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Video killed Radio star (1)
거대한 크루즈의 앞머리가 하바로프스크항에 들어서고 있었다.
로열 가디언엔젤 크루즈.
“부자 새끼들…….”
항구 직원인 니콜라이와 보르초프가 소비에트 연방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 같은 분노 어린 목소리를 냈다.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들어오는 크루즈를 보는데…….
삐로리로!
띠리리리~
부우우웅!
핸드폰 소리가 진동음과 함께 요란하게 여기저기서 터졌다.
“뭐야?”
니콜라이는 전화를 받으려다가 멈칫했다.
갑자기 세상이 녹슬기 시작했다.
“…엇?”
어리둥절해서 눈을 비비는데… 녹슨 세상이 그에게 익숙한 게임 속 세상으로 바뀌었다.
거무튀튀한 벽돌과 지옥 같은 붉은 하늘.
SF와 지옥이 한데 섞인 듯 기묘한 공간이다.
들어오던 배도 게임 속에서나 본 기괴한 형체로 바뀌었다.
“이건……?”
익숙한 BGM이 머릿속에서 절로 울렸다.
두구두구두구두구 두두두두두~ 두구두구두구두~
설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왜일까. 어쩐지 즐겁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어린아이로 돌아간 기분!
니콜라이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초록색 갑옷을 입은 그는 전설의 슬레이어가 되어 있었다. 알 수 없는 힘이 몸에서 솟구쳤다.
난생처음으로 느껴보는 해방감.
헌터가 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실험해보고 싶어졌다.
“흐읍!”
그는 앞에 있는 기둥에 주먹을 휘둘러보았다.
콰앙!
기둥이 산산조각 나며 흩어진다. 부서져야 할 주먹에서는 살짝 아릿한 느낌만 들 뿐이었다.
그때, 그의 눈앞에 뿔이 난 붉은 악마가 나타났다.
현실이었으면 보르초프가 있었을 자리.
“캬아아아!”
“으하하! 게임 시작인가!”
니콜라이는 주먹을 불끈 쥐며 악마에게 달려들었다.
* * *
보르초프는 블랙크래프트 속 용사가 되어 있었다.
세상도, 그의 몸도 도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고전적인 BGM을 듣고 있으니 따분한 의문 따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으로 되돌아온 것 같구만.’
이리저리 검을 휘둘러보는데… 도트로 된 초록색 좀비가 그에게 빠르게 달려들었다.
‘저긴 니콜라이 녀석이 있던 자린데?’
그러고 보니 니콜라이는 어디로 갔을까.
멍하니 생각하는데 좀비가 어울리지 않게 주먹을 휘둘렀다.
쾅!
좀비의 주먹을 막자 몸이 붕 날아 튕겨 나갔다.
꽤나 강렬한 충격인데 아프지 않다.
‘게임 속이니까 당연한가.’
도트로 된 몸이 아프면 그것도 이상하다.
“오랜만에 재미있구만!”
보르초프는 좀비를 향해 힘껏 검을 휘둘렀다.
* * *
“여기가 러시아군요.”
일성이 갑판에서 아래를 보며 웃었다.
음울한 회색빛의 하늘 아래 펼쳐진 항구의 모습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연상시켰다.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육지를 보는 것만으로 즐거워진다.
옆에 선 남우가 끄덕였다.
“바다만 보다가 육지를 보니까 반갑네요.”
크루즈에는 카지노는 물론 여러 놀이 기구가 있었지만…….
밖으로 나가면 보이는 망망대해에 어쩐지 답답하고 두렵기도 했다.
역시 사람은 육지에 사는 동물인 것 같았다.
그때 갑판 위 핸드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삐리리리리.
뽀롱뽀롱.
우우우웅!
동시에 묘한 기운이 일성과 남우를 휩쓸었다.
“윽? 마력?! 할아버지! 이거 게이트 같은데요?”
“예! 남우군!”
언제, 어디서든 무장은 떼어놓지 않는 것이 헌터의 기본 소양.
일성도, 남우도 재빨리 칼을 빼 들고 사방을 경계했다.
“육지에서 열린 걸까요?”
“모르겠어요.”
이상하게도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괴이한 마력이 느껴졌다.
“형님은 걱정 없겠죠?”
“그렇겠죠.”
이현은 뭐… 지구가 멸망해도 살아남을 것 같은 사람이고, 함께 온 헌터들도 하나같이 S급에 강해 보이는 사람들 천지다.
