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성장통
-허억, 헉!
얼핏 계단이 보이는 화면이 마구 흔들리며, 남자의 거칠어진 숨소리가 울렸다.
덜컥!
마침내 문을 열고 나온 남자가 주위를 살피는데…….
쐐애액! 퍼엉!
하늘 저편에서 비행기가 반으로 조각나더니 종이처럼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으악!
놀라 몸을 숙인 남자가 또 다시 허겁지겁 달렸다.
-이히히히히!
-캬하하하!
기괴한 웃음이 도시를 울렸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화면. 헐떡이는 숨소리.
이따금 뭐가 터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화면도 함께 뛰어올랐다.
깨진 아스팔트, 유리 파편 등이 도로 중에 나타났다.
카메라가 홱 돌아가자 건물 너머로 폭발과 함께 치솟는 시커먼 연기가 보였다.
정차된 차들 사이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튀어 올랐다.
-젠장!
다가온 그림자가 뭔가를 휘두르는데…….
콰앙!
-으아아!
황급히 피한 듯 카메라가 한 바퀴를 굴렀다. 도로가 깨지며 파편이 튀어올랐다.
-캬악!
-안 돼, 안 돼, 안 돼!
기괴한 웃음을 띤 두 명의 인간이 새카만 검을 카메라에 겨눴다.
그런데 갑자기 북 소리가 울렸다.
두웅!
금색의 파동이 화면을 휩쓸었다. 새카만 검이 녹아내리고… 화면을 위협하던 남자들의 눈에 이성이 돌아왔다.
-어?
-뭐야?
카메라가 뒤로 돌아갔다.
진군하는 군대의 모습이 나타났다.
온갖 마물들로 이루어진… 마왕의 군대.
화면이 멈추고 줌 아웃됐다.
브리핑 룸에 앉은 아나운서가 나왔다.
-본 영상은 ‘1.1 사태’ 당시 우연히 브이로그 중이던 헌터 ‘반 폴라그’의 촬영본 일부입니다. 저희 TBS에서 입수해 최초 공개하는 편집본입니다.
-갑작스러운 멸망급 게이트의 출현에서 또 지구를 구한 것은 마왕의 군대였습니다.
-지구가 또다시 마왕님께 빚을 졌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방송이 올라온 큐튜브 채널에 전 세계의 언어로 댓글이 달렸다.
[이현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은 지구의 은인입니다.]
[전 제 아들을 죽일 뻔했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막았습니다. 매우 감사합니다.]
미국, 중국, 영국… 각 나라에서 수많은 영상이 속속 업로드됐고.
헌터협회에도 인터뷰며 감사 인사 요청이 쇄도해 통신망이 마비될 지경.
그러나 막상 논란의 중심에 선 이현은 딱 한 번 인터뷰에 응한 후 나타나지 않았다.
-어… 난 그냥 할 일 한 거고. 지금은 내가 아니라 희생자들 케어에 집중해야지. 인터뷰는 더 안 했으면 좋겠군.
말투는 가벼웠으나… 그 후 자그마치 300억 원을 기부하며 이현은 빈말이 아니었음을 입증했다.
[이현, 그는 신인가?]
[마왕이 아니라 성왕이라고 불러야 할 듯.]
기부 소식이 알려지며 또다시 찬사가 쏟아졌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긍정적인 반응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들은 살아봐야 존나 쓸모도 없음ㅇㅇ. 이번 사태로 증명됨.]
[ㄹㅇ헌터만 살아서 그냥 헌터 세상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님?]
[마력 없으면 그냥 세뇌돼서 미쳐버리는데 뭐하러 일함?]
[응~ 세뇌되면 그만이야~ ㅋㅋ]
[걍 마력 없음 인권 박탈하는 게 맞음.]
처음에는 작은 커뮤니티의 음지에서 시작된 의견이었으나…….
일부 인간들이 그 의견들을 커뮤니티 등지에 퍼다 나르고, 기자들이 기사화하며 커다란 이슈로 떠올랐다.
* * *
“나쁜 놈들!”
핸드폰을 보던 남우가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뭐 이런 새끼들이 있죠? 지들도 헌터들이랑 형님 덕에 목숨 건진 일반인일 거면서… 아니더라도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싸지르고…….”
“야, 야.”
