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기계 장치의 신 (2)
양복을 입은 남자가 기자회견장에 섰다.
헌터 협회의 CEO 더글라스 맥베인.
그가 양손으로 단상을 짚고 말했다.
[‘제노사이더’ 로버트 스타스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맥베인의 눈이 형형히 빛났다.
[이와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저희 헌터 협회에 소속된 모든 헌터분들은 지구의 미래를 위해 성실히 공략에 임할 것임을 다시금 약속드립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기자들이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제노사이더는 모두 마왕의 무고라고 주장하던데… 맥베인 씨의 의견은 어떠신가요?]
[협회에서는 마왕의 군대가 100% 인류의 편이라고 확신한다는 뜻입니까?]
맥베인이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마왕은 멸망급 게이트를 공략한 S급 헌터입니다. 즐거운 연말 되십시오.]
멸망급 게이트는 지구 멸망의 위기.
마왕, 이현은 이미 지구를 한 번 구한 영웅이다.
그 외에 다른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맥베인이 기자회견장을 나갔다.
이현도 TV를 끄고서 빙글 몸을 돌렸다.
곤히 자는 빈이가 보였다.
평화로운 낮잠 시간.
아혼살의 촬영도 다 끝나서, 이제 집에 있던 카메라도 다 사라졌다.
일성도 장을 보러 나가서 무척이나 고요했다.
“이만 나오지? 언제까지 음침하게 보고 있을 거야?”
지직… 지지직.
갑자기 TV가 다시 켜지더니 초록색의 무수한 문자가 안에서 나타났다.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듯 딱딱한 목소리가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흥미롭군.
“너도 흥미롭네.”
이 집은 온갖 방어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감시하다니.
게다가 직접 온 것도 아니라 기척을 느끼기 힘들었다.
목소리가 말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것이 나다.
이미 리처드에게서 들은 이름이었다.
“아, 네가 그거냐? 리처드란 놈을 조종하던 신?”
―신은 나란 개체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부르기 편하다면 신이라 불러도 좋다.
“싫다.”
지지직.
TV 화면이 흔들렸다.
“그래서? 나한테는 무슨 볼일이냐? 살려달라고 빌게?”
―지구를 떠나라.
“이놈이 아주 당당하네.”
―예언을 봤으면 너 자신이 지구를 황폐화시키는 광경을 보았을 것이다.
“아, 그거? 그래서?”
다큐에 나올 법한 숲과 바다, 도시가 순차적으로 나타났다.
―네가 사랑하는 차원을 네 손으로 파괴하고 싶은가?
이현은 팔짱을 낀 채 TV를 당당히 응시했다.
“예언이 뭐라든, 난 그런 짓 안 한다. 그러니 안 가.”
―비합리적인 판단이다.
“꼬우면 쫓아내 보시든가.”
TV에 태양이 떠올랐다.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내년 1월 1일까지 떠나지 않으면 카오스 성단 전체가 너를 노릴 것이다.
“올 때 메로나.”
TV가 꺼졌다.
“카오스 성단은 또 뭐야?”
잔치 열린 것도 아니고, 귀찮은 놈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난다.
“마가 꼈나…….”
그때 언제 깼는지 빈이가 이현의 옆을 지나쳤다. 두 손이 TV를 톡톡 두드렸다.
“여보세여.”
“…….”
아빠를 한번 돌아보더니 다시 TV를 두드린다.
“여보세여.”
빈이도 TV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 하지만 될 리가 없다.
앙증맞은 두 손이 TV에 노크를 했다.
“여보세여.”
홱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왜 안 되냐는 얼굴.
이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까 그놈… 잠깐만 나와달라고 할까?’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 든다.
“비… 빈아, 간식 먹을까?”
비장의 카드를 꺼내봤지만 빈이는 TV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굳게 쥔 손이 연신 TV를 두드렸다.
“여보세여.”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이현은 쪽팔림을 무릅쓰고 코를 움켜쥐었다.
빈이가 TV를 두드리는 타이밍에 맞춰 코맹맹이 소리가 대답했다.
“여보세여.”
“네엥. TV입니다.”
TV가 대답했다!
빈이가 환하게 웃으며 아빠를 쳐다봤다. 빠른 반사신경으로 코에서 손을 뗀 이현이 환하게 웃었다.
