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한 초월자는 딸바보-99화 (99/150)

99화. 크리스마스 대란 (4)

거대한 홀의 불빛이 꺼졌다.

유일하게 정면에 위치한 스크린에만 불이 들어왔다.

영화사의 로고가 떠오른 후…….

우아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에메랄드 숲에 한 왕국이 있었습니다.

“오아아…….”

양손을 꼭 모은 빈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화면을 보았다.

꽤 큰 소리였지만 이현과 빈이가 앉은 자리는 방음벽이 감싸고 있어서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았다.

“오아! 오아!”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신이 나서 팔을 흔드는 빈이를 보고 이현은 흐뭇하게 웃었다.

‘TV를 큰 걸 들여놓을까…? 아니, 이왕 할 거 집을 새로 사서 영화관을 따로 설치하는 편이 낫겠군.’

사치에는 관심이 없지만 빈이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꺄아~”

영화가 끝나자 빈이가 두 손으로 박수를 쳤다.

보통은 크레딧이 오르며 영화가 끝나야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기이잉.

스크린이 위로 오르고 뿌연 드라이아이스가 아래로 새어 나왔다.

어쩐지 으스스한 분위기.

스크린이 완전히 오르자 머리에 뿔을 붙인 남우가 삼지창을 들고 나왔다.

‘에메랄드 어드벤처’에 나오는 빌런, 질병 대마왕이었다.

“으하하하! 다 잡아먹겠다!”

그가 실감 나게 사악한 목소리로 연기하고는 무대를 뛰어나올 듯이 굴었다.

“아빠아!”

빈이가 겁에 질린 얼굴로 이현에게 달라붙는데…….

“잠깐!”

약간 떨리는 외침이 남우를 막았다.

스포트라이트가 무대 한쪽으로 집중됐다.

나타난 것은 검은 머리카락을 단아하게 늘어트리고 파란 드레스를 입은 유지애.

프린세스 카리나의 분장을 한 것이다.

“무… 물러가라! 나쁜 악마! 얼음나라 요정들을 풀어줘!”

빈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침 빈이가 입은 것도 프린세스 카리나의 드레스.

손이 이현의 팔을 꽉 잡았다.

“오아아! 아빠! 공듀님! 공듀님!”

그녀가 손을 내밀자 손목에 찬 팔찌가 빛을 내더니 얼음 분말을 남우에게 쏘아냈다.

단순히 3D 효과가 아니라 진짜 얼음이다.

아티팩트가 만들어낸 효과였다.

남우가 과장되게 몸을 움츠렸다가 양팔을 크게 펼쳤다.

“으아아아! 죽을 것 같으냐!”

쿠르릉!벼락 소리가 나며 조명이 어두워졌다. 빈이가 겁에 질려 이현에게 꼬물꼬물 안겼다.

공주가 질까 봐 두려운지 얼굴이 울상이 됐다.

“어림없지!”

그때 하늘에서 하얀 망토를 휘날리며 새로운 공주가 나타났다. 빈이가 양볼에 손을 대고 깜짝 놀랐다.

“렐사!”

…로 분장한 웨어울프걸이 양손을 만화책의 주인공처럼 모았다.

모인 손에서 번개가 번뜩이더니 남우의 발밑으로 쏘아졌다.

“크아악!”

허둥대던 남우가 망토를 펼치더니 몸을 가렸다.

휘릭.

망토가 휘날리며 몸이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오아아!”

“우와~ 공주님이 마왕을 물리쳤네~”

이현의 말에 빈이가 환해진 얼굴로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공듀님! 공듀님!”

흥분해서 얼굴까지 빨개졌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날개를 퍼덕이는 것이, 붙잡고 있지 않으면 공주님을 보겠다고 날아갈 기세다.

하지만 빈이가 날아갈 것도 없이 두 공주가 무대를 내려오더니 빈이에게 다가왔다.

이현은 얼른 빈이를 안고 일어났다.

지애가 이현을 흘끔 보고는 기억했던 대사를 읊었다.

“안녕? 네가 빈이구나.”

순간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너무… 딱딱하다! 어색하다!

초등학생이 만든 AI가 국어책을 읽는 것 같은 수준의 놀라운 발연기!

지켜보던 아레스가 옆사람에게 속삭였다.

“저 여자, 데우스 엑스 마키나 하수인 아니야?”

“…….”