빈이의 입을 닦아주던 이현이 눈치를 줬다. 남우가 얼른 입을 막았다.
그를 빤히 보던 빈이가 똑같이 입을 막고는 눈으로 웃었다.
이현이 발가락 사이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런 놈 있고 저런 놈 있는 거지. 뭐 그런 걸 일일이 보면서 화를 내냐.”
쓰레기통에 코를 박고 냄새난다고 뭐라 하는 꼴이다.
“그런데 희수네는 괜찮냐?”
“예? 아, 예. 좀 놀라기만 했나 봐요.”
이현은 배 전체에도 마법을 걸었으나, 방에는 더욱 신경을 써서 방어 마법을 걸었다.
희수와 어머니는 마침 방에서 빈이와 놀아주고 있었던 덕에 세뇌에도 걸리지 않고 습격도 당하지 않았다.
사태가 끝나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을 정도였다.
남우는 쓰게 웃으며 앞을 보았다.
인자하게 웃는 일성의 영정사진이 보였다.
그 앞에는 일성의 아들 내외가 서서 조문객들을 받는 중.
준모는 대게잡이 어선에서 엄청나게 고생한다고 들었는데, 의외로 전보다는 살이 찐 모습이고.
반면 아내는 살이 홀쭉하니 빠졌다.
두 아들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불안하게 부모의 눈치를 살피는 중.
다행히 둘 다 이번 사태에서 죽지는 않은 모양.
일성의 말대로 악운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할아버지께서… 보고 계실까요?”
“응, 4K HD로 본다던데.”
최근 저승에도 적극적으로 신문물이 도입되고 있어…….
저승에도 PC방과 TV를 보는 대합실 등이 생겼다. 이용할 수 있는 자는 유도교를 건넌 선인들뿐이나… 일성 내외에게는 상관없는 일.
애초에 선인이기도 했고, 일성은 이현의 가족과 같은 사람이라는 소문이 염라의 귀에 들어가 마더 테레사와 거의 동급의 대우를 받는 중이었다.
본인의 장례식도 호텔에 배치된 TV로 보신다는 말을 들은 상황.
그래서 굳이 준모 내외까지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남우는 분위기 환기를 시키려는 농담인가 싶어 웃으며 이현을 보았다.
“하하하, 그러셨으면 좋겠네요.”
“그러신다니까?”
“그러신다고요?”
“응.”
“…그걸 어떻게 아세요?”
“가서 직접 봤으니까.”
“저승에요?”
“어허, 목소리 낮춰. 비밀이래.”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는 명확해야 하는 법이라나.
하긴, 저승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 죽어서 그냥 리셋하겠다는 인간이 차고 넘칠 것이다.
저승의 입장에서도 좋지 않고 이승은 더더욱 좋지 않을 터.
남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형님도 죽으셨었어요?”
“내가 왜 죽어? 그냥 궁금해서 갔다 온 거지.”
“저승을요?”
“그렇다니까. 왜? 너도 궁금해? 나중에 한번 갈래?”
어차피 영원히 저승에 머물 수는 없고… 일성도 춘화도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모양.
저승사자가 되거나 공무원이 되는 등 일자리를 구해서 저승의 정식 시민이 될 수도 있다는 듯한데, 일성은 굳이 그럴 생각까지는 없어 보였다.
남우가 빠르게 손사래를 쳤다.
“아, 아뇨! 전 괜찮습니다! 길이라도 잃으면 큰일일 것 같아서.”
“하긴 좀 복잡하더라.”
염라는 그 꼰대 기질을 아직 못 버렸는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출입 통제 구역을 수두룩하게 만들어 놓았다.
가운데 계단은 못 이용한다거나, 엘리베이터는 몇 급부터 이용 가능하다던가…….
이게 영혼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돼서 그냥 직선으로 걸어가면 될 길을 이리저리 돌아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우가 그 가운데에서 길이라도 잃으면… 그냥 미아가 아니라 죽는 것이 된다.
무서울 만했다.
빈이가 갸웃했다.
“할아버지, 오디?”
순진무구한 물음에 남우도 이현도 순간 말이 막혔다.
“오디 가써?”
수많은 경험을 한 이현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정말 뇌가 하얘졌다.
일성은 빈이가 태어나자마자 본 사람.
