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크리스마스 대란 (1)
올림푸스의 영광과 번영을 상징하는 황금의 문.
승리의 순간들과 그 승리를 이끈 신들의 모습이 살아 움직이듯 생생히 새겨져, 공회당으로 들어오는 신들로 하여금 품위를 상기시키고는 했다.
그 문이 벌컥 열렸다.
콰당!
“속보!”
의자에 길게 누워 포도를 먹던 제우스가 버럭 소리쳤다.
“무슨 신이 경거망동하며 뛰어다니느냐!”
벼락같은 고성에 헤르메스가 움찔했으나 금방 어린애처럼 다시 달려갔다.
“마왕! 마왕이 저희를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했습니다!”
제우스는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환해졌다.
파티에 초대했다.
성단들끼리는 어지간하면 다른 성단의 성좌를 연회에 초대하지 않는다.
성단에 들인다는 것 자체가 그 성좌를 신뢰한다는 의미인데.
성좌들은 서로 정수리에 도끼를 꽂을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는 화기애애한 사이.
신뢰라는 말을 서로 입에 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우리 전부?”
“아뇨. 대표로 한 명, 최대 세 명이랍니다.”
“에잉.”
살짝 실망스럽지만 그게 어디냐.
“흠흠. 그러면 세 명을 신중하게 골라야겠군.”
헤르메스가 손가락 두 개를 들었다.
“두 명이죠. 아레스 님은 무조건 포함이잖아요.”
“그노옴… 꼭 보내야 하나?”
원래 아레스는 축제를 좋아하기도 하고, 분위기 띄우는 건 잘하는 놈이다.
하지만 성질이 급하고 입이 가벼운데다 취하면 그렇지 않아도 가벼운 입이 아주 하늘로 동동 뜬다.
게다가 최근 지구에 내려보냈을 때의 행실을 생각하면… 영 불안하다!
헤르메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보내야죠. 아레스 님 말로는 저번 방문 이후 이현님과 친해지셨다고 하니까요. 아, 아프로디테님은 무조건 제외겠네요. 취향 아니라고 했으니까.”
“너 그 말… 아프로디테 앞에서는 하지 말거라…….”
아프로디테는 이현에게 차인 이후 히키코모리처럼 밖을 나오지 않았다.
무슨 귀신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나 예뻐?’를 묻는다나…….
그런 상태인 아프로디테를 이현에게 보냈다가는 피의 축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에이, 당연하죠. 저도 목숨이 소중한데. 그럼 일단 아레스 님… 그리고…….”
“네가 가라.”
“제가요?”
제우스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레스 놈 감시할 인간이 필요해.”
“그럼 나머지 한 명은요?”
“아프로디테가 취향이 아니랬으니, 균형도 잡을 겸 아테나가 어때?”
아테나 또한 미인으로 유명한 여신.
그 미모는 아프로디테도 가끔 질투할 정도로 수많은 전사들을 미혹시켜왔다.
그러나…….
“그분은 남자에게 관심 없잖아요?”
“걔가 남자에게 관심 없는 게 무슨 상관이야? 이현이 아테나한테 관심이 생기면 그만이지.”
오히려 좋아서 쫓아다니면 그것을 빌미로 이것저것 요구할 수 있으니 더 이득이다.
“이현이 여성에게 관심이 없으면요?”
“아냐… 너, 그놈이 곁에 두고 있는 여자 못 봤냐?”
베요네타.
“내가 볼 때 이현은 강하면서도 섹시한… 전사가 취향인 거다. 아프로디테 걔는 아무래도 좀 여리여리한 느낌이잖아.”
“아하.”
아프로디테가 모든 남성의 혼을 빼앗는 강렬한 매력을 지녔으나.
그녀가 모든 취향을 커버하는 것은 아니다.
전사가 취향인 사내라면 아프로디테보다는 아테나에게 매력을 느낄 수도 있겠지.
“문제는 크리스마스 선물이겠군. 크리스마스는 애들한테 선물을 주는 날이니, 그 아이가 좋아할 만한 걸 줘야겠지?”
“헤파이스토스 님께 부탁하는 건 어떨까요?”
불의 신이자 대장장이의 신이기도 한 헤파이스토스.
그의 힘이라면 엄청난 아티팩트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뛰어난 예술혼으로 항상 필요 이상으로 좋은 것을 만들어내, 결과물은 올림푸스 밖으로 반출하는 것이 엄격하게 규제되고 있다.
헤파이스토스라면 빈이에게 줄 선물도 완벽히 만들어낼 터.
“그래. 당장 헤파이스토스에게 연락하지.”
