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미녀와 야수
남우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았다.
평소와 옷차림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비싼 헤어샵에 가서 만든 포마드.
깨끗하게 다린 옷.
여동생에게 추천받은 향수까지 뿌린 상황.
흔히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라고 하던가!
남우로서는 최선을 다해 단장한 상태였다.
띵!
영롱한 소리가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거울을 본 후, 남우는 긴장한 얼굴로 초인종을 울렸다.
약간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누구냐.
뒤이어 남자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좀 살갑게 하자.
-누구시죠?
남우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말했다.
“저 남우입니다.”
기이잉.
도어락이 열렸다.
‘와.’
문 안쪽에서 나타난 하얀 얼굴. 스모키 화장과 보랏빛 립이 잘 어울리는… 강인하면서 요염한 인상의 여성.
베요네타.
남우는 저도 모르게 감탄해 입을 벌리고 멍하니 쳐다봤다.
준비한 말이 많은데… 막상 그녀의 얼굴을 보니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입이 안 떨어졌다.
“아, 남우 씨군요.”
베요네타가 스스럼없이 그를 불렀다.
남우 덕에 빈이의 마음에 드는 선물을 준비한 이후, 베요네타는 그에게 꽤 다정해졌다.
그때 사실은 어느 정도 호감을 산 것이 아닐까!
감성이 외치는 희망 가득한 부르짖음을 남우는 이성의 뺨따귀를 휘갈겨 정신을 차렸다.
“어, 저. 안녕하세요.”
“아~ 커피 사오셨구나. 이리 주세요.”
“아, 예. 그리고… 베요네타 씨는 레몬에이드입니다.”
베요네타가 깜짝 놀랐다.
“어, 제가 레몬에이드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고?”
“전에 수영장에서 드시는 거 봐서요.”
“관찰력이 좋으시군요.”
칭찬에 두근, 마음이 요동쳤다.
‘좋아. 또 호감을 샀어! 적어도 +3점… 아니, 5점은 되지 않을까!’
기준이 뭔지 알 수 없는 점수를 마음속으로 외치며 남우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거실에 누워 TV를 보던 이현이 그를 보고 반색했다.
“오! 카페모카!”
“아니… 형님, 최소한 제 이름부터 불러주시죠.”
그러거나 말거나 카페모카를 받은 이현이 빨대를 물고 쪽 길게 빨았다.
“크큭, 이 맛이야. 이 시커먼 맛.”
시커먼 맛이란 대체 뭘까.
사악하게 들리는 웃음을 짓던 이현이 뒤늦게 남우와 눈을 마주쳤다.
“그런데 넌 웬일? 요즘 자주 온다?”
“아, 그게…….”
“엇. 너 혹시…….”
두근!
남우는 베요네타의 눈치를 살폈다. 소파에 앉은 그녀가 레몬에이드를 빨다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했다.
이현이 씩 웃었다.
“우리 빈이한테 요새 둥실둥실 안 해줬더니 심심했냐?”
“…….”
“훗.”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은 이현이 남우의 어깨를 짚었다.
“어쩌냐. 이제 우리 빈이가… 그런 거 할 나이가 아니라서 말이야. 뭐… 둥실둥실이 좋았던 거지 딱히 네가 나보다 더 좋고, 그런 건 아니었던 거지.”
그런 거 신경 쓰고 계셨구나… 그랬구나…….
이 와중에 어처구니가 없어 짜게 식은 표정을 이현이 뭐라고 오해했는지 다시 어깨를 두드렸다.
“뭐, 종종 와라. 내가 너 신경 써달라고 빈이에게 부탁 정도는 해주마.”
“아… 예에…….”
남우는 슬며시 베요네타의 옆에 앉았다. 그것만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두근두근두근!
이야깃거리며 유머를 잔뜩 외웠는데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귀만 뜨거웠다. 그 열기에 생각이 다 증발하는 듯했다.
일단 이현을 거쳐서 베요네타에게 자연스레 말을 걸어볼까.
“형…….”
“형님!”
갑자기 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길가메시가 시뻘게진 얼굴로 나왔다.
“형님의 조언대로 했는데 실패했잖소!”
“엉? 조언이라니, 뭐?”
