마치 유령 같았다.
외알 안경 너머로 강직한 눈이 이현을 향했다.
“황제 폐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실 시녀장… 힐데!
일부러 기척을 숨기고 피했었는데…….
오늘은 그만 깜빡했다!
이현이 눈을 피했다.
“어… 어, 어어! 반가워~”
“몇 번 찾아오셨다고 들었는데, 묘하게도 제게는 소식이 없으시더군요. 마치 일부러 피하시는 것처럼.”
“그럴 리가. 내가 힐데를 왜 피하겠어.”
안경 너머로 주름진 눈이 웃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살갑게 보이겠으나… 이현에게는 마녀의 웃음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요. 물론 제 착각이겠죠. 그래서 말입니다만…….”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수십의 유령이 나타났다.
품에는 얼굴이 가려 안 보일 만큼의 서류 더미를 든 채.
이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떠나시기 전 결제받지 못한 서류와 떠나신 후, 최종 권한 위임이 미처 되지 않아 통과 못 된 사안들입니다. 오신 김에 하고 가시죠.”
“크흠.”
헛기침한 이현이 유모차를 굳건히 잡고 말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난 지금 황녀와 산책이라는 중대한 업무를 수행 중이라 말이야.”
힐데가 종종걸음으로 빈이에게 다가갔다.
“황녀님.”
빈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빈이, 꽁쥬!”
“어머나, 그러셨군요. 빈이 공주님. 저는 폐하를 모시는 시녀장 힐데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아이를 다루는 데 아주 능숙하다.
“아앙.”
“아버지가 바쁘신데, 이 할미와 같이 산책하지 않으실래요? 여기 아이스크림도 있답니다.”
딸기맛 아이스크림 콘이 그녀의 손에 나타났다.
빈이가 딸기맛 아이스크림에 환장하는 걸 어떻게 알고!
경악한 이현에게 힐데가 싸늘한 조소를 보냈다.
방금 전 나타난 타이밍도 그렇고, 누군가… 배신한 것이 분명하다.
이현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빈이는 딸기 아이스크림에 넋이 나갔다.
손이 자석에 이끌린 듯 딸기 아이스크림을 잡고는 이현을 돌아보았다.
“아빠, 안뇽.”
아빠보다… 딸기 아이스크림이 더 좋니?
유치한 서운함이 폭발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힐데에게서 도망치더라도 언젠가 잡힐 것이다.
어차피 당분간 머물러야 하고…….
완전히 외통수였다.
“우리 빈이… 아빠 금방 올 테니까 울지 말고 있어야 한다?”
“앙!”
빈이는 열심히 아이스크림을 핥고 있었다.
지금 한 말… 듣기는 했을까?
* * *
사락…….
이현은 도장을 찍고 종이를 넘겼다.
책상에 쌓여 있던 서류가 이제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때 서류 뭉치가 옆에 다시 놓였다.
“여기 있습니다.”
“…….”
제지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종이가 지구에 있는 책들의 표지만큼 두껍다지만… 그걸 감안해도 좀 많다…….
너무 많다…….
“하아…….”
다시 펜촉을 잉크에 적시는데… 힐데가 따스한 코코아를 함께 내려놓았다.
“이거 좋아하셨죠?”
“응? 아아… 기억하고 있었어?”
이거는 좀… 감동이다. 몇백 년이나 지난 일인데.
힐데가 싱긋 웃었다.
“폐하께서 코코아 타 달라고 하고 도망가신 게 몇 번인지 셀 수를 있어야지요.”
“…미, 미안.”
나라를 운영할 재목은 아니었던 걸로 치자…….
아니,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힐데의 커트라인이 지나치게 높았을 뿐이다.
이현이 자신을 위로하는데 힐데가 고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폐하께서 돌아오셔서 이 노구는 정말로 기쁩니다.”
“…뭐 조롱 같은 거 아니지?”
외알 안경이 번쩍 빛났다.
“크, 크흠! 농담이야. 나도 할멈 봐서 좋아.”
제국 초창기부터 함께 한 몇 안 되는 가신.
힐데에게는 잔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그래서 더 정이 쌓였다. 미운 정 고운 정이라나.
“황녀님께서 무척 예쁘시더군요.”
이현의 입이 무릎반사처럼 헤벌쭉 벌어졌다.
“그치? 우리 빈이 아주 예쁘지?”
말을 하고 나니 약간 걱정이 들었다. 힐데는 타고난 원칙주의자… 빈이의 혈통을 문제 삼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근데 괜찮나? 빈이… 정식으로 피가 이어진 건 아닌데.”
“그런 말은 황궁 내에서는 하지 마시지요. 낮말은 쥐가 듣고 밤말은 새가 듣는다고 말하셨지 않습니까?”
“반대인데.”
“예?”
“쥐랑 새 반대야.”
힐데의 귀에 은은한 홍조가 떠올랐다.
“여기서는 쥐든 새든 밤낮 가리지 않고 활동하니까요.”
이현은 피식 웃었다.
