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크리스마스 대란 (2)
헌터 협회의 본사 대회의실.
CEO 더글라스 맥베인을 비롯한 수십 명의 이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유지애 이사가 까만 정장에 미니스커트와 검은 스타킹을 입은 모습으로 앞에 섰다.
평소보다 더욱 냉철한 이미지.
그녀가 버튼을 누르자 한 커다란 배가 나타났다.
“이것이 이현 님이 대여한 ‘로열 가디언 엔젤 크루즈’입니다.”
핏.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리는 장소는 이곳의 4층 파티 홀입니다. 이현 씨가 머무는 방은 ‘울트라 패밀리 스위트 룸’인데, 이곳에서 총 여섯 명의 인원이 함께 지낼 예정입니다.”
사진이 떠올랐다.
이현, 빈이, 남우의 어머니와 남우, 희수, 일성, 베요네타 순이었다.
베요네타는 몰래 찍은 사진인지 약간 흔들린 데다가 분위기도 험악해서 평화로운 다른 사진들과 안 어울렸다.
지애가 다시 버튼을 누르자 방의 구조가 나타났다.
“울트라 패밀리 스위트 룸… 줄여서 UFS 룸은 42평의 복층 구조로, 최대 8명의 인원이 머물 수 있습니다. 어느 방에 어떤 인원이 머물게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삑.
바뀐 화면에 지도가 나타났다.
“일정은 7박 8일. 23일부터 새해까지 진행됩니다. 부산항에서 출발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일본 오타루를 거쳐 다시 부산항으로 돌아오는 일정입니다.”
“크리스마스 파티와 새해 파티를 함께하는 것이군.”
맥베인의 말에 지애가 끄덕였다.
“예. 일단 명목상으로는 크리스마스 파티입니다만… 여러 귀빈들도 참석하는 만큼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
“반드시 마왕과 접촉하려는 사람이 있겠지.”
어떠한 대가를 주더라도 마왕의 거처를 본인들의 국가로 옮기려는 나라가 많다.
돈, 여자, 권력, 명예…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할 텐데…….
그 과정에서 잘못된 의지를 가진 자가 마왕의 심기를 거슬러 그가 지구를 떠나게 만든다면 전 지구적 손해.
협회로서는 반드시 막아야 했다.
“예. 협회 측에서 초대장을 받은 사람은 일단 저와 웨어울프걸 둘 뿐이라, 협회에서 헌터들을 크루즈의 경비 인력으로 제공하려고 합니다.”
경비를 보며 감시도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
“좋은 생각이군. 그런데…….”
맥베인이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지애를 바라봤다.
“미스 유에게 이현 군이 뭘 부탁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파티에서 말이야.”
‘이런 shit…….’
지애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비서는 아닐 테고… 아마 코스프레를 부탁한 업체나 다른 방향에서 정보가 샌 것이겠지.
이미 다 알고 묻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지애는 철판을 깔고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비밀엄수를 당부받아 말씀드리기가 곤란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거 아쉽구만.”
지애는 생긋 웃었다.
“현재로서 작전은 원활히 진행되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제부터는 대외비를 위한 변수 관리에 집중할 예정입니다.”
더글라스가 손을 들었다.
“초대장 하나 어떻게 더 못 구하겠나? 개인적으로 참가하고 싶어서 말이야.”
“이현 님께서 개인적 친분을 쌓은 분들만 초대하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으음… 아쉽군.”
시가에 불을 붙이는 더글라스를 보며 지애는 격정을 불태웠다.
‘코스프레한 모습을 보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지.’
인생 최악의 흑역사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지애는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열과 성을 다해 비밀 관리를 엄수했다.
* * *
“빈아, 봐봐! 큰 배다, 큰 배!”
이현이 빈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번쩍 들었다.
빌딩을 가로로 눕힌 듯 웅장한 자태… 코앞에서는 전체 모습이 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다.
생애 처음 보는 거대한 배의 모습에 빈이의 눈이 반짝였다.
“큰 배!”
“그래, 그래. 아빠랑 이제 탈 거야~”
“아빠랑 큰 배!”
