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예언의 그림 (3)
“으으…….”
데이먼은 가물거리는 눈을 억지로 떴다.
환한 등이 보였다.
“역시… 꿈이었나.”
“오, 이제 일어났나?”
다시 들려온 쉐도우 로드의 목소리에 데이먼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취조실 같은 공간.
그는 침대에 손발이 묶였고, 쉐도우 로드와 실물로는 처음 보는 마왕이 바라보고 있는 상황.
“뜨헉!”
악몽에서 깬 줄 알았더니 새로운 악몽에 돌입해버렸다.
마왕이 뭐라고 말하자 쉐도우 로드가 즉시 통역했다.
“어이, 퓨처 페인터. 네가 그린 그림에 대해 물어볼 게 있는데.”
“예, 옙. 뭐든 질문하십쇼.”
묶여 있지 않았으면 넙죽 엎드렸을 어조로 데이먼이 말했다.
“나에 대한 예언을 그렸지? 이거.”
이현이 액자 하나를 쑥 들었다. 데이먼이 얼른 끄덕였다.
“옙!”
“네가 그린 그림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던데… 어떻게 된 거지?”
“아, 그건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어느 부분을 말씀하시는 건지……?”
“하아.”
한숨 소리에 데이먼이 찔끔했다.
“아니, 그! 보… 보면! 보면 알 것 같은데요!”
이현의 고갯짓에 쉐도우 로드가 움직였다. 액자가 데이먼의 눈앞으로 왔다.
“후반부에 내가 어딜 가리키는데, 그쪽의 하늘 부분이야.”
데이먼은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액자를 살폈다.
과연, 이현의 말대로 하늘에 의도적으로 덧칠한 듯 새카만 부분이 보였다.
하지만…….
‘이거 말하면 나 좆되는 거 아냐?’
데이먼이 눈알을 굴리는데… 이현이 갑자기 침대 옆을 팍 짚었다.
“뭐 숨기면 아파진다?”
데이먼은 아픈 게 싫었다.
“저기… 제 능력은 감정에 영향을 많이 받거든요…….”
“어, 근데?”
“그래도 명색이 화가라서… 이 예술혼 때문에 그리고 싶은 것만 그리거든요.”
예언도 하고 싶을 때만 하는데 그리는 거라고 뭐 다를까.
심지어 협박받아서 그린 그림이라 그냥 대충 마무리했던 기억이 난다.
방금 본 부분이 그 ‘대충 마무리한’ 부분이고.
“그래서 안 그렸다?”
“예.”
“본 게 기억은 날 것 아냐?”
“그게… 예언이라는 게… 일종의 무아지경이라 잘 기억이…….”
싫어서가 아니라 진심이다.
“허허.”
이런 쓸모없는 놈을 보았나.
그런 표정으로 이현이 허탈하게 웃었다.
데이먼은 등골과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불쾌했다.
간지럽다. 닦고 싶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목이 베일 것 같았다.
상대는 그 마왕과 쉐도우 로드…….
어딘지 모르겠지만 한파가 몰아치는 바다의 한복판에 잠수함을 끌고 와 가둘 수 있는 미친놈들이다.
일부러 잠수함까지 끌고 왔으니 아예 수장시키려는 속셈이 아닐까…….
예언이 기분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녀석들이다.
차라리 그냥 죽이는 편이 낫지, ‘물은 답을 알고 있다’를 몸으로 느끼게 해줄지도 모른다.
며칠 사이에 두 번이나 목숨의 위협을 느끼니 자존심이 쪼그라들었다.
“저, 저기…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응? 그야 우리 형님이 결정하실 일이지.”
둘의 시선이 이현에게 향했다.
띠리리!
그때 벨이 울렸다. 잠수함에서 전화가 통했던가?
멍하니 보는데 이현이 영상 통화를 받았다.
“헉! 우리 딸! 응! 우리 따아알~ 아빠 보고 시퍼쪄요?”
“아빠아~”
귀여운 목소리가 잠수함을 울렸다. 빈이가 화면에 종이를 들어 보였다.
“풍뎅이 삼촌!”
“아이구! 우리 빈이! 그림도 잘 그리고 착해! 이뻐!”
한글이라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왠지 기분 나쁘다!
한참 동안 이어지던 통화가 끊어졌다. 이현이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다. 우리 빈이 보러 가야겠어.”
“어? 가시게요? 형님, 얘는 어쩔까요?”