그러나 순진한 빈이는 어색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우앙! 공듀님!”

양손을 뻗으며 안기려고 필사적이다. 이현이 슬쩍 빈이를 내밀었다.

지애가 상냥한 웃음을 연기하며 빈이를 안았다.

“무서웠어요?”

빈이가 고개를 크게 가로젓고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니!”

방금 전까지 울먹거리던 녀석이 거짓말은…….

공주님 앞에서 겁먹은 것처럼 보이기 싫었던 모양이다.

빈이가 지애의 몸을 이리저리 짚었다.

뭘 하나 보니… 고개가 번쩍 들렸다.

“공주님… 다쳐뚀?”

“공주님은 멀쩡해요. 어… 사, 사사, 사랑의 힘이 지켜주거든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는데…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카리나 공주의 간판 대사이지만 서른이 넘어 입에 담자니 너무나 오글거렸던 탓.

그러나 빈이에게는 눈앞에서 환상이 현실로 구현된 것.

“오아아!”

동그랗게 커진 눈에 별빛이 가득 담기고 작은 입이 한계까지 벌어졌다.

부족한 어휘력 탓에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을 빈이가 온몸으로 표현했다.

지애에게 와락 안긴 것이다.

“어머.”

그러나 행복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웨어울프걸… 렐사가 조금 늦게 눈에 들어온 것이다.

“렐싸!”

파다닥 날아오른 빈이가 박치기를 하듯이 웨어울프걸의 품에 안겼다.

웨어울프걸이 자애롭게 웃으며 손을 빈이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뻗었다.

“그럼 위험해. 공주님은 놀라면 번개를 쏘잖아.”

파지직.

손안에서 번갯불이 일어났다.

빈이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 마따!”

빈이가 아빠의 눈치를 살피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모했슴니다.”

“어머, 우리 빈이… 사과할 줄도 알고! 어른이구나?”

“비니 어른!”

엣헴, 하고 턱을 추켜세우는 빈이가 귀여워서 보던 이들의 얼굴이 저절로 헤실헤실 풀어졌다.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따로 연기를 할 필요가 없을 지경이다.

“공주님 쪼아!”

두 공주에게 홀딱 빠진 빈이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이현은 살짝 서운해졌지만… 어차피 오늘 하루인데 뭐 대수랴!

게다가 아직 하이라이트가 남았다.

“자, 그럼… 황녀님께 선물 증정식이 있겠습니다!”

웨어울프걸에게 안겨 무대로 간 빈이가 어리둥절, 사람들을 쳐다봤다.

“큼흠.”

가장 먼저 나온 것은 남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쭉 둘러보니 다들 심상치 않아 그냥 가장 먼저 선물을 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자, 빈아. 오빠가 주는 선물이야.”

“감사합니다!”

빈이가 꾸벅 고개를 숙인 후 웨어울프걸을 쳐다봤다.

풀어달라는 의미. 그녀가 조심조심 상자를 여니…….

“와! 공주님 세트!”

‘프린세스 카리나와 인형의 집’ 세트.

자그마치 삼십만 원을 웃도는 매서운 가격의 선물.

빈이가 양손을 치마 위에 모으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남우가 내려간 후 아테나가 무대에 올라왔다. 빈이가 빤히 보다가 갸웃했다.

“오디 공듀님?”

아테나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올림푸스의 아테나라고 한단다. 예쁜 아이야. 네게 줄 선물을 가져왔어.”

남우의 것보다 크기는 작았지만 훨씬 고급스러운 포장지로 감싸였다.

포장지를 뜯자 환한 빛이 빈이의 얼굴을 비췄다.

만화에서나 보던 마법봉. 마법봉의 안쪽에서 작은 우주가 회전하고 있었다.

“오아아아아…….”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보던 이현의 다리가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빈이가 엑스칼리버를 뽑은 아서왕처럼 마법봉을 치켜들고 외쳤다.

“이쁘다아!”

아테나가 훗, 웃으며 아스가르드 쪽을 보았다.

다음 차례는 아스가르드.

심한 부담감을 느낄 만한 차례였으나 프레이야 또한 자신만만했다.

‘급조한 아티팩트 따위야…….’

이 지구에 성단의 선물을 넘을 만한 보물이 있을 리가 없다.

즉, 경쟁자는 오직 아스가르드.

그러나 아스가르드는 딱 봐도 제작한 아티팩트이니, 선물 증정식으로 포장된 힘겨루기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한 셈.