아무튼 아빠랑 같이 있다는 사실이 좋은지 빈이가 만개한 얼굴로 이현의 목에 매달렸다.
흐뭇하게 걷는 이현의 뒤로 일성이 나타났다.
“허허. 우리 빈이 덕에 이 할애비가 호강하네요.”
남우 가족이 하얗게 질려서 일성의 뒤로 따라붙었다.
“실화야?”
“이 배를 다 빌렸다고?”
그때 하얀 유니폼을 입은 신사가 다가와 인사했다.
“웰컴! 마왕님이시죠?”
“아, 내가 마왕 맞지.”
“선장입니다. 팬이기도 하고… 혹시 사인이랑 사진 좀……?”
“아, 물론.”
투샷을 찍은 그가 핸드폰을 보며 흐흐 웃었다.
“가보로 간직하겠습니다. 아! 이리 오세요! 직접 안내해드리죠!”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아뇨, 아뇨! 원래 VIP는 직접 안내해드리는 게 룰입니다. 아, 가방과 짐은 저희 직원들이 룸에 갖다 드릴 겁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다가왔다.
이현은 아무렇지 않게 짐을 건넸지만, 그런 대접에 익숙하지 않은 희수와 남우는 괜히 쩔쩔매며 짐을 맡길 때마다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TV로만 보던 분을 이렇게 직접 보다니 꿈만 같네요. 허허.”
중년의 선장이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말했다.
“조금 구경하다가 들어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바로 방으로 가실까요?”
그때 빈이가 하품을 했다.
여행 가는 분위기도 낼 겸 차를 렌트해서 왔더니 좀 피곤한 모양이었다.
이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로 방으로 가지.”
“네, 알겠습니다.”
벽이 유리로 된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올랐다.
“예약하신 울트라 패밀리 스위트 룸은 8층입니다. 이 엘리베이터로만 이동하실 수 있죠.”
“그럼 사고 때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닌가?”
이 배가 통째로 다른 공간으로 전이되더라도 살아나올 자신이 있기는 하다.
벽이 막히면 뚫어버리면 그만이고…….
하지만 빈이도 있는데 안전불감증은 최대한 자제해야겠지.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비상계단도 있고, 사고 시에는 직원이 직접 탈출을 도울 겁니다.”
“흐음.”
“자, 이쪽입니다. 이게 문을 여는 전자키입니다.”
울트라 패밀리 스위트 룸.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고급스러운 검은 대리석으로 마감된 거실로 들어서자 희수는 다리가 덜덜 떨렸다.
가구들도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게… 집을 팔아도 못 사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남우가 경직된 자세로 말했다.
“얘들아, 뭐 잘못 건들면 안 된다. 흠집 나면 큰일 나.”
“으, 응.”
요즘 벌이가 좋아지기는 했지만 수십 년을 쌓아온 소시민적 감성이 쉽게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남우와 희수는 서로 딱 붙어서 덜덜 떨었다.
“배에 들어온 기분이 아니네…….”
배 자체가 워낙 커서인지 출렁거림도 안 느껴지고, 내부는 여느 호텔 못지않게 호화스럽다.
“우리 빈이 선물 어떡해?”
각각 따로 빈이의 선물을 준비한 두 남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준비하기는 했지만 이 배 티켓값에도 못 미칠 것이다.
아니, 티켓값 정도가 아니라 한 끼 식사에도 못 미치지 않을까.
“괜찮아. 형님이 가격을 신경 쓰시는 분은 아니니까…….”
“그래도…….”
반면 이현은 심드렁했다.
“뭐, 내 취향이랑은 좀 안 맞긴 한데… 나쁘지는 않네.”
집이 굳이 번쩍거릴 이유가 있나? 구실만 잘하면 되지.
키르단 제국의 방도 침대와 카펫 정도만 고급으로 놓고 장식은 거의 없었다.
그때 빈이가 그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아빠!”
작은 손이 발코니를 가리킨다.
“응? 아……!”
그러고 보니 빈이와 바다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가.
넓은 발코니에 나가자 선베드와 유리로 된 난간이 보였다. 난간 너머, 까마득한 몇 층 아래로 수영장이 있다.