그런데…….
“히히히!”
“으헤헤헤…….”
뭐에 홀린 듯 눈이 하얗게 뒤집힌 선원들이 갑판으로 올라왔다.
바로 그들에게서 마력이 느껴졌다.
“아… 아니…….”
남우도, 일성도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쳐다봤다.
괴물이라면 막거나 처치하겠는데 어째서 보통 사람들이 온단 말인가.
게다가 다들 시커먼 무기를 들고 있었다.
“이야하!”
신난 듯이 달려온 남자가 일성에게 망치를 휘둘렀다.
“으헉!”
일성이 재빨리 뒤로 피하자 망치가 갑판을 내리찍었다.
콰앙!
철로 된 갑판이 움푹 파였다. 달려올 때도 느꼈지만 심상치 않은 힘이다.
이 정도면 C급 헌터 이상의 힘.
“이, 이런!”
남우는 간신히 검을 막아내고 당황했다.
“뭐, 뭐죠? 다들 마력을 각성한 건가요?”
“그런데 왜 우리를 공격하죠?”
“저도 모르겠… 조심하세요!”
남우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는 선원을 밀치고서 일성에게 달려갔다.
그 순간 일성의 가슴에서 새카만 검이 튀어나왔다.
푹!
“헉!”
일성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가슴을 보았다가… 남우를 보았다.
“도, 도망… 쳐요… 남우, 군…….”
검이 뽑히며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할아버지이!!!”
* * *
점심을 먹고 통통해진 빈이의 배를 두드리며 누워 있던 이현이 벌떡 일어났다.
배 전체에 강력한 보호 마법을 걸어, 설령 운석이 떨어지더라도 막을 수 있게 조치했는데.
허락한 적 없는 힘이 선내에서 날뛰고 있었다.
“뭐야, 이건?”
이현의 그림자에서 벌레떼가 솟구쳐 베요네타의 모습을 이루었다.
“폐하. 말씀하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란 놈의 마력과 일치합니다.”
“그래. 그렇기는 한데…….”
근처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힘이 느껴진다.
구경한다며 나간 남우와 일성이 신경 쓰였다.
“베요네타. 넌 여기서 우리 빈이 좀 보고 있어. 난… 잠깐 나갔다 와야겠다.”
“네, 주군!”
이현이 방을 나서자 올림푸스와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아레스가 외쳤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놈이다!”
“…유명한 놈이었어?”
아테나가 날카로운 눈으로 말했다.
“카오스 성단의 주신격 성좌입니다. 힘도 힘이지만 상당히 골치 아픈 능력을 지녔지요.”
“그게 뭔데?”
발을 동동 구르던 헤르메스가 말을 받았다.
“저희도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녀석은 전자기기들을 통해 자신의 힘을 구사할 수 있어요.”
그때, 복도 양쪽에서 실성한 선원들이 걸어 나왔다.
이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자기기를 가진 사람들을 조종한다거나?”
“…그런 것 같네요.”
선원들이 각자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레벨 업!”
“으랴아!”
성단들이 각자 무기를 드는데, 이현이 앞으로 나섰다.
“죽이지는 마.”
“응?”
이현의 몸이 복도에 긴 잔상을 남겼다. 폭풍 같은 충격파가 터지며 달려들던 선원들이 전부 벽에 틀어박혔다.
쿵! 쿵! 쿵!
강철로 된 벽에 몸이 박힐 정도로 얻어맞았으니 당연히 몸 상태가 성할 리가 없다. 팔다리가 기괴하게 꺾인 사람도 보였다.
피를 줄줄 흘리는 사람들을 보고 아레스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물었다.
“죽이지 말라며?”
“안 죽였어. 난 불살주의 히어로거든.”
나름대로 힘 조절을 하긴 한 것이다. 다만 세뇌당했으니 고통도 모르고, 어차피 마력을 지닌 인간들은 평범한 사람보다 회복력이 강할 것을 감안하여 조금 더 강하게 때리기는 했다.
“아무튼 죽이지 마!”
이현은 폭풍처럼 갑판으로 뛰어올랐다.
그가 문을 열고 나온 순간, 남우의 처절한 목소리가 울렸다.
“할아버지! 안 돼애!”
“이런 젠장.”
훌쩍 뛴 이현의 눈에, 쓰러진 일성과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그를 지키는 남우가 보였다.
