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예언의 그림 (1)
“아빠!”
집에 돌아오자마자 거실에서 놀던 빈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이현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빈아아아~ 아빠가 돌아와쬬요~”
번쩍 안아 든 이현이 얼굴을 비비려는데… 빈이가 양손을 뻗어 얼굴을 밀었다.
이현이 충격에 굳었다.
“왜… 왜? 혹시 아빠가 벌써 싫어졌나?”
일성이 허허 웃었다.
“수염 때문인 것 같네요.”
“응? 아!”
올림푸스에 있는 동안 수염을 안 깎았더니 꽤 길어졌다. 그 까칠한 볼로 비비면 따가울 테니 빈이도 밀어냈던 것이고.
면도하고 나오자 빈이가 손으로 챱챱 볼을 더듬었다.
이현이 마약 검사를 당하는 조직원 같은 얼굴로 빈이를 바라보는데…….
빈이가 그를 와락 안았다.
“아빠!”
“그래~”
올림푸스에 있는 동안은 딱히 주변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서 수염이 자란 모양이다.
앞으로는 신경 좀 써야지.
“별일 없었죠?”
베요네타의 보고에 의하면 자리를 비운 동안 근처에 게이트 한 번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의 차이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오해가 있다.
예를 들어 키르단 제국에서 일부 종족들은 성인식으로 팔이나 다리를 자르는 의식을 거행하는데, 이를 보고 아동 대학살이 벌어졌다는 보고가 올라온 적이 있었다.
찾아가 보니 그 일부 종족들은 재생이 되는 자들이라 허탕을 쳤다.
아니나 다를까… 이현의 질문에 일성의 주름진 얼굴 위로 수심이 드리웠다.
“그게… 현 군, 잠깐 이리 와보겠어요? 빈이는 잠깐 혼자 놀게 두고.”
말을 듣고 방으로 들어가니 일성이 큐튜브를 펼쳐 보였다.
그런데 제목이 어째 쎄하다.
[마왕은 사악하다? 데이먼 호크니의 충격 예언!]
섬네일에 시뻘건 글씨를 박아놓고 이현의 팔짱 낀 모습과 경악해 도망치는 사람들을 합성해놨는데 이현이라도 스치다 봤으면 눌렀을 것 같았다.
일성이 눈치를 보며 영상을 눌렀다. 로봇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시사를 다루는 채널 테너튜브입니다. 오늘은 마왕 이현에 대한 충격적인 예언이 있어서 가져와봤습니다.]
[마왕 이현은 나이 불명의 S급 헌터로, 최근 헌터 최초로 아혼살에 출연해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요.]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현은 멸망급 게이트를 홀로 클리어하며…….]
쓸데없는 정보의 나열이 이어졌다.
5분이 지나자 이현의 이마에서 핏대가 꿈틀거렸다.
“아무 내용이 없는데요?”
“아, 이제 나오니까 봐요.”
갑자기 화면이 전환됐다.
나오는 것은 기괴한 영상.
이현 자신의 모습인데…….
“응?”
뭔가 다르다.
팔짱을 끼고 서서 아래를 오시하는 모습.
새카만 망토가 등 뒤에서 흩날렸다.
이글거리며 불타는 도시를 배경으로 서 있는데… 온갖 마물들이 발밑으로 내달리며 도시를 습격했다.
간판을 보니 유럽권 같았다.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을 도륙하고 찌르는 장면이 모자이크 처리되어 나타났다.
꽤나 선명한 화질… 마치 이현이 자신도 모르게 영화에 출연한 것 같은 장면이었다.
다시 로봇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 보신 장면은 퓨처 페인터 ‘데이먼 호크니’의 예언 일부입니다.]
[원래 이 예언은 헌터들만 볼 수 있었는데요. 이제 기술이 발달해 이렇게 영상화도 가능해진 것이죠.]
[최초로 공개한 사람은 저, 미국의 S급 헌터 제노사이더인데요.]
[이 예언을 보면 마왕이 이끄는 군세가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마왕 이현을 과연 믿어도 괜찮을까요?]
이현은 다시 영상을 돌려보았다.
달리는 마물들의 무장과 생김새를 보니 아시스가 이끄는 ‘전쟁의 기사단’이 분명했다.
알고리즘으로 이현과 쉐도우 로드, 불스아이 병장의 관계를 조망한 인터뷰와 시사 뉴스 등이 이어졌다.
