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기계 장치의 신 (1)
후욱.
녹진한 연기가 밤하늘로 흩어졌다.
시가를 문 두툼한 입술이 말했다.
“난 한때 신을 믿었어.”
황금색에 가까운 갈색 눈동자 위로 구름이 천천히 흘렀다.
“부모님이 기독교 신자였거든. 부모님은 꽤 독실했지. 매일 주말마다 교회에 가 기도하며 헌금을 납부했어. 그리고 빌었지.”
반지를 낀 두꺼운 손이 한데 모였다.
“‘부디 우리 아들이 좋은 학교에 가서 성공하게 해주세요.’”
피식 웃은 후, 리처드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난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어. 꽤 괜찮았지. 동네에서 꾸준히 학교에 다닌 새끼는 드물었는데, 내가 그중 하나였어.”
그가 모았던 손을 뿌렸다.
“그러다 뿜! 게이트가 터졌지. FUCKING 재수 없게도 부모님이 계시던 교회 앞이었어. 나도 교회로 달려갔는데… 게이트에서 나온 트롤 놈이 교회를 깔아뭉개더군. 그때 깨달았지. ‘신은 없구나.’”
거구가 천천히 일어났다. 역삼각형의 등 곳곳에 튀어나온 쇳조각과 전선이 보였다.
“그런데 신이 나타나다니. 얄궂어.”
―난 신이 아니다.
핸드폰이 대답했다.
―처음 만났을 때 말했듯이 너희 인간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신은 없다. 나는 성좌 데우스 엑스 마키나다. 그것뿐이다.
“큭큭. 신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리처드의 오른팔이 대포 형상으로 변했다. 붉게 달아오른 팔에 강력한 마력이 집중되더니 하늘로 빛의 기둥을 쏘아올렸다.
콰쾅!
구름이 원형으로 흩어지고, 빛이 잠시 세상을 파랗게 비쳤다.
“이런 힘을 지닌 존재를 신이라고 부르지.”
―음?
핸드폰 화면이 바뀌었다.
―봐야 할 것 같군.
“뭘?”
화면에 데이먼의 초췌한 얼굴이 나타났다.
[예. 세간에 퍼진 영상은 전부 거짓입니다. 저는 그런 예언을 그린 적이 없습니다.]
“…뭐야?”
리처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예언의 존재 자체를 거짓으로 부정해버리면 그간 해온 공작이 전부 물거품이 된다.
핸드폰이 말했다.
―이게 끝이 아니다.
화면이 다시 바뀌었다.
재생되는 것은 요트에서의 전투 영상.
리처드가 올린 것과는 다른 각도의 영상이었다. 전혀 편집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것은 제노사이더가 올린 영상의 풀버전입니다. 보시다시피 마왕군을 선제공격한 것은 제노사이더 본인입니다.]
풍뎅이를 닮은 기사들이 민간인들을 보호하는 모습이 보였다.
[또한 이 장면을 보시면 전투의 여파로부터 몸을 던져 사람들을 보호하는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기자회견에 응한 유지애 이사의 얼굴이 나왔다.
[오늘 이 시간부로 마왕 이현님에 대한 억측 및 과도한 비난은 법적인 제재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부디 자제 부탁드립니다.]
리처드의 입에서 시가가 잘렸다.
“협회가 저놈 편을 들어줄 줄은 몰랐는데. 데이먼 놈도 협박이 부족했나?”
―응? 이런. 조심해라. 뭔가 온다!
“뭐? 뭐가 오다니? 뭐가…….”
고개를 돌린 순간 그의 가슴에 바윗돌 같은 주먹이 꽂혔다.
콰앙!
반짝이는 수면을 물수제비처럼 튕긴 리처드의 몸이 뽀그르륵,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새카만 심연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힘없이 떨어지던 중.
그의 인공 안구에 불이 번쩍 들어왔다.
첨벙!
“크헉!”
양팔로 추진체를 만든 리처드가 수면을 솟구쳤다.
물이 쏟아지는데…….
“윽?!”
허리 아래가 사라졌다. 척추뼈와 전선들이 핏덩이에 달라붙어 드러났다.
가슴에는 주먹 모양이 선명하게 남은 상황.
지나치게 강한 힘에 하반신이 뜯겨나간 것이다.
“WHAT THE FUCK……!”