“TV 아저씨가 얘기하네에~”
“웅!”
다시 TV를 바라보며 빈이가 TV에 대고 말했다.
“렐사 공주님!”
“응?”
렐사라면… 최근 빈이가 보는 ‘에메랄드 어드밴처’ 3화부터 나오는 번개의 공주!
양손에서 번개를 발사하는, 이현이 보기에는 매우 위험한 능력을 지니고 있을뿐더러 심지어는 그걸 제어할 줄도 몰라서 숲 하나를 불태운… 무시무시한 공주인데.
빈이는 TV에서 렐사가 나오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렐싸 공주니임!”
큰일 났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 목소리까지는 힘든데.
빈이가 TV를 양손으로 찍었다.
콰직!
“공듀님!!”
“아.”
TV가 유명을 달리했다.
빈이가 금이 간 TV를 보더니 이현을 돌아보았다.
붉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는 공주님에 서운해진 것이다.
“후에에엥! 공듀님! 후에에에엥!”
뜨악.
빈이가 도도도 달려와 이현에게 안겼다. 얼른 빈이를 안아 든 이현이 땀을 뻘뻘 흘리며 등을 두드렸다.
TV 목소리를 괜히 냈다!
“공듀니이히잉!”
빈아… 누가 들으면 공주님이 죽은 줄 알겠어…….
이현은 울상을 억지로 펴고서 말했다.
“아, 아빠가 렐사 공주님 불러와줄게!”
울먹이던 빈이가 그를 빤히 쳐다봤다.
“훌쩍… 딘짜?”
“그럼! 아빠가 렐사 공주님 꼭 불러줄게!”
빈이가 이현을 와락 안았다.
“공듀님!”
이번에는 전문 코스플레이어라도 고용해야 할까…….
* * *
“하아…….”
지애는 마네킹에 입혀진 옷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휘황찬란한 드레스다.
책상에는 핑크색 보석이 박힌 요술봉까지 있는데.
이 나이에 이걸 입고 프린세스 카리나 코스프레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울고 싶다!
‘아냐, 이건 지구를 위한 일이야.’
빈이에게 공주님 흉내를 내서 호감을 사고, 나아가 이현의 호감을 사는 것으로 그의 강대한 힘을 지구에 묶어두는 것!
모든 것은 그를 위한 일이다.
고작 코스프레가 대수랴!
하지만… 현타가 온다.
벌컥벌컥 맥주를 마신 지애는 달력을 보았다.
크리스마스까지 이제 일주일.
그날이 안 왔으면 좋겠다.
처음으로 그런 나약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소파에 던져놓았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가 화면을 본 지애의 눈이 커졌다.
“헉.”
이현.
오늘은 연차지만 이현의 전화를 안 받을 수는 없다.
“큼, 흠.”
지애는 목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예, 유지애입니다.”
―어. 통화되나?
“예, 물론이죠. 혹시 악플 고소 진행 때문이신가요?”
감히 S급 헌터에게 악플을 다는 간이 부은 놈들이 있나 싶겠지만 놀랍게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상한 합성 영상을 만들어 큐튜브에 올리거나, 헛소리로 선동을 하는 놈들도 수두룩했다.
최근 잡은 놈 중에는 혼자서 수천 개씩 댓글을 단 정신병자도 있었다.
마왕 이현이 사람들 머리에 칩을 심어 조종한다거나,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데.
지애 자신이었으면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을 듯했다.
―아냐, 아냐. 그게 아니고… 또 부탁할 게 하나 있어서.
“부탁…이요?”
―으으음… 혹시 헌터들 중에 손으로 번개 쏘는 게 가능한 헌터가 있나? 여자로.
“예. 몇 있죠.”
―오오! 그럼 말이야. 그 사람들 중 하나에게 부탁해서 코스프레 좀 가능할까? 크리스마스에.
“…예?”
너무나 황당한 요구라, 지애가 저도 모르게 반문하니 이현이 말했다.
―우리 빈이가… 에메랄드 어드벤쳐의 렐사 공주님이 보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렐사라면 지애도 잘 알았다.