“흐음.”
일성이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이 영상 때문에 다들 난리예요. 영상을 공개했다는 인물이 유명한 제노사이더이기도 하고…….”
사이버 렉카가 실어다 나른 이 영상의 조회수가 자그마치 145만 회.
얕볼 수가 없는 조회수였다.
“제노? 그게 누굽니까?”
“미국의 S급 헌터인데, 현 군 이전에 제일 강하다고 하던 사람이에요.”
이현은 즉시 제노사이더를 검색했다.
거구의 흑인이 나타났다.
“다 큰 어른이 1위 빼앗겼다고 이러는 건 아닐 테고…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 예언이라는 게 신빙성은 있는 겁니까?”
“데이먼 호크니의 예언이라고 하면 유명하지요. 백 프로! 무조건 맞춘대요.”
“백 프로라…….”
예언자, 예지 능력이라는 말은 이현에게 낯설지 않았다.
제국에도 그런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날씨를 백발백중으로 맞히는 예언자들이 있어 월급을 주고 고용해서 써먹었다.
헌터… 마력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자들이 있는 이상, 예지 능력의 존재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다.
문제는… 어째서 이런 예언이 나타났는가.
그때 지애에게서 전화가 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현이 중얼거리고는 전화를 받았다.
―아, 이현 님! 헌터 협회 유지애 이사입니다. 바쁘신가요? 통화 가능하십니까?
“아, 그 큐튜브 영상 때문인가?”
―보셨군요. 우선 협회에서 예언에 대한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해결 방안은?”
―아, 예. 우선… 말씀드리기 굉장히 죄송스럽지만… 이현 님께서 직접 방송에 출연해 해명해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겠지.
아주 예상한 대로의 답변이었다.
이건 협회에서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현은 의자에 털썩 앉아 머리를 짜증스럽게 긁었다.
“그거로 되겠어? 예언이잖아. 100%라던데?”
―저는 이현 님께서 그런 일을 벌이시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난 못 믿겠는데.”
―…예?
“미래는 모르잖아. 무슨 일이 생겨서 다 엎어버리겠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지.”
예를 들어 저 유럽권 나라 어딘가에서 빈이에게 미사일을 쏘기로 결의했다던가.
아니, 그랬다면 민간인 학살은 하지 않겠지만… 어쨌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면 행동할 수도 있다.
이현은 자신이 절대적인 선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생각도 없고.
당황한 지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그럼… 예언대로의 행동을 하실…까요?
“먼저 공격을 당한다면.”
―아, 아…….
희박한 확률이겠으나 이현이 군대를 끌고 대학살을 벌이는 것도 마찬가지의 확률이다.
“우선 예언의 전체 내용을 봐야겠는데?”
예언이라고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로 의미가 달라지니, 지금 공개된 내용도 중요한 내용을 자른 일부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그럴 확률이 높을 거라고 이현은 생각했다.
―그 부분은… 저희도 파악을 서두르고 있습니다만…….
“응?”
―예언을 한 퓨처 페인터는 자신의 예언을 그림으로 그립니다. 예언의 원본인 셈이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번에 그 그림을 분실했다는군요.
“거, 수상쩍네?”
썩은 내가 풀풀 난다.
“알았어. 내가 좀 알아보지.”
―예? 자, 잠시만…….
전화를 끊은 이현은 곧장 서랍을 뒤졌다.
“이게 어디 있더라… 아, 찾았다.”
황금색 폰을 찾아낸 이현이 저장된 유일한 번호를 눌렀다.
―엇? 형님! 웬일이십니까?
“어, 지태야. 부탁할 일이 좀 있는데.”
―훗.
어쩐지 재수 없게 웃은 지태가 말했다.
―‘예언’ 때문이시죠? 이미 다 찾아놨습니다.
이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 녀석…….
“제법인데?”
싫다고 외치지만 아무리 봐도 암흑가 수장이 참 잘 어울리는 녀석이다.
―제노사이더라는 S급 헌터가 일주일 전에 데이먼 호크니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나흘 후 사건이 터졌고요. 데이먼이 분실한 ‘그림’은 제노사이더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오호라. 역시 그랬군.”
―제노사이더가 형님께 뭔 원한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현재 놈의 위치도 파악했습니다. 지중해에 요트를 띄워놓고 한가롭게 놀고 있어요. 함정일 가능성도 있긴 합니다.