길가메시가 핸드폰을 쑥 내밀었다. 호기심에 베요네타와 남우도 고개를 쭉 빼고 보았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글자까지 보이지 않겠지만 둘 모두 보통 이상이라 내용이 훤히 보였다.
[길가메시]
안녕하시오.
[나의 여신]
아, 예. 무슨 일이시죠?
[길가메시]
배고프면 밥이나 한 끼 먹죠.
[나의 여신]
밥 먹어서요.
[길가메시]
그럼 커피는 어떻소.
[나의 여신]
커피 싫어해서요.
[길가메시]
디저트는 어떻소?
[나의 여신]
다이어트 중이에요.
이현이 핸드폰을 닫고 물었다.
“너 혹시 얘 앞에서 똥 지렸니?”
그 정도가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는 거부반응이기는 했다. 이 정도면 ‘길가메시 알러지’가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럴 리가 있소! 아무리 그래도 이 몸이 항문 관리가 얼마나 철저한데!”
“평소에 뭐 잘했다며? 근데 반응이 왜 이래?”
최근에 얼굴도 익히고 인사도 나누며 좋았다고 해서 잘 돼간다는 말을 남우도 들었던바.
그런데 이 끔찍한 반응은 다 뭐냐.
길가메시가 커다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걸 모르겠으니 묻는 것 아니오.”
“뭐 어쨌는데? 자세히 좀 말해 봐.”
길가메시가 길게 늘어진 옆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형님 말대로 자주 만나서 얘기하려고… 협회 놈들 협박해서 스케줄 알아낸 다음 가는 곳마다 쫓아다녔소. 집 앞에서도 기다리고… 화장실 앞에서도 기다리고…….”
그건… 스토킹이잖아…….
이현과 남우와 베요네타가 동시에 이마를 짚고 탄식했다.
길가메시가 셋을 보고 놀랐다.
“뭔 주문 같은 거요?”
“…아냐, 됐다. 야, 잘 들어.”
이현은… 스스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인기남.
그의 조언이라면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남우의 엉덩이가 슬쩍 앞으로 빠졌다.
“당분간 걔 반경 백 미터 접근 금지.”
말을 한 이현이 정정했다.
“아니, 아예 걔 눈에 띄지 마.”
핵폭탄을 맞은 길가메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래선 사귈 수가 없잖소?”
“사귀지 마. 사귈 생각하지 마. 우연히 마주쳐도 인사만 해.”
팔짱을 끼고 듣던 길가메시가 마지못해 물었다.
“…역시 나한테 뭔가 화가 난 거요?”
“응.”
“내가 뭘 잘못했소?”
진지하게 경청하며 잘못을 묻는다는 것은, 적어도 길가메시가 진짜로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인 듯했다.
“예를 들면… 아, 그렇지. 너 나랑 어디 갔을 때 사람들 구해줬더니 거기 인간들이 족장하라며 쫓아다닌 적 있잖아.”
“자는 데 웬 여자가 기어들어 와서 죽일 뻔했지.”
“네가 한 게 그거야.”
끄덕이던 길가메시가 움찔했다.
“…내가 그랬다고?”
“응, 싫을 만하지?”
“그, 그 정도는 아니었소! 그리고 그 여자는 싫다고 안 했단 말이오!”
“여자들은 원래 싫다고 잘 안 해.”
듣고 있던 남우가 괜히 베요네타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튼… 먼저 도움 요청하거나 위급상황에 도와주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마.”
그때 이현의 옆으로 게이트가 열렸다. 푸르딩딩한 점액이 쑤욱 튀어나왔다.
언제 봐도 기괴한 모습이다.
“폐하. 준비됐습니다.”
“어, 그래? 오케이.”
이현이 가슴을 쓱쓱 문지르며 게이트에 들어가다가… 다시 한번 돌아보고 신신당부했다.
“하지 마. 알았지?”
“…알았소.”
* * *
“하아… 그놈, 걱정이란 말이야.”
크루엘의 연구실에 도착한 이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길가메시는 문명인과는 거리가 매우 먼 야만인이다. 기본적인 상식부터가 다르달까.
화가 나면 대가리를 깨면 되지 왜 봐주냐는 식이다.
아마 웨어울프걸이 마음을 돌려 말하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하겠지.
“뭐가 말입니까?”
“아냐. 아, 여기 누우면 되나?”
연구실 가운데에 치과 의자 같은 것이 있었다.