리처드는 분노에 차 고개를 들었다가 밝아진 세상에 당황했다.
태양이 머리 위에 떠 있었다.
시간 이동을 한 것은 아닐 테고… 그의 눈앞에 치직거리며 나타난 반투명한 지도가 위치를 표시했다.
동해안 한복판.
원래 있던 장소에서 완전히 반대편까지 날아온 것이다.
“Jesus Christ!”
이런 힘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마왕… 아마 그놈일 텐데, 이렇게 강하다고?
주먹 한 방으로 사람을 지구 반대편으로 날려보낼 정도로?
그때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크하하하하!”
고개를 드니 태양을 등지고 선 남자가 보였다.
그가 천천히 내려오는데…….
“마왕…이 아니잖아?”
사자 갈기 같은 금발에 제노사이더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거구를 지닌 남자였다.
팔짱을 낀 모습에서 무시무시한 힘이 느껴졌다.
“이봐, 마키나! 저놈은 뭐야?”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대답했다.
―길가메시. 신살자. 도망쳐라. 네 힘으로는 이기지 못한다.
“지구에 있는 놈은 다 이긴다며?”
―지구 출신 아님. 다른 차원의 존재. 성좌도 잡아먹는 괴물.
그때 길가메시가 말했다.
“우하하! 들고 가기 딱 좋게 뽑혔군. 어이, 가만히 있으면 남은 팔 두 개는 남겨주마.”
바이킹이 시간 이동을 해서 현대로 떨어진 게 아닌가 싶은 화법이다.
설득이나 협상이 불가능하단 사실을 깨닫고 제노사이더는 재빨리 게이트를 열었다.
“제길! 그럼 일단 도망…….”
그 순간 길가메시가 황금의 번개처럼 나타나 그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우하하! 싸우자!”
운석 같은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그의 볼에 꽂혔다.
콰앙!
파직.
반쯤 열리던 게이트가 전류를 뿜고는 사라지고, 리처드의 몸이 대기권을 뚫고 날아갔다.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몸에 불이 붙어 거꾸로 치솟는 유성처럼 보였다.
“크아악! shit!”
게이트를 열려고 해도 속수무책.
리처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디서 이런 미친 괴물이 나왔단 말인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원망스러웠다.
화신이 되면 최강의 힘이 어쩌고 하며 힘을 주더니… 완전 미친 괴물이 있지 않은가!
그 와중에 마키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틀렸다. 회피 불가. 방어 불가. 도주 불가.
“나도 알아! 이 새끼야!”
“으하하하!”
광소를 터트리며 날아오르는 길가메시를 보고 리처드는 그냥 눈을 감았다.
“fuck…….”
어퍼컷에 맞은 그의 몸이 산산이 부서지며 달을 향해 날아올랐다.
* * *
빈이가 그네의 줄을 잡고 해맑게 날았다.
“빠아~”
뒤에서 그네를 밀어준 이현도 해맑게 웃었다.
“아이구~ 우리 빈이 잘 난다~”
앞에는 방송 카메라 여러 대가 그들을 잡는 중.
커피를 마시며 촬영하던 감독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배우 원준이 보내준 커피차가 뒤로 보였다.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야.”
옆에서 커피를 마시던 조감독이 끄덕였다.
“진짜요. 아니, 제노사이더가 그렇게 나쁜 놈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사실 그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이현에 대한 오해가 풀려서라기보다는 그냥 방송을 내보낼 수 있어서였지만…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이현이 다시 그네를 밀었다. 빈이가 꺄르륵 웃었다.
“노피!”
촬영하던 사람들은 물론 구경하던 사람들도 함께 기분이 좋아지는 웃음소리였다.
어쩜 저렇게 웃는 것도 예쁠까.
지치지도 않고 그런 빈이와 놀아주는 이현도 더욱 멋있어 보인다.
“저렇게 좋은 사람을 매도하고…….”
“근데 왜 그랬대요?”
“내가 어제 큐튜브로 프로파일러가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뭐라더라…? 경쟁심리? 그… 내 위에 사람 있는 거 못 참는 그거 있잖아.”
“아~”
끄덕끄덕하는데…….
“엇.”
“앗?”
“어어!”
“어머어머, 어떡해!”
경악과 비명이 연달아 터졌다.
