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Video killed Radio star (3)
러시아의 S급 헌터, 아나톨리 보르야코프는 나름대로 치열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했다.
패배도 겪었고 눈앞에서 사람이 괴물에게 밟혀 죽는 끔찍한 광경도 목격했다.
그래서 알았다.
이놈은, 마왕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크윽! 저리 가!”
아나톨리는 이현의 몸을 걷어차 떨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 순간 이현이 그의 무릎을 부쉈다.
콰득!
“크아압! 제, 제길!”
아나톨리의 몸이 도시로 곤두박질쳤다.
콰앙!
흙먼지를 피어오른다. 이현이 천천히 내려서는데… 깨진 도로에서 튀어나온 전선들이 아나톨리의 몸을 오징어가 사냥하듯 끌어당기는 것이 보였다.
“오호.”
터엉!
도시의 불이 일시에 꺼졌다.
아니… 도시뿐만이 아니다. 지구 전체에서 인공적인 빛이 사라졌다.
드드드드!
땅이 울렸다.
이현은 근처 빌딩에 내려앉아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불쑥불쑥 일어나던 토사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콰앙!
땅에서 돋아난 전선과 철근이 거대한 형체를 이루었다.
빌딩 수십 개를 합쳐놓은 듯 거대한 인간의 형상.
머리 부분만은 거품이 모인 듯 기괴하고 징그러운 형태였다.
초록색으로 빛나는 네 쌍의 눈이 이현을 향했다.
기이잉!
“음?”
네 쌍의 눈에서 별안간 새빨간 레이저가 발사됐다.
콰아아!
고열의 에너지가 충격파를 터트리며 이현이 서 있던 빌딩을 관통했다. 빌딩은 물론 도로까지 단숨에 새카만 구멍이 뚫렸다.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연기를 눈들이 주시하는데… 바로 얼굴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딜 봐.”
어느새 이현이 어깨에 올라타 있었다. 꽉 쥔 주먹을 한껏 뒤로 젖힌 자세.
“날 봐.”
콰앙!
냅다 후려친 주먹에 강철 거인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지평선까지 날려버릴 기세로 때렸건만, 생각보다 손에 오는 감각이 별로다.
‘단단하잖아?’
그냥 강철과 흙으로 이루어진 몸이 아니다. 자세히 보니 그 표면에 무수한 연녹색 글자가 흐르는 중이었다.
끼리릭…….
그런데 몸이 기우는 방향이 심상치가 않다.
반대편은 도시.
“아차.”
내버려 두면 못해도 인구 몇만이 깔려 죽을 기세다. 이현은 재빨리 반대편으로 뛰어넘었다.
그런데 기울던 거인의 몸이 우뚝 멈추더니 가슴에서 붉은빛이 났다.
“엇?”
거인의 가슴이 조리개처럼 열렸다. 안에 보이는 것은 이글거리는 태양 같은 빛.
콰르르르!
거인의 가슴에서 발사된 화염의 격류가 이현을 휩쓸었다.
강대한 열의 폭풍이 구름을 증발시키고 지상까지 붉게 할퀴었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불의 강. 아마겟돈을 연상시키는 광경이었다.
“크흐… 이 자식.”
화염 속에서 양팔로 몸을 감싼 이현이 떨어져 내렸다. 새카만 연기가 그의 신형을 따라 이어졌다.
“옷이 다 탔잖아!”
탄화된 옷을 대충 찢어 던진 이현이 버럭 소리쳤다. 입에서 탄내가 난다.
그런데 그가 착지한 곳이 갈라지더니 전선들이 튀어나와 몸을 옭아맸다.
파지직!
강력한 전류의 급습. 새파란 빛이 번뜩이며 이현의 몸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동시에 거인이 다시 그에게 빔을 발사했다.
순간 전격 속에서 이현의 몸이 별안간 납작해졌다. 2차원 공간으로 회피한 것이다.
전선이 주르륵 미끄러져 땅에 떨어졌다.
다시 3차원으로 돌아온 이현의 발이 땅을 박찼다.
움푹!
크레이터가 생기며 이현의 몸이 단숨에 거인의 머리까지 뛰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주먹으로 패 죽였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도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다.
이현이 양손을 마주 댔다가 천천히 벌렸다.
파즈즈즈…….
손바닥 사이에서 투명하고 날카로운 섬광이 번뜩였다.
거인이 그를 보며 다시 가슴을 내미는데…….