아테나와 완벽한 크리스마스 선물… 2연타면 이현의 마음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할 것이다.
간접적으로는 단순히 아이에게 주는 선물의 질이 이 정도다, 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힘의 과시도 될 터이니…….
완벽한 기회다.
“흐흐흐…….”
그때 뾰족한 목소리가 그의 어깨를 찔렀다.
“또 뭐가 좋아서 실실대요? 마음에 드는 여자라도 보였어요?”
헤라다.
언제 들어왔지. 가끔 귀신처럼 갑자기 나타나 놀라게 한다.
제우스가 흰 눈썹을 치켜세우며 정색했다.
“여보, 그런 거 아니야.”
헤라가 도끼눈을 떴다.
“당신이 헤르메스랑 단둘이 속삭일 때가 그때밖에 더 있어욧? 어디야? 이번엔 어떤 년이야?!”
“아니라니까! 이번엔 우리 그 올림푸스를 위한 일이야!”
척척 다가온 헤라가 쏘아붙였다.
“뭐 전에는 아니었나? 빨리 말 안 해요? 이번에 말하면 그년만 죽이는 걸로 봐줄 테니까 얼른 말하지?”
헤르메스가 슬금슬금 물러났다.
“저… 저는 헤파이스토스 님께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너! 거기 안 서?”
* * *
오딘은 왼쪽 눈에 다시 안대를 찼다.
“…그렇군. 이현은 우리 성단뿐만 아니라 올림푸스에까지 초대장을 보냈나.”
그의 옆에 앉아 있던 프레이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 두 성단의 역량을 시험할 생각이로군요.”
“아니… 두 성단뿐만이 아니다. 아마도 지구에 관심이 있는 모든 성단에 초대장을 보내 모두의 역량을 시험하는 것이지. 제법 똑똑하군, 이현.”
초대에 응한 성단들은 각자 최선의 선물을 준비할 테고, 그 선물의 질이 곧 간접적으로 성단의 힘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터.
‘우린 고작 아이 선물에 이 정도를 쓸 수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프레이야는 침실에서 보았던 이현의 얼굴을 떠올리며 끄덕였다.
“예. 만만히 볼 수 없는 자입니다.”
“아이의 선물이라… 꽤 어려운 주제다만 어떻게 할까?”
오딘이 지그시 프레이야를 바라보았다.
다산, 풍요의 여신인 그녀야말로 이 어려운 주제의 답을 제시해줄 것임을 기대하며.
아니나 다를까, 고혹적인 미소가 프레이야의 얼굴에 떠올랐다.
“실은 제가 생각해둔 것이 있습니다.”
“음? 무엇이지?”
“그 나이의 아이들은 까마귀처럼 반짝이는 것에 끌릴 수밖에 없지요.”
“호오… 보석이라? 하지만 어지간한 보석으로는 어림도 없지 않겠나?”
“‘지혜의 보석’이라면요?”
오딘의 얼굴이 굳었다.
지혜의 보석.
스스로 의지를 갖고 있으며 지닌 자의 지혜를 늘려준다는 신물.
보석을 이루는 광석 자체도 이제는 사라진 별의 심장이고.
성좌들에게는 일종의 최고급 컴퓨터로 여겨지는 중이었다.
단순한 보석이 아니라 성좌들조차 탐을 내는 아스가르드의 보물.
“그건… 그 정도까지 해야 하나?”
사실 오딘도 탐내고 있던 보물.
현재 소유자가 프레이야라서 달라고 하지 못했을 뿐.
갖고 싶다. 탐이 난다.
“아스가르드가 올림푸스보다 못하다는 말을 듣고 싶으신가요?”
“끄응…….”
지혜의 보석… 그보다 귀한 보물이야 얼마든지 있지만…….
은근히 탐내던 보물.
구형 게임기나 차에 대한 애착과 비슷하다.
오딘이 먼 산을 보았다.
이번에 주면 다시 돌려받지도 못할 텐데…….
“좀 더 생각해보지. 우리, 보물 많잖아?”
“설마 주기 싫어서 그러시는 거 아니죠?”
“중요한 선물이니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지! 자, 일단 고민하러 가봐야겠군.”
오딘이 망토를 휘날리며 사라졌다.
프레이야는 어처구니가 없어 중얼거렸다.
“남자들이란…….”
* * *
“호잇.”
크루엘의 몸이 넓게 펼쳐지며 위로 솟구쳐 천장에 찰싹 달라붙었다.
빈이가 폴싹 뛰어들었다.
철퍽.
“꺄하!”