이현이 어디 갈 때마다 밥도 먹여주고 기저귀도 갈아주며 성심껏 돌보아준… 가족이다.
빈이에게는 가족의 첫 죽음인 것이다.
아직 죽음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빈이에게 무엇보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장례식장에 와서 밥을 먹이는 순간까지 계속 생각했지만, 말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다.’
처음으로 그런 마음이 들었다.
아니… 아까부터 그런 마음이 들었기에 무의식적으로 말을 돌리고 있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이현은 빈이를 똑바로 앉히고 마주 보며 입을 뗐다.
“빈아. 할아버지는 잠깐 여행을 가셨어.”
“여행?”
“응, 저 달에.”
“오아아.”
빈이가 양볼에 손을 대고 놀라다가 이현의 팔을 잡아당겼다.
“나두, 갈래.”
이현은 쓰게 웃고는 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은 못 가요. 달에는 무서운 사람들이 살거든. 저 질병대마왕만큼 무서워.”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는 어른이라 괜찮아.”
“언뎨 와?”
“우리 빈이가 밥 2000번 먹을 쯤?”
2000번은 빈이가 아는 가장 큰 숫자였다. 빈이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우웅…….”
작은 머리가 시무룩하게 앞으로 기울었다.
빈이가 홱 고개를 들었다.
“빈이두 어른!”
어른이 되면 달에 가서 할아버지를 만나겠다.
얼마나 대견한 말인지…….
이현은 푸근하게 웃으며 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우리 빈이… 어른 되면, 달에 할아버지 만나러 가자!”
“웅!”
“어른 되려면 이거 잘 먹어야 하는데.”
이현은 빈이가 남긴 육개장 나물을 젓가락으로 슬쩍 들었다. 빈이가 울상을 짓고는 이현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눈망울이 고양이 같다.
“안 먹우면 안 대?”
그럴까? 먹지 말까?
저도 모르게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이현이 꾹 눌러 담았다.
요즘… 우리 빈이가 좀 영악해진 것 같다….
* * *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패배했소.”
눈밭 위로 주사위가 데구르르 굴렀다. 표면에 박힌 눈알이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여기에 그의 생존을 모르는 머저리가 있나?”
대낫의 자루를 뼈만 남은 손이 쓰다듬었다.
“클클클… 생이란 언제나 숭고한 법.”
“바롱 삼디에 이어 데우스 엑스 마키나까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회복에는 구십구 년이 걸릴 테니, 우리 카오스에 크나큰 손해요.”
“레비아탄을 내버려 둘 수도 없지.”
“해야겠군.”
붉은 옷 위로 하얀 수염을 늘어트린 풍채 좋은 노인이 웃었다.
“허허허, 승산은 있겠소?”
주사위의 눈알 여섯 개가 노인을 향했다.
“놈의 약점을 알아냈으니 찌르면 쉬운 일이지.”
“약점?”
헌터들이 스킬을 볼 때와 비슷한 반투명한 화면이 허공에 떠올랐다.
옷이 찢어진 이현의 모습이 비쳤다.
그의 가슴에 붙은 마름모꼴의 검은 보석으로 화면이 확대됐다. 보석에는 금이 가 있었다.
“이게 깨지니 당황하더군.”
“전에 바롱 삼디와의 전투에서도 이 부분을 보호하려는 모습이 보였지.”
“허나 약점을 누가 찌르겠소?”
약점을 찌른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싸운다는 의미.
이현의 강함을 확인한 후다. 그와 직접 싸우는 위험을 무릅쓰고 싶은 성좌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 일곱 성좌 전부가 나선다면, 쉽지.”
“클클클… 협공은 전쟁으로 번질 거다… 올림푸스… 아스가르드… 모두 참전하겠지. 클클…….”
그때 화면에 녹색 글자들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다.
“호오, 벌써 활동할 수 있나? 본체가 당한 것이었을 텐데?”
글자가 희미하게 깜빡거렸다.
-‘나’는 정보. 무한한 복제 시스템의 일부. 본체란 개념은 없다.
“…징그러운 녀석.”
-징그럽다? 이해 못 하겠군. 성좌가 되어서도 한 육체에 집착하는 너희들이야말로 이해 불가.
“닥치고 얘기나 하지.”
화면에서 글자가 사라지고 게이트가 나타났다.
-마왕의 나라로 가는 좌표를 알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