“오아! 또 공주님!”

의젓한 공주님… 우아한 공주님… 공주님이 막 튀어나온다.

프레이야가 생긋 웃으며 선물을 열었다.

빛을 머금은 듯 반짝이는 다면체. 햇빛을 반사하는 이슬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다운 광채에 빈이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홀렸다.

“우와아……!”

“햐아!”

“저렇게 큰 보석이 있어?”

빈이가 입을 크게 벌렸다.

“오아아아아! 예뻐어!”

올림푸스 못지않은 반응!

올림푸스 성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구겨졌다.

프레이야가 복수하듯 훗, 웃으며 올림푸스 쪽을 본 후 도도한 걸음으로 내려갔다.

이현의 다리가 떨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팔뚝에 감긴 손가락도 초조하게 리듬을 탔다.

옆에 앉아 있던 지태가 의아하게 쳐다봤다.

“어? 형님, 추우세요?”

“…….”

이현이 우수에 젖은 눈으로 지태를 보는데…….

어쩐지 이유를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다.

“다음은 쉐도우 로드님!”

붉은 수녀가 수레에 커다란 선물상자를 싣고 나타났다.

상자를 뜯자 ‘에메랄드 어드벤처’에 나오는 궁전의 축소 모형이 나타났다.

유리관에 담긴 궁전의 우아하고 사실적인 자태에 사람들이 감탄했다.

반면 이현의 다리 떨림은 이제 스킬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나, 둘 선물이 더해질수록 진파를 일으킬 듯 빨라지는데…….

이마에는 식은땀까지 맺혔다.

“그럼 마지막으로 아버지인 마왕 이현 씨의 선물이 되겠습니다!”

“크, 크흠.”

이현이 천천히… 몸에 추라도 달린 듯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천 근처럼 무겁다.

“아빵.”

빈이가 무대에 올라온 그를 보고 활짝 웃었다.

그 순진무구한 미소에 이현은 겁에 질렸다.

‘괜히 마지막에 나간다고 했나?’

차라리 중간쯤에 나갔어야 했는데…….

후회를 하면서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 일.

이현은 마지못해 상자를 내밀었다.

빈이가 상자에 손을 쏙 넣어 선물을 꺼내 들었다.

“왕!”

비늘 모양의 세공이 가미된 리본 모양의 작은 머리핀.

비늘은 하나하나 보석이고, 그 하나하나에 강력한 방어 마법까지 걸렸다.

키르단 최고의 장인에게 부탁해서 만든 후 크루엘이 직접 마법을 건 물건이었다.

“마음에 들어?”

“웅! 쪼아!”

작은 손이 머리핀을 양손으로 꼭 쥐었다.

일단은 만족스러운 반응이다.

이현은 안도하고 내려갔다.

“그럼 황녀님의 심사가 있겠습니다!”

빈이의 앞에 산더미 같은 선물이 놓였다.

“심사 방식은 간단합니다. 황녀님께서 가장 마음에 드는 선물 1, 2, 3위를 발표하시는 것이죠.”

이현은 큰 기대 없이 빈이를 바라봤다.

애들에게는 압도적인 시각 정보가 크게 닿는 법.

워낙 어마어마한 물건들이 많이 나왔으니… 1등을 기대하는 건 힘들겠지.

사회자가 빈이의 입에 마이크를 가져갔다.

“자, 황녀님! 가장 마음에 드는 선물이 뭔가요?”

“까장?”

“예.”

성좌, 인간 가리지 않고 모두의 시선이 빈이의 작은 입에 집중된 가운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빈이가 머리핀을 들어 올렸다.

“이거!”

두근!

이현의 가슴에서 심장이 요동쳤다.

사회자가 빈이에게 물었다.

“왜 그게 좋아요?”

빈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빠가 줘떠!”

그러고는 브로치를 소중히 안는데… 이현은 말없이 가슴에 손을 올렸다.

다른 무엇보다, 빈이에게는 아빠가 준 선물이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선물을 주려고 했건만 도리어 큰 선물을 받아버렸다.

눈시울이 시큰했다.

이현은 무대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두 팔이 빈이를 와락 안았다.

“우리 빈이… 아빠가 많이 많이 사랑해!”

통통한 두 팔이 그를 마주 안았다.

“나두!”

짝짝짝짝…….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가운데,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