맑은 웃음이 번졌다. 크루엘의 몸이 꾸물텅꾸물텅 움직이며 빈이의 몸을 위아래로 왕복시켰다.
빈이는 마치 수영을 하듯이 팔다리를 휘저으며 연신 꺄르륵 웃었다.
그 광경을 남우와 베요네타가 분하다는 듯이 보는데…….
크루엘이 조소했다.
“이것이 종족의 차이다. 후후후.”
전에 한번 몸을 벌레화했다가 빈이를 울린 전적이 있는 베요네타는 입술까지 질끈 물었다.
‘소녀도 황녀님께 호감을 사고 싶은데!’
그때 화장실에서 나온 이현이 거실에서 노는 세 사람을 불렀다.
“야야. 그만하고 잠깐 안방으로 와봐. 할 말이 있다.”
“네, 주군!”
“아, 크루엘 넌 계속 빈이 놀아주고. 넌 이따 따로 말해줄게.”
“아… 옙.”
남우와 베요네타를 앞에 앉힌 이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곧 크리스마스인 거 알지?”
“예.”
“네.”
이현이 베요네타를 보았다.
“넌 잘 모르겠지만 크리스마스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날이다.”
베요네타의 눈이 커졌다.
“그 말씀은…….”
이현이 훗, 웃었다.
“그래. 우리 빈이에게 선물을 줘야 한다는 말이지.”
일어난 이현이 창가에 뒷짐을 지고 섰다.
무거운 그림자가 등에 지며 햇빛이 얼굴을 근엄하게 조각했다.
“뭐… 딱히 강요하는 건 아닌데, 난 우리 빈이가 이상한 선물은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꿀꺽.
남우와 베요네타가 동시에 침을 꿀꺽 삼켰다.
이현은 팔불출이라는 글자를 이마와 등에 써놓고 전광판으로 광고하는 남자.
다시 말해 지금 그의 말은… 니들이 선물을 주는 것은 당연하고, 이상한 선물일 경우 유혈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의미!
“소녀,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응. 여쭤.”
“‘이상한 선물’의 기준이 있을는지요?”
“아, 있지.”
이현이 싱긋 웃었다.
“우리 빈이 마음에 안 드는 것.”
매우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며 추상적인 그 답변에 베요네타는 아찔해졌다.
벌레 사건 이후 빈이가 그녀를 무서워하게 된 탓에 베요네타는 빈이와 놀아주거나 대화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녀는 빈이의 취향이 무엇인지 하나도 몰랐다.
그런데 어떻게 빈이의 마음에 드는 물건을 준비한단 말인가!
인생 최대의 위기!
“으음.”
남우는 남우대로 곤란했다.
이현의 지인들은 S급 헌터들을 포함하여 대배우 원준까지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빈이의 선물을 그런 인물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뜻.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이기에 순수하고 솔직한 법이다.
보석과 산해진미를 즐기다가 갑자기 몇만 원짜리 장난감을 받으면 과연 성이 찰까?
마음에 안 들 수밖에 없는데…….
‘큰일이다.’
“다들 바쁠 테니 이야기는 이쯤 하지.”
“네!”
결의에 찬 베요네타의 얼굴을 흘끔 본 남우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이세계인과도 경쟁해야 한다니! 이거 진짜 큰일이다.
동시에 방을 나오자마자 그들은 곧장 신발을 신었다.
한시가 급하다. 지금부터라도 발로 뛰며 빈이의 선물을 탐색해야 한다.
엘리베이터에 타자 베요네타가 슬쩍 물었다.
“남우 씨.”
“아, 예.”
“그대는 폐하의 수제자이고, 황녀님과도 친하죠? 물론 취향도 잘 아시리라 보는데… 혹시 힌트를 좀 줄 수 있을까요?”
남우는 그녀를 경쟁자로 인식했으나 막상 도움을 구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유화되며 도움을 주고 싶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자꾸 노력하는데 빈이에게 밀려나는 모습이 평소 안쓰럽게 보였다.
“먹을 것도 좋아하는데 주로 고기류고, 장난감으로는 요새 자주 보는 에메랄드 어드밴처의 물품이 좋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정말 좋은 사람이셔요!”
베요네타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세계인이라고는 하나 겉모습은 요염한 미녀. 여자에 대한 내성이 별로 없는 남우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개졌다.
“예? 아, 그게… 어, 네! 뭐, 별것 아닌데… 어…….”
“소녀, 이 은혜 가슴 깊이 기억하겠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베요네타가 벌레 무리로 화해 하늘로 날아갔다.
누구보다 빨리 움직일 심산.
남우는 빨개진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수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