“네, 상의 벗고 누워주시면 됩니다.”
크루엘이 도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지구도 얕볼 수 없군요. 폐하의 역린에 상처 입힐 수 있는 놈이 있다니.”
“무적의 절대 방어 같은 건 없지… 원래.”
이현은 강함에 자신이 있었다. 단순히 주관적인 느낌이 아니라 오랜 전투 경험으로 단련된 감이 상대와 자신의 차이를 꽤 명확히 잴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런 감이 없었으면 계란은 쥐는 족족 터트리고 문을 열려다 부숴 먹는 경우도 잦았을 것이다.
그 감으로, 성좌란 족속들과 비교해도 이현은 자신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차이는 무적이라고 자신할 만큼의 큰 차이는 아니었다.
“그럼 어디 자세히 좀 볼까요.”
크루엘이 손을 돋보기처럼 만들어서 이현의 가슴에 박힌 보석을 유심히 보았다.
“손상이 심하네요. 역린에서 ‘힘’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이건 새로 박아야겠는데요?”
그 말을 듣고 이현은 가슴이 서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제국과 진즉에 게이트를 열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큰일이 났을 것이다.
“그래? 여분은?”
“여기 있습니다.”
“힘 좀 써야겠군.”
“네, 뗄 테니까 하나, 둘, 셋 하면 잡아주십시오. 하나… 둘… 셋!”
크루엘의 손이 역린을 떼자마자, 이현이 재빨리 그 부분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치이익!
손바닥과 가슴 사이에서 고기 굽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크…….”
이현이 눈썹을 모으고 신음하는데… 크루엘이 재빨리 보석을 들이댔다.
“다시 낍니다? 하나… 둘… 셋!”
키잉!
한순간 눈이 멀 정도로 밝은 빛이 번쩍 연구실을 비췄다.
슈우우…….
“후우… 후우…….”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 이현이 거칠어진 숨을 연신 내쉬었다.
한 고비를 넘겼다.
크루엘도 손을 연신 털며 말했다.
“그럼 보호 마법도 다시 걸겠습니다.”
“어엉, 부탁한다.”
“그런데 폐하.”
눈치를 살피던 크루엘이 말했다.
“역시… 제국에서 지내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황녀님을 위해서라도 말이죠.”
“…….”
“이번 같은 사태가 벌어지니 더더욱 말입니다. 만약 이게 황녀님 앞에서 깨졌더라면… 큰일 아닙니까?”
이현은 천장을 보며 가슴을 긁적였다.
“황녀님께서는 괜찮으시더라도 폐하께서 아끼는 인간들은 아닐 수도 있고요.”
“그건 그렇지.”
사실 다른 인간들이야 어떻게 수습이 될지 몰라도… 빈이는 다르다.
“일단 그럼 당분간만 제국에서 지낼까.”
“어차피 역린도 안정화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빈이에게도 제국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고 싶었다.
이왕 오는 김에 길가메시도 데려오면, 웨어울프걸에게 찝쩍거릴 가능성도 줄겠지.
늑대인간이 취향이라면 오히려 키르단 제국에 비슷한 모습의 여자가 많은 편이니… 관심을 아예 다른 곳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좋아, 데려올까.”
벌떡 일어난 이현이 다시 게이트를 통과했다.
베요네타에게 뭘 열심히 말하고 있던 남우가 흠칫 놀라더니 입을 꾹 닫았다.
베요네타는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얼굴인데…….
남우는 불장난치다가 걸린 애 같은 표정이다.
‘저놈도 요새 이상하네……?’
왜 주변에 자꾸 이상한 놈들이 늘어나는 것 같지?
걱정하며 이현이 말했다.
“당분간 몇 달 정도 제국에서 지내려고 한다.”
베요네타가 벌떡 일어났다.
“준비하겠습니다.”
남우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는데…….
“아냐, 준비하지 마. 넌 여기 남아. 나 대신 여기를 지킬 사람도 필요하니까. 아시스도 이리 보낼 거야.”
방어에 특화된 아시스와 베요네타라면 충분히 지구를 지켜낼 수 있겠지.
“야, 길가메시. 따라와.”
“…나도 여기 지키겠소!”
지키기는 개뿔…….
이현이 눈을 부라렸다.
“아 빨리 따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