“그건 상관없지.”
S급 헌터 수준이 함정을 파봐야 베요네타가 혼자 놀면서 돌파할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겠지?’
갑자기 시비를 털었으면 뭐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
올림푸스에 간 시기에 맞춰서 예언을 공개했다는 것은 이현이 언제 올림푸스에 가는지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
아마도 ‘신’이라는 것들의 하수인.
혹은 ‘화신’.
예언을 조작해 끌어내려는 전략일 것이다.
“위치 좀 보내줘라.”
―아, 이왕 보내드리는 거… 어차피 오늘 형님 집에 가기로 했는데. 그때 가져갈까요?
“…응?”
순간 이현의 뇌리에 큐튜브 영상들이 스쳤다.
“아냐… 오지 마.”
―예?
“그냥 폰으로 보내줘.”
―큐잉큐잉. 퍼플 큐잉은 슬퍼요.
“…….”
* * *
새파란 바다.
맑은 햇빛을 반사해 은어의 비늘처럼 반짝이는 수면 위로, 네 개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인간과 비슷한 형태였으나 놀랍게도 하늘을 나는 중.
“후후. 이렇게 중대한 일을 맡기셨으니… 주군께서 그만큼 저를 신뢰하신다는 의미겠지요?”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날던 베요네타가 흐뭇하게 웃었다.
하지만 뒤를 따르는 세 인영들에게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캐도, 금마가 억수로 운 좋은 놈이라 안 카나.”
“마. 등짝을 막 이리, 이리 비비카는데 지긴다카이.”
“캬~ 그 좋은 걸 지 혼자 봤나.”
베요네타의 얼굴이 구겨졌다.
기사단의 천인대장을 맡고 있는 그들은 키르단에서는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세쌍둥이 기사라고 해서 유명했으나…….
“조용히들 가지?”
“앗! 단장! 목표가 보입니다!”
갑자기 표준어를 쓰는 게 왠지 열받는다. 소외당하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여기서 트집 잡으면 너무 속 좁은 상사가 되겠지.
중요한 임무 중에 그런 트집을 잡는 것도 좀 이상하고.
베요네타는 부글거리는 마음을 참으며 차크람을 빼들었다.
멀리 커다란 요트가 보였다.
아직 몇 킬로미터 거리가 남았지만 갑판에 있는 수영장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확연하게 들어왔다.
“좋아. 마지막으로 확인하지. 목표는?”
칼을 빼든 세 천인대장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전원 생포. 부득이할 경우에만 사살. 최중요 목표는 그림. 절대 해가 가지 않게 할 것.”
“좋아. 돌입.”
배의 상공에 도착한 베요네타가 허공에 멈췄다.
그녀가 입을 벌리고 양팔을 들었다.
부우우우우!
입과 옷자락의 안쪽에서 무수한 벌레떼가 나와 삽시간에 배를 둘러쌌다.
바깥으로 탈출하려는 것을 감지하고 막아내는 효과는 물론 외부의 개입도 차단하는 강력한 방어 기술이었다.
세 기사가 먼저 잠입하고, 베요네타가 뒤를 이어 배에 들어갔다.
후욱.
“뭐, 뭐야?”
“먹구름인가?”
“무서워…….”
음악을 틀어놓고 파티를 즐기던 사람들이 한데 뭉쳐서 벌벌 떨었다.
그들의 눈에는 갑자기 몰려온 먹구름이 세상을 감싼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들을 포위하는 형국으로 세 기사가 내려섰다.
거대한 갑충의 모습을 하고 흉흉한 병장기를 든 기사들의 모습에 사람들이 기겁했다.
“꺄악!”
“괴, 괴물이다!”
“게이트가 열렸나?!”
기사들이 무기를 겨누고 사람들을 살폈다.
하나같이 반쯤 헐벗은 자들. 예상했던 위험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자자, 가만히 있으면 안 다친다카이.”
“주둥이 다물고 조용~히 있으라.”
“크크크… 무시무시한 괴물님들 납셨다.”
팔을 우스꽝스럽게 흔들며 말하는데… 하는 행동은 안 무섭지만 생김새나 든 무기가 살벌해서 보는 이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공포로 다가왔다.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쾌락 살인마 같달까!
“늦었군.”
그때, 새카만 그림자가 안에서 나왔다.