“괜찮다는 뜻이지?”
“괜찮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 폐하께서 밤이 낮이라 하시면 밤은 낮이 되는 것이지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다만… 황녀님께서 ‘황녀님’이라 불리기 싫으신 모양입니다.”
“응? 아…….”
지구에서 틈만 나면 본 동화의 영향으로 빈이는 공주님에 푹 빠져 있었다. 황녀보다 공주가 더 좋은 거라고 굳게 믿는 것이다.
힐데가 나긋나긋하게 물었다.
“그래서 일단 황녀님께서 머무시는 동안에는 ‘공주님’이라고 부르려고 합니다만, 괜찮으신지요?”
“어어, 좋네.”
그렇지 않아도 부탁하려고 했던 일. 역시 힐데다웠다.
“근데 궁에 드레스는 있나?”
우리 빈이… 공주님 드레스 입혀줘야 하는데.
“물론, 속성과 성별, 종족, 나이에 따라 다양하게 마련해놓았습니다.”
외알을 빛내며 하는 말을 들으니 좀 무서워진다.
이 정도면 준비성이 철저한 게 아니라 편집증 아닌가?
“아니… 그렇게까지 해놓을 필요 있어? 나 인간인데?”
“폐하께서 어느 종족의 어느 여식과 어떤 자식을 낳으실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언젠가 돌아오실 그날을 위해 되는 대로 준비해봤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이니 인간이 당연하잖아.”
종족 정체성이 흐려지려고 하니 이현도 황당했다. 그러나 듣는 힐데도 황당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느 인간이 하늘을 날고 별을 부순답니까?”
“내가.”
“공주님께서는 실제로 인간이 아니시잖아요?”
사실을 지적당하니 할 말이 없다.
“그런데… 공주님께서는 어느 종족이십니까?”
“레비아탄. 들어본 적 있나?”
힐데는 이것저것 아는 게 많으니 혹시 알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에 물었는데…….
“아니요. 처음 듣는군요. 외양을 보면 리저드맨의 아종 같은데… 그쪽 아이들이 잘 알지 않을까요?”
“으음… 글쎄. 아마 아닐걸.”
빈이는 특별하다.
아빠로서 특별하게 생각한다… 뭐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특별한 종족이다.
“어쨌건 폐하의 따님임이 확실한 이상, 누구도 문제 삼지 않겠지요.”
“응? 그, 그런가?”
사실… 이현은 별로 자신이 없었다.
물론 열심히, 최선을 다해 키우고는 있으나… 커가며 아이가 출생에 대해 묻거나 하면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아직 판단이 안 섰다.
우연찮게 붉은 눈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더 커서 이목구비가 완전히 달라지기라도 하면 다들 수군거릴 테고… 그 소리를 빈이도 들을 텐데…….
“일단 영혼의 끈이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까?”
“엉?”
힐데와 같은 ‘엘리멘탈’ 종족은 세상을 두 개의 눈으로 본다.
하나는 평범한 물리적 눈과, 다른 하나는 영혼을 보는 영혼의 눈.
영혼의 눈은 말 그대로 생명의 영혼을 보는 눈인데…….
그 눈으로 보면 부모 자식간에 연결된 영혼의 끈이 보인다고 했다.
“빈이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고?”
그 끈은 실제로 혈연이 아니면 보이지 않을 텐데…….
그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슬리퍼를 질질 끄는 소리가 났다.
“아빠앙…….”
빈이가 눈을 비비며 오는데… 프릴이 달린 핑크색 잠옷을 입고, 양손에는 커다란 하얀색 인형을 들었다.
귀엽다!
방에서 여기까지는 거리가 꽤 됐을 텐데 어떻게 왔을까.
그 대답이 뒤에서 나타났다.
기사 한 명이 나온 것이다.
“송구합니다, 폐하. 황녀님께서 꼭 폐하를 뵈어야 한다기에…….”
아장아장 걸어온 빈이가 졸린 눈으로 양팔을 들었다.
이현이 얼른 다가가 빈이를 안았다.
“아바아. 가치 자…….”
아무래도… 새로운 환경이기도 해서 혼자 자기가 무서웠던 듯하다.
“일단 내일 얘기하자. 서류도 내일 마무리할게.”
힐데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공주님 명령이니 놓아드려야지요.”
“고마워.”
복도로 나오자 빈이가 꼬물거리며 말했다.
“침대 커.”
“아유, 침대가 너무 커서 무서웠쬬요?”
하긴 그동안 너무 작은 침대를 썼다. 이제 아예 지구의 집도 퀸 사이즈로 침대를 바꾸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원준의 집에 있던 침대가 아주 좋다고 들었는데…….
“우웅.”
대답을 하는가 싶더니 금방 고개가 툭 떨어진다. 이현은 함께 떨어지려는 인형을 재빨리 붙잡았다.
새근새근.
품에서 자는 아이의 온기가 사랑스러웠다.
이현은 빈이가 깨지 않게 조심히 침대에 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