빈 그네가 이현의 손에 떨어졌다.
툭.
이현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꾸름!”
파닥파닥…….
앙증맞은 날개 두 개가 열심히 하늘을 저었다.
빈이가… 날고 있다.
감독이 팔꿈치로 스태프를 툭툭 쳤다.
“야야야야! 카메라는 내가 잡을 테니까! 빨리 아래에 뭐 받쳐!”
“아, 예!”
스태프들이 우르르 달려가는데 이현이 손을 뻗어 제지했다.
“내가 잡죠.”
카메라가 하늘을 나는 빈이를 담았다. 이현이 아래에서 빈이를 빤히 올려다봤다.
“저 날개로 날아지네.”
아무리 봐도 몸을 지탱하기에는 작은 날개다. 고작해야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
잘 보니 빈이의 몸 주위를 마력이 휘감고 있었다.
“벌써… 마법을 사용하는 건가?”
아직 말도 못 뗀 애가 마법이라니.
직접 보지 않으면 아무도 믿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빈이는 분명히 날고 있었다. 게다가 제법 능숙하게 공기를 다뤘다.
아마도 그네를 타면서 느낀 공기의 흐름을 자신의 몸에 적용한 것이겠지.
또 한층 성장한 것이다.
이맘때 아이들은 하루하루 다르게 성장한다더니…….
역시 같이 있기를 잘했다. 이 순간을 놓쳤다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아빠~”
“그래. 아빠도 갈까?”
이현이 톡, 가볍게 발끝으로 땅을 박찼다.
붕 날아오른 그가 빈이의 옆에 누운 자세로 떴다.
“우와.”
“와아.”
파란 하늘을 유영하는 아빠와 딸. 그림 같은 장면이었다.
카메라 감독의 입가에도 자본주의로 가득 찬 미소가 흘렀다.
“흐흐흐. 대박 방송각이다.”
어쩐지 범죄자 같은 웃음이었다.
파닥이며 날던 빈이의 몸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아직은 오래 날기가 힘든 모양.
가슴으로 빈이의 몸을 받아낸 이현이 부드럽게 착륙했다.
“오오~!”
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울렸다.
이현은 괜히 멋쩍어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여자아이의 밝은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오빠!”
코트를 입은 소녀 셋이 쪼르르 놀이터로 왔다.
희수를 비롯한 걸그룹 하트캔디의 멤버들.
그녀들은 좀비 사태 이후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힘든 상황이었다.
하필 게이트가 터진 곳이 광고를 찍기로 한 곳이었던데다가, 당장 일을 해야 하는 사장부터 매니저까지 부상을 입었다.
멤버들도 사고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중.
남우에게 그런 소식을 전해 들으니 도무지 안쓰러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뭐라도 돕고 싶어 방송에 부른 것이다.
“공주님!”
빈이가 이현의 손을 놓고 달려갔다.
예쁘면 다 공주님이고 잘생기면 다 왕자님이다.
희수가 그 모습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빈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예전에 비하면 수척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웃으니 얼굴이 환하다.
역시 데려오기를 잘했구나 싶었다.
“그래. 잘 지냈나?”
“오라버니 덕분에요!”
다른 멤버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구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거, 감사 선물이요! 직접 만든 초콜릿이에요!”
“뭘 이런 것까지…….”
그때 십여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놀이터로 들어왔다.
다들 일반인들로 보이는데… 각자 하나씩 손에 물건을 든 상태.
“응? 그쪽 분들은……?”
쭈뼛쭈뼛 다가온 사람들이 말했다.
“저희도 그날, 마왕님께서 살려주신 사람들입니다.”
“이 기회에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붉어진 눈시울로 바라본다.
이현이 흘긋 보니 카메라 감독이 엄지를 척 내밀었다. 아무래도 그들이 몰래 준비한 이벤트인 듯했다.
“모두 모시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추첨으로 뽑은 분들이고, 못 오신 분들 중에 손편지를 보내주신 분들도 있습니다.”
스태프가 커다란 종이 상자 하나를 낑낑거리며 들고 왔다.
“이거 참…….”
이현의 귀가 조금 빨개졌다.
비슷한 일을 몇 번이나 겪었는데 왜 이런 순간은 매번 익숙해지지 않는지…….
천성인가 보다.
“음… 그럼 식사나 할까요? 다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