“두 번은 안 되지.”
이현이 손에 쥔 투명한 검을 내리쳤다.
아무 소리도, 충격파도 나지 않았다.
유리판 위로 구슬이 미끄러지는 소리뿐.
이현은 신중히 거인을 응시했다.
쩌억!
별안간, 거인의 몸이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단숨에 반으로 갈라졌다.
깔끔하게 갈라진 단면에서 이현이 휘두른 검과 같은 빛이 일렁거렸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보던 리포터가 입을 쩍 벌렸다.
“마, 맙소사… 신들의 싸움이란 말입니까…?”
구름에 머리가 닿은 강철의 거인.
그 거인을 반으로 가른 이현.
도대체 누가 괴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이현이 헬기를 향해 손짓했다.
“위험하니까 저리 가지?”
동작을 알아듣고 리포터가 얼른 헬기를 물렸다.
이현이 허공을 날아 거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어디 있지?’
힘은 느껴지는데… 이상하게 조용하다.
그때, 별안간 거인의 몸이 어린아이가 발로 찬 레고처럼 무너져 내렸다. 사방이 새카만 잔해로 뒤덮였다.
경험상 이럴 때는 반드시 기습이 온다.
경계하며 몸을 낮춘 순간, 사방에서 빔이 발사됐다.
지잉!
콰아앙!
폭연 속에서 이현이 새카만 연기로 꼬리를 그리며 빠져나왔다.
그 순간 날아온 검이 이현의 가슴을 갈랐다.
쿠웅!
“윽?!”
이현의 등 뒤로 충격파가 뻗어나가 구름을 가르고 방어막에 부딪쳤다. 방어막이 쩍 갈라졌다.
회심의 일격.
쩌적.
이현의 가슴에 박힌 검은 보석에 금이 갔다.
그러나 동시에 이현의 주먹도 아나톨리의 머리를 박살 냈다.
콰앙!
머리가 박살 난 아나톨리의 몸이 축 늘어졌다. 순간 이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얼핏 죽은 것 같지만… 미약한 힘이 아직 느껴졌다.
“어딜.”
홱 뻗은 손이 아나톨리의 등 뒤에서 빠져나가던 푸른 공을 붙잡았다. 녹색 글자에 감싸인 공이 파르르 진동하더니, 수십 가닥의 전선을 이현의 팔뚝에 찔렀다.
“흥.”
발악은.
이현은 코웃음을 치며 팔에 힘을 줬다.
파직!
전선들이 피부에 작은 상처도 주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이게 본체지?”
파란 공에서 눈 모양이 나타나 이현을 바라봤다.
-잠깐. 우리가 아직 합의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것이다.
“지랄.”
우직우직.
이현이 손에 힘을 주는데… 공의 표면에 흐르던 글자들이 불안하게 떨렸다.
-기다려라. 레비아탄에 대해 내가 아는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나의 소멸은 너에게 어떤 이득도 되지 않는다.
“아니.”
콰지직!
공의 표면에 흐르던 글자들이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밟힌 음료수 캔처럼 우그러진 공에서 걸쭉한 푸른색 액체가 흘러내렸다.
화르륵!
불이 타오르며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잔해가 새카만 재만 남았다.
이현은 재를 바람에 날려 보내며 말했다.
“내 기분에는 개이득이야.”
* * *
“어르신… 어르신.”
일성은 고개를 돌렸다.
보석과 진주로 꾸며진 황금 다리. 인자하고 평온한 표정의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다리를 건넜다.
일성을 부른 이는 검은 갓과 도포를 쓴 창백한 얼굴의 남자였다.
“이승에 미련을 남기시면 안 됩니다.”
“아, 예에… 알고 있습니다. 다만… 걱정이 좀 되어서요.”
저승차사가 그를 묵묵히 보았다. 다리를 건널 정도의 선인에게 이 정도는 충분히 유예를 줄 수 있었다.
남우는 다치지 않았을지… 빈이는 또 어떨지…….
“미안해요, 남우군…….”
조금만 더 힘을 냈으면 도움이 됐을 텐데…….
그래도 남우처럼 선량한 사람이면 분명 이 다리로 왔을 것이니… 아직 다리에 안 보이는 것을 보면 죽지는 않았다는 의미.
그러나 가장 걱정되는 것은 이현이었다.
‘나 데려가겠다고 저승 쳐들어오시면 안 되는데…….’