잠시 데이먼을 내려다보던 이현이 말했다.
“뭐… 필요 없잖아. 풀어줘.”
“아, 옙!”
당연히 죽겠다고 생각했는데… 전화를 건 여자아이 덕분에 마왕이 기분 좋아진 덕이 아닐까!
데이먼은 눈물을 흘리며 마음속으로 빈이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 * *
[마시지.]
당당하게 말하는 리처드. 그를 기사들이 쳐다본다.
리처드의 시야로 보는 것 같은 화면.
[술은 싫나?]
짧은 대화가 이어지다가.
[우리면 충분하재.]
갑자기 화면이 흔들리며 폭음이 터지고.
하늘에 뜬 리처드의 모습이 나왔다. 기사가 그를 향해 쏜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빗나간다.
[크으. 비싼 시가라고!]
다시 이어지는 전투 후.
[오늘은 이쯤 해야겠군.]
대사 후 영상이 끊겼다.
리처드의 큐튜브 계정에 올라온 영상.
영상 말미에 소파에 앉은 리처드의 모습이 이어졌다. 어깨에 붕대를 감은 채로. 아직 전투의 흔적이 남은 상황.
[내가 휴식 중이었는데 이들이 갑자기 습격하더군. 목표야 뻔했지.]
[스마트한 내 구독자들은 예측했겠지만… 그래, 예언이 담긴 그림을 노리고 온 거였어.]
[아무리 나라도 삼 대 일은 무리더군.]
[어쨌든, 봤다시피 이놈들은 마왕의 부하들이었다.]
[날 암살하려던 속셈이었던 거지. 아마 예언의 원본을 없애거나 조작하려고 말이야.]
이현의 엄지가 핸드폰 화면을 슥 위로 올렸다.
난리가 난 댓글창이 나타났다.
[실화임?]
[다른 차원에서 왔다더니 개념도 다른 차원이었노ㅋㅋㅋ]
[야야, 말조심해라. 너도 암살 드간다.]
[어쩔티비.]
[존나 무섭네. 방송에서는 뭐 팔불출 아빠인 척하더니 뒤에서는 암살해버리네.]
이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편집도 절묘하고, 매스컴을 이용하는 데 상당히 능숙한 놈이었다.
이 편집본만 보면 누구나 잘못은 이현 쪽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때 지애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세다수랑 셔츠 광고가 취소됐다고?”
짜증 섞인 이현의 물음에 지애가 핸드폰 너머에서 잔뜩 졸아든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 외에도 들어오던 광고가 전부 끊겼습니다. 위약금을 물어내라는 곳도 있고요. 일단은 협의 중에 있습니다만 송출은 전부 정지될 예정입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그만큼 잔인한 영상이 퍼졌으니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이 갔을 터.
대중들이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는 것이야 뭐 원래 세상이 그런 것이고…….
―아혼살 하차 요청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응응. 알았어.”
크루엘에게 예언의 분석을 맡겼으니 아마 곧 연락이 올 것이다.
이 일을 배후에서 획책한 제노사이더라는 놈도 붙잡고.
예언의 분명한 진위를 확인하고, 무고함이 밝혀진다면 대중들도 다시 태도를 바꾸겠지.
“제노사이더 쪽은 걱정 마. 우리도 찍어놓은 게 있거든.”
―예? 그, 그런가요?
“아앙.”
이런 일이 생길 것까지는 예상 못 했지만…….
‘크루엘이 고안한 시스템을 이렇게 활용하게 될 줄은 몰랐네.’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지.
핸드폰 너머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휴우… 아, 그럼 선공을 한 건 제노사이더 쪽일까요?
“응. 영상은 내가 직접 큐튜브에 올려도 상관없겠지?”
―제게도 좀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문 편집팀이 있으니까요.
“오, 그래? 믿어도 되겠나?”
상대는 같은 S급. 협회에 S급으로 있었던 날은 제노사이더가 더 위다.
헌터 협회에서 한쪽 편을 굳이 들어야 한다면 제노사이더의 편을 들 가능성도 있다.
얼굴 좀 많이 봤다고 편을 들어줄 거라고, 순진하게 믿어서는 안 된다.
여론이 당장 제노사이더의 편을 들어주고 있기도 하니…….
―믿어주세요! 영상만 확실하다면 제가 여론은 금방 뒤집어 보이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믿을게. 아, 그리고…….”
―네.
“프린세스 카리나 코스프레도 믿을게.”
―…그쪽은 안 믿으셔도 돼요!