영화가 대박이 나서 뮤지컬도 하는, 이번 연도 가장 성공한 캐릭터 중 하나일 것이다.
지애도 영화를 보며 예쁘다고 감탄했던 기억이 났다.
왜 번개를 쏘는 게 가능한 여자를 묻는지 알 것 같았다.
“렐사… 말이죠?”
―어렵겠나?
헌터들은 안 그래도 자부심이 강한데… 코스프레 같은 걸 해줄까?
“헌터가 아니라 그냥 전문 코스어를 구하시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요?”
―우리 빈이가 똑똑해서… 손에서 번개 못 쏘는 사람은 렐사라고 안 믿을 거야.
어처구니가 없는 요구다.
빈이가 똑똑하기는 해도 그 정도는 아닐 텐데.
아빠로서 빈이에게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겠지.
―역시 어렵나?
CEO인 더글라스 맥베인의 당부가 불쑥 뇌리를 스쳤다.
―어떻게든 잘 보여서 이현 씨를 붙잡아놔야 해!
그래, 이건 단순히 코스프레가 아닌 지구의 미래를 지키는 일.
다행히 렐사 드레스야 구하기 쉬울 테고, 남은 건 번개 계열의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여자뿐.
물론 미모도 받쳐줘야겠지만 아이돌 헤메코 팀에 부탁하면 반드시 미인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극복이 가능할 것이다.
지애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아뇨! 해보겠습니다!”
―오, 그래? 그럼… 믿지.
“네!
* * *
번개가 좁은 통로를 달렸다. 벽돌이 하얗게 비치며 귀를 찢는 소음이 울렸다.
꽈르릉!
피와 살점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후두둑 떨어졌다.
털에 덮인 손이 벽에서 떨어지고, 그 아래 눌려 납작해진 머리가 진득한 피의 교각을 만들었다.
“끝인가?”
웨어울프걸은 손에 묻은 피를 대충 벽에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B급 게이트, ‘악몽에 잠긴 성’.
B급부터는 난이도가 급격히 올라 C나 D급 헌터들의 사망률도 높아지지만…….
그녀, 웨어울프걸은 S급 헌터.
최근 마왕 이현의 등장으로 이름값이 좀 퇴색된 경향이 없지 않으나, 엄연한 강자다.
B급 게이트 정도는 혼자서도 수월하게 공략이 가능한 것이다.
쿠르르르…….
과연 예상대로 게이트가 닫히기 시작했다.
“휴. 오늘도 고생 많았다.”
하루 일과를 끝낸 일용직 노동자 같은 소리를 하며 웨어울프걸이 게이트를 나왔다.
그러자…….
“와아!”
“사인 좀!”
찰칵찰칵!
플래시 세례가 터지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종이를 내밀었다. 이상할 만큼 안경 쓴 사람이 많다. 게다가 하나같이 ‘FURRY’라는 단어가 쓰인 옷이나, 의인화된 동물 캐릭터가 그려진 옷을 입고 있다.
“사랑해요, 웨어울프걸!”
“아하하하…….”
웨어울프걸은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 사인을 해줬다.
그때 거한이 사람들을 밀치고 나왔다. 웨어울프걸이 그려진 티셔츠가 근육으로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웨어울프걸이 그를 보고 질색했다.
“헉.”
노골적인 경계. 그러나 거한은 아랑곳 않고 그녀의 앞에 서서 환히 웃었다.
“오랜만이군!”
“아… 예에… 안녕하세요…….”
“나도 사인 좀 부탁하지.”
그러면서 커다란 가슴을 쑥 내민다. 웨어울프걸은 억지웃음을 짓고 그의 가슴에 사인을 했다.
“크흠. 나도 S급 헌터가 됐다.”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 말에 흠칫하고는 물러났다.
“S급 헌터끼리 교우를 다질 겸, 번호 교환 어떤가?!”
“아… 제가 바빠서 이만!”
재빨리 차에 탄 웨어울프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나한테는 저런 이상한 사람들만 붙는 거야…….”
평범하게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살고 싶은데.
두려워하거나 이상한 놈들이 꼬이거나 둘 중 하나라 우울증이 걸릴 지경이었다.
우우웅!
그때 전화가 왔다.
유지애 이사다.
“응? 이사님이 웬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