이현이라면 염라대왕의 멱살을 잡고 드잡이를 해 일성을 데려갈 수도 있을 터.
이현이 바보는 아니지만… 가끔 보여주는 허무맹랑한 모습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일성도 목숨이 아쉽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수명이라는 것이 있는 법.
여기만 해도 수많은 사람이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잘된 일이겠죠…….”
그때, 뒤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영감……?”
몇 년이 지났으나… 결코 잊어본 적이 없는 목소리. 꿈결을 헤맬 때면 언제나 보았던 아내, 춘화의 목소리였다.
“여보……?”
두 손을 모으고 곱게 선 아내는 어째선지 처음 반했던, 스물 초반즈음… 젊은 시절의 모습이었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아내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마법처럼 일성의 몸도 함께 젊어졌다.
믿을 수가 없어… 멍하니 보는 일성에게 춘화가 말했다.
“당신, 기다렸어요. 이리 올 줄 알고…….”
춘화도 눈시울이 붉었다.
“여보… 하지만, 오래됐잖아요.”
아내는 첫 게이트 폭발 때 죽었으니… 시간으로 치면 5년이 훌쩍 넘었다.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겠거니 생각했다.
갑자기 아내의 얼굴이 물에 잠겼다. 일성은 팔뚝으로 눈가를 문댔지만… 맑아졌다가도 다시 눈앞이 흐려졌다.
울면 이 마음 여린 사람이 걱정할 텐데.
“기다리는 거 제일 싫다던 사람이…….”
무서워서 혼자 자지도 못하면서, 이 먼 곳에서 홀로 기다리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춘화가 웃었다. 추억처럼, 아니… 추억보다 곱디고운 웃음이었다.
“기다려보니… 그냥저냥 괜찮았어요.”
끝내 일성의 눈에서 회한이 폭발했다.
“당신 못 지켜줘서, 미안했어요…….”
춘화도 5년간 쌓아온 마음이 함께 폭발했다.
“나도 미안해요. 당신이 도망치라 했는데… 무서워서 이 못된 발이 꼼짝도 안 했어요…….”
“그게 어찌 당신 잘못이야… 아이구…….”
일성과 춘화가 서로를 마주 안았다.
그때 일성을 한 남자가 불렀다.
“할아버지!”
다리로 막 한 남자가 올라오는 참. 긴 기럭지로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현 군…?”
“아니, 어찌 산 자가!”
저승사자가 버럭 외치며 나서려는데, 그 어깨를 두꺼운 손이 턱 짚었다.
돌아보니, 사자들 사이에서는 전설이나 다름없는 강림이 서 있었다.
저승사자가 각도기로 재도 완벽히 90도 나올 것처럼 허리를 숙였다.
“2119기 차사 오문 인사드립니다!”
“어. 저 남자, 손님이니 냅둬라.”
“예? 아… 알겠습니다!”
이현이 일성의 옆으로 다가갔다. 춘화가 어리둥절해 그를 바라보았다.
“어머, 이 훤칠한 분은 누구래요?”
일성이 대신 소개했다.
“한집에 사는 이현이라고 해요. 나 챙겨주는 고마운 사람이에요.”
이현이 꾸벅 인사했다.
“이현입니다.”
“아니… 젊은 청년이 벌써 저승에…….”
교통사고로 같이 죽기라도 했나?
안쓰러운 눈빛에 이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일성이 그를 바라봤다.
“나 때문에… 왔어요?”
이현이 춘화와 일성을 번갈아 바라본 후 느리게 끄덕였다.
일성이 춘화의 손을 굳게 잡았다.
이현… 남우… 아끼는 소중한 이들이 많았으나, 그의 미련은 이승이 아닌 저승에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이기적인 선택을 해도 괜찮겠지.
일성이 젊어진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해요. 기껏 왔는데… 돌아가지 못하겠어요.”
이현이 끄덕였다. 그 무표정은 슬픔을 내비쳐 가는 사람의 발목을 붙잡지 않으려는 배려이리라.
“종종 찾아뵙죠.”
농담 같은 말이었으나… 이현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 같았다.
이현의 한계가 의심되지 않았기에 일성도 마주 끄덕였다.
“종종 봐요.”
옆에서 춘화가 어리둥절해서 보았으나…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이제 얼마든지 있을 터.
손을 한 번 흔든 일성이 몸을 돌렸다.
그의 등이 사라질 때까지, 이현은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