빽 외치더니 전화가 끊겼다. 이현은 피식 웃었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네.”
전화를 끊으며 집에 들어가는데…….
“아빠아!”
빈이가 울면서 달려와 이현의 다리에 안겼다.
얼떨결에 빈이를 안아 든 이현은 당황했다.
“우리 빈이 누가 울려써? 웅?”
빨간 눈이 이현을 빤히 보더니… 이내 와락 안긴다.
“…아빠.”
“응?”
작은 손이 이현의 옷을 찢을 것처럼 강하게 붙잡았다.
“울려쪄.”
“…아빠가 울렸다고?”
이현의 정수리에 벼락이 내리쳤다.
뭘 잘못했지?
이해가 안 가 빈이를 계속 바라보는데… 안쪽에서 일성이 말했다.
“빈이가 아빠를 계속 찾았어요. 최근에 현 군이 며칠씩 집을 비우니까 좀 불안했나 봐요.”
그랬구나…….
하긴, 매일같이 붙어 있다가 처음으로 며칠씩 떨어졌으니 빈이 입장에서는 불안할 만도 하다.
다 빈이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직접 돌아다녔던 건데, 결과적으로는 빈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건가.
미안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이현은 빈이를 꼭 안고서 소파에 앉았다.
“빈아.”
“웅.”
“아빠는 우리 빈이 두고 절대 어디 안 떠나. 걱정 마. 알았지?”
빨간 눈이 그를 올려다보다가 와락 안겼다.
“웅!”
잘못을 저지른 아빠를 이리 쉽게 용서하고 금방 믿다니.
이 천사 같은 생물은 대체 뭘까.
‘아니, 천사보다 더 착해!’
이현은 흐뭇하게 웃으며 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쩔 수 없군. 당분간은 집에 있을까.’
직접 나설 수는 없겠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쌍둥이들을 보내서 안 됐으니 더 강한 놈을 보낼 수밖에.
“야! 길가메시!”
신중하게 빈이의 블럭 쌓기 장난감을 갖고 놀고 있던 길가메시가 흠칫 놀랐다.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삼식이도 같이 놀라 소파로 펄쩍 뛰어올랐다.
“아, 아무것도 안 만졌소!”
“…됐으니까 그냥 와. 부탁할 게 있다.”
“음? 뭐요?”
길가메시가 다가오자 삼식이가 그 두꺼운 허벅지에 찰싹 몸을 붙였다.
‘얘네는 언제 친해졌지?’
같은 짐승 계열이라 통하는 게 있나…….
“두들겨 패서 끌고 올 놈이 있는데 말이야.”
“강하오?”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벌써 끌리는 듯했다.
하긴, 이곳에 온 이후 길가메시는 제대로 된 싸움이라고는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애들 장난감을 갖고 놀고 있었겠어…….
‘답답해서가 맞겠지?’
빈이의 장난감을 탐낸다면 엉덩이를 걷어차 쫓아낼 것이다.
“내 부하 셋이 당했어. 좀 하는 모양이던데?”
길가메시의 호승심을 부추기기 위해 이현은 살짝 양념을 쳤다.
아니나 다를까, 길가메시가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표했다.
“오오~”
길가메시를 따라 이현의 품에 안겨 있던 빈이가 입술을 모았다.
“오오~”
불이 확 뿜어져 나온다. 이현은 얼른 입술 위에 검지를 세웠다.
“어허, 빈아. 불 함부로 뿜으면 돼, 안 돼?”
“앙 대.”
빈이가 제 입술을 두 손으로 막았다.
다른 건 몰라도 빈이가 불을 뿜는 것에 대해서는 이현은 엄하게 가르쳤다.
자칫 잘못해서 다른 사람에게 화상이라도 입히면 그건 바로 이현 자신의 책임이다.
요즘처럼 여론이 안 좋은 시기에 빈이가 잘못이라도 하면 저지른 것 이상으로 비난을 받을 테고…….
스트레스나 압박에 민감한 아기인 빈이는 더더욱 큰 상처를 받겠지.
다행인 점은 본능인 건지, 빈이도 자신의 화염이 공격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불의 세기를 조절할 줄도 알게 되어서 조심하는 것이 느껴졌다.
덕분에 버리는 인형이나 아티팩트도 훨씬 줄었다.
“우리 빈이 착하다.”
쓰다듬어주자 빈이가 꺄르륵 웃으며 꼬리와 날개를 파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