아직 출발 전임에도 수영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몇 보였다.
“오아아…….”
빈이가 커진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갑판 밖으로 펼쳐진 광활한 바다.
‘지구처럼 바다가 아름다운 곳은 흔치 않지.’
여러 차원을 다니며 느꼈는데 애초에 생명은커녕 물 자체가 없는 차원도 많았다.
알이었던 빈이를 구한 차원도 생명을 찾아보기 힘든 차원이었다.
그래서 빈이가 더욱 눈에 띄었던 것이고.
반면 지구는 어딜 봐도 생명이 넘친다.
갖은 고생을 하며 찾아온 보람이 있다.
“앞으로도 아빠랑 행복하게 살자.”
“웅!”
쪽.
빈이가 볼에 뽀뽀를 했다. 이현이 헤벌쭉 웃었다.
이제 빈이가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어, 이 넘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전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그때 갈매기 한 마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갈매기와 빈이의 눈이 마주쳤다.
빈이가 눈이 커지고 입을 벌리더니 날개를 파닥였다.
함께 날고 싶은 모양인지 날개에서 마력이 방출됐다.
이현은 슬쩍 빈이를 놓았다.
“자.”
파닥파닥.
날아오른 빈이가 갈매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갈매기가 놀랐는지 뒤로 물러났다가 쳐다본다.
‘이 생물은 뭐냐’는 눈빛이다.
“새!”
빈이가 손을 뻗는데 갈매기가 손바닥을 콕 찔렀다.
“아야!”
공격은 아니고, 아마 손에 뭘 들었나 확인한 모양.
이현은 얼른 빈이를 도로 안고서 손바닥을 확인했다. 손바닥 가운데가 살짝 빨개졌다.
커다란 붉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흐, 흐이잉.”
“아이고, 우리 빈이~ 많이 아팠어요~?”
쓰다듬어주는데… 울먹이던 빈이가 홱 고개를 돌려 갈매기를 쏘아봤다.
“후우!”
화르르륵!
화염방사기 같은 불줄기가 허공을 뻗어나갔다.
갈매기였던 새카만 덩어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아래에서 고함이 들렸다.
“으악! 불이다!”
“위층에 불이 났어!”
하필 아래 갑판에서 청소를 하던 선원들이 불줄기를 목격했다.
빈이가 떨어진 갈매기를 가리키며 외쳤다.
“꼬기!”
그래… 고기는 맞지.
“노 파이어! 노 파이어!”
크게 외친 이현이 황급히 빈이의 입을 막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그럼… 합의가 된 건가?
초록색 글자가 가득 찬 핸드폰에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물었다.
하얀 턱시도를 입은 남자가 핸드폰을 흘긋 보았다가 스테이크를 썰었다.
턱 아래에 줄처럼 난 붉은 턱수염이 인상적이었다.
“한때는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다라라랑~
하프 선율이 아름답게 울렸다.
하바로프스키 부두의 레스토랑.
바다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은 남자가 썬 스테이크를 들어 살폈다.
붉은 살이 비치는 스테이크에서 육즙이 뚝뚝 흘렀다.
고기 구운 냄새를 코끝으로 즐기며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이 스테이크를 봐. 난 이 스테이크를 돈 주고 샀지만 이걸 굽고, 적당히 간을 맞춰 요리할 줄은 모르지.”
남자가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풍미가 가득한 스테이크를 씹는 남자의 얼굴에 잠시 행복이 감돌았다.
“난 돈으로 요리를 산 것이지. 사회가 그러기로 합의했거든. 사회가 무너지면 내가 가진 돈으로는 더 이상 요리를 살 수 없게 되겠지. 첫 게이트 폭발 때처럼.”
핸드폰이 말했다.
―그럼 합의된 거로군.
스테이크를 삼킨 남자가 와인을 들었다.
“그래. 당신 말대로… 마왕이라는 자가 정말로 이 사회에 위협이 되는 존재라면… 그 화신이라는 게 되지.”
와인을 마신 남자가 중얼거렸다.
“사회를 지키는 게 헌터의 본분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