남우는 세 명의 선원을 상대로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지만 일성도 지켜야 하는 탓에 수세에 몰리는 중이었다.
남우와 선원들 사이에 뛰어든 이현이 힘껏 박수를 쳤다.
짜악!
핵폭발의 후폭풍 같은 충격파가 앞으로 퍼지며 선원들을 날려 보냈다.
뒤를 돌아본 이현은 참혹한 광경에 이를 악물었다.
일성은 자신이 만든 피의 연못에 누워 있었다. 남우가 필사적으로 배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배에 수도꼭지가 뚫린 것처럼 피가 샜다.
이현은 재빨리 무릎을 꿇고 일성의 손을 잡았다.
온화한 표정과는 정반대로 이미 싸늘하게 식은 손.
천 년을 살며 무수히 많은 사람을 떠나보냈다.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이현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익숙해졌다는 말이 감정의 거세를 뜻하지는 않는다.
가시가 잔뜩 난 발톱이 심장을 파고드는 듯 아팠다.
이현은 굳게 일성의 손을 쥐었다가… 살며시 놓았다. 손바닥에 피가 진득하게 묻어나왔다.
피 묻은 손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혀, 형님…….”
남우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이현을 바라봤다.
이현의 얼굴은 무서울 만큼 싸늘했다.
“일단.”
이현이 일어났다.
“할아버지 안쪽으로 모셔놓고, 넌 가서 동생들 챙겨.”
지금은 한탄할 시간이 아니다. 날카롭게 이성을 후비는 목소리에 남우가 정신을 차리고 끄덕였다.
“네, 형님.”
이현의 손이 남우의 어깨를 툭 짚었다. 든든한 온기.
남우는 팔뚝으로 눈가를 문대고는 일성의 시체를 조심스레 들었다.
갑판의 끝에 선 이현이 항구를 보았다.
“꺄아아악!”
“이히히히!”
자신들이 게임 속에 있다고 믿는 인간들이 신이 나서 무기를 휘두르고 날뛴다.
전자기기 근처에 없던 인간들은 세뇌에 걸리지 않았으나… 그것을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가족이, 친구가, 이웃들이 대항할 수 없는 힘으로 그들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쿠르릉!
전신주가 쓰러지며 차를 덮쳤다.
“야호!”
쾅!
항구 곳곳에서 화염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솟구치며 재난 영화처럼 사람들이 뛰어다녔다.
멀쩡한 사람, 실성한 인간이 뒤섞인 참혹한 현장.
크루즈를 향해 수십의 인간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일부는 날개가 달린 듯 날기까지 했다.
“이 새끼…….”
이렇게 화가 난 것은 오랜만이다.
그림 속 자신이 떠올랐다.
‘이래서 내가 예언에서 그렇게 행동했나?’
이현은 손가락을 튕겼다.
“아시스.”
그의 뒤로 게이트가 열리며 사자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육중한 은색 갑옷을 갖춰 입은 아시스가 방패를 어깨에 걸치고 나왔다.
“예, 주군.”
전쟁의 기사단장 아시스.
그 이름답게… 아시스는 이현이 생각하기에 가장 전쟁에 필요한 능력을 지닌 자였다.
“종말 2종 발동. 지금부터 지구 전체를 유효 작전 차원으로 지명하고… ‘미리내’ 발동해.”
묵직한 목소리에 아시스의 눈빛이 굳었다.
“알겠습니다.”
아시스가 방패를 위로 들었다.
“미리내, 발동!”
* * *
우주정거장에서 지구를 보던 우주비행사 중 한 명이 기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응?”
별안간 지구의 한 곳에서 빛이 번쩍였다.
은색의 섬광이 복잡한 도형을 그리며 엄청난 속도로 지구 전체를 감쌌다.
지구 위에 어떤 보이지 않는 존재가 수십 개의 손으로 별자리를 그리는 것 같았다.
완전히 지구를 감싼 다면체의 모양은 굳건한 방어막과도 같았다.
“저, 저게… 대체 뭐야?”
같은 광경을, 우연히 살아남은 인류 대다수가 목격하고 전율했다.
“세, 세상에!”
“신이시여!”
하늘을 감싼 거대한 막.
느끼지 못하는 자들에게도 보이는 강력한 힘의 구현이었다.
종말의 신호탄인가, 아니면 구원의 세레나데인가.
절망과 희망이 한데 섞여 하늘을 올려다보는 